# 605
회귀자 사용설명서 605화
일생일대의 고민(3)
솔직히 이게 고민할 거리가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물론 하나하나를 자세히 다 따지고 들어가면 베니고어가 여러모로 유리한 면이 많다.
일단 나와 함께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왔다는 것이 가장 커다란 메리트가 아니었던가.
대륙의 일을 처리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공감해 주고 있었고, 필요한 상황에서는 적당히 휘둘려지기도 한다.
가끔은 어쩔 수 없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주기도 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지금까지 다사다난한 일들을 함께 겪어오기는 했지만, 지금에 와서 떠올려보면 모든 일이 잘 풀렸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게 정리되지 않았던가.
친분 쪽에 중점을 둬 생각해 보면 무조건 베니고어 측에 손을 들어야 함이 옳다.
하지만 조금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베니고어랑 같이 일하는 게 정말 맞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친하다고 해서 무작정 편을 들어줄 수 있을 정도로 이 업계는 만만하지 않다.
아직 넬리아라는 신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한 것은 아니지만 대충 보기에도 유능한 것처럼 보이지 않은가.
[일정량 이상의 신성을 사용해 대륙에 영향력을 끼칠 경우에는 최소한 사전에 통보해 드리려고 합니다. 추가로 저희가 할 수 있거나 도울 수 있는 일이 생긴다면 최선을 다해 지지해 드릴 것을 미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이는….]
베니고어가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나 역시 가슴이 아팠지만, 모두가 본인의 잘못이지 않은가.
악마와의 계약에 도장을 찍은 것도 결국에는 베니고어였고, 루시퍼가 대륙 안에 들어온 것은 캐치해 내지 못한 것 역시 베니고어의 잘못이었다.
‘도대체… 어떤 신이 악마랑 계약을 해?… 이건 베니고어 잘못이 맞지.’
어디 그것뿐이랴.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베니고어가 규율을 깬 것만 해도 수십 가지가 넘는다.
그중에서도 파산 사건은 나조차도 쉴드를 쳐줄 수가 없을 정도로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다른 차원에서 신성을 빌려 쓰다 파산한 것은 무조건 그녀의 잘못이다.
비교적 사고가 유연하다는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게 넬리아가 가지고 있는 유능함이라는 이점을 어찌 이겨낼 수 있을까.
‘베니고어가 결국 어둠에 물들어 버렸나….’
저도 모르게 나온 혼잣말에 곧바로 대답해 오는 넬리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현재 확인 중에 있습니다. 자세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가능성이 높을 거라고… 상층부에서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후우….’
[상심하시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이기영 님.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 오셨으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잊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아니, 제가 잊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종교개혁 하려면 또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나.’
작업 자체가 힘든 것은 아니다.
아쉽지만 어둠에 물든 베니고어와의 작별인사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베니고어를 위해서도, 나 자신을 위해서도 그게 옳은 선택처럼 여겨졌다.
‘이기영 신도… 이기영 신도…’라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은 기분.
[등급 이하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꼭… 꼭 보답할게, 이기영 신도. 내가… 이기영 신도 사랑하는 거 알지? 사, 사랑하는 거 알지? 우리 좋았잖아. 나 버리는 거 아니지? 그렇지? (0/1)]
실제로도 들려오고 있었다.
‘뭐야.’
[네?]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저도 모르게 눈앞에 있는 넬리아를 바라보게 된다.
아무래도 베니고어가 내게 따로 연락을 넣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모양.
얘는 또 어떻게 연락한 건지 모르겠다.
구치소 비슷한 곳에서 몰래 전화하고 있는 것 아닐까.
정확히 뭘 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둠에 빠진 베니고어를 내 힘으로 구하기에는 역부족….
[등급 이하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전, 전부 줄게… 원하는 건 전부. 그러니까 나 버리면 안 돼. 히끅… 이기영 신도, 버리면 안 돼. 원하는 건 전부 다 준비해 줄게. (0/1)]
역부족….
[등급 이하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그, 그리고 이대로 가면 이기영 신도에게도 좋지 않을 거야. 선, 선례가 생기면 이기영 신도가 이후에 올라올 때도 문제가 생길 수도 있… (0/1)]
…이겠지만 최소한의 노력은 해보는 것이 옳다.
그동안 함께 쌓아온 추억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베니고어에게 등을 질 수가 있을까.
베니고어와 나는 단순히 신도와 신의 관계에 있는 게 아니다.
그 누구보다도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아껴주는 이해자였다.
넬리아의 뒤에서 보이고 있는 베니고어의 조각상, 그 조각상에서 떨어지고 있는 눈물 한 방울.
편안했던 넬리아의 미소가 가증스러워 보이기는 게 당연하리라.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다른 분으로 교체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이기영 님. 하지만 제 이름을 걸고 말씀드리건대 저는 절대로 이기영 님을 실망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믿어주시고 일을 맡겨주신다면 몸이 바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제게 필요한 건 베니고어 님뿐입니다.’
[네…?]
‘가만히 보고 있자고 하니 지금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아니, 애초에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베니고어 님이랑밖에 일 안 하렵니다.’
[아….]
‘백번 양보해 조사하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게 꼭 지금 같은 시기여야 하는 겁니까? 베니고어 님께서 과한 면이 있다는 건 저도 익히 알고 있는 부분이지만, 베니고어 님께서도 대륙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신 겁니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까지 대륙을 위해 희생하셨던 분이 아닙니까. 어둠에 오염됐다는 판단이 되면 그 어둠을 정화하는 게 먼저인 게 당연한 수순인데… 어떻게 곧바로 쳐 낼 생각을 하시는지… 이게 그쪽의 방식인 겁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일단은 조사를….]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얼굴, 본인이 기대했던 반응과는 다르다는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당황하기보다는 어떻게 대화를 이끌어 나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 같다는 게 올바른 표현이리라.
