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2
회귀자 사용설명서 612화
떡락(1)
급하게 반응하는 것이 당연하리라.
‘너, 이 새끼. 시바….’
회색빛을 뿜어내는 겉모습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열망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나를 주인으로