아마 ‘이쪽의 방식인 겁니까?’라는 대사가 결정적이지 않았을까.
영입을 고려하는 만큼 고민할 여지가 생길 수밖에 없을 테니까.
‘지금 대륙의 상황이 어떤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습니다. 모두가 힘을 합쳐 위기를 벗어나도 모자랄 시기가 아닙니까. 정확히 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파벌 내 힘 싸움이 아예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베니고어 돌려줘.
‘베니고어 님께서는 대륙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신 분이십니다. 자신의 자존심과 신념과 믿음, 그녀가 저지른 모든 일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이기영 님. 힘싸움이나 파벌 때문이 아니라… 그리고 베니고어의 신성 사용 내역을 자세히 살펴보시면 현 대륙의 상황과는 연관성을 찾을 수 없는 사용 내역….]
‘듣고 싶지 않습니다. 베니고어 님을 불러주세요.’
[한 번만 더 생각해 보시고….]
‘더 이상 생각할 게 있습니까? 베니고어 님과 이야기 하겠습니다.’
[지금은 조사 중이라 베니고어를 불러오기가 힘든 상황입니다.]
‘아직 정확히 죄가 있다고 밝혀지지도 않은 상황입니다. 무죄 추정의 원칙도 따지지 않고 무작정 죄인으로 몰고 가는 것은 불합리합니다. 베니고어 님은 정식으로 변호사를 선임하신 게 맞습니까? 혹여나 압박 수사를 받고 있지는 않을지, 한 명의 신도로서 걱정이… 후우….’
[조사가 끝난 이후에 정식으로 다시 복귀하시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그 조사가 억류된 상태에서의 조사가 아닙니까. 그녀는 아직 죄인이 아니에요. 조사를 받을 것이 있다면 대륙의 일을 병행하면서 받으셔야 할 겁니다. 물론 변호인을 선임하실 수도 있고요. 아무리 혐의가 있다고 한들 이런 처우와 대우라니… 제 눈에는 인간들의 방식이 더 이성적으로 보입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이기영 님.]
‘지금 당장 베니고어 님의 억류를 풀어주지 않으면 단언컨대 제 협조를 얻기 힘드실 거라고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건 협박하는 게 아니에요, 넬리아 님. 신성하신 분들이 품고 계신 생각이 저희 인간들의 방식과 다를 거라고는 알고 있습니다. 제가 하는 말들을 이해할 수 없으시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하지만 이 방법은 옳지 않습니다. 미천한 제 눈에도 지금의 방식은 옳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진심으로 환멸이 난다는 표정을 담아보자.
고생하고 있을 베니고어 님의 모습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순수한 눈물방울이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어느새 눈 안을 가득 채운 눈물이 마치 폭포수처럼 흐르던 중, 한숨을 쉬던 넬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화악 하는 소리와 함께 튀어나온 베니고어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 것.
[이기영 신도… 이기영 신도오….]
달려오자마자 안기는 모습, 무척이나 감동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정확히 윗분들이 어떤 선택을 내리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한고비는 넘겼다.
[이기영 신도오… 어허어어엉… 이기영 신도오… 믿었어… 믿고 있었어. 이기영 신도가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구우….]
‘제가… 어떻게 베니고어 님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자기세뇌를 하도 박아대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베니고어의 얼굴이 아름다워 보인다.
서둘러 이성을 되찾으니 씁쓸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넬리아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모두 해결된 겁니까?’
[아닙니다. 이기영 님의 주장에 의거해 일단은 베니고어를 비롯한 이 대륙 신들의 억류를 무효화했을 뿐입니다. 아직도 베니고어에게는 여러 가지 혐의들이 붙어 있으며 이 이후의 조사와 처우는… 조금 더 깊이 깊은 대화와 토론을 통해 결정될 것 같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넬리아 님.’
[아니요. 저는 그저 윗분들의 말씀을 전해드린 것뿐입니다. 조만간 이번 일과 관련해 다시 한번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베니고어 역시 함께 말입니다.]
[…….]
[그럼 안녕히. 꼭 다시 뵙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이기영 님.]
‘저 역시 좋은 모습으로 다시 뵙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끝으로 넬리아는 자취를 감췄다.
베니고어는 그저 눈물을 짓고 있는 표정, 뭐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뭘 먼저 물어봐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오히려 불안해하는 얼굴을 보니 내가 다 불안해질 지경이었다.
일생일대의 교차로에서 옳은 선택을 한 건지 궁금해진 것은 당연지사.
물론… 선례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베니고어의 주장은 옳다.
나 역시 켕기는 게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세상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루시퍼 쪽으로 가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혹시나 일이 꼬여 빛 쪽으로 합류하게 될지도 모른다.
김현성과 함께 간다고 가정한다면 이쪽이 더욱더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을까.
만약 그때가 왔을 때 다른 파벌 쪽에서 이것저것 걸고넘어진다면 내게는 상당히 귀찮은 일이 될 수도 있으리라.
‘지금 상황에서도 조심하는 게 맞기도 하고….’
만약 베니고어가 유죄 판결을 받는다면….
‘시바… 점점 머리 아파지는데.’
5현장을 연구해야 하는 판국에 성검의 주인까지 찾아줘야 하고, 심지어는 베니고어의 뒤까지 봐줘야 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와는 다르게 세 번째는 시간과 공간에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기억상실증 기믹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시도 때도 없이 픽픽 쓰러진다면 조노보노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대륙의 일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와중에 들어온 한 방.
내 기분이 구리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눈치를 보고 있는 빛 덩어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미안해… 미안해, 이기영 신도.]
시바.
“고개 드세요, 베니고어 님. 당신 아직 죄인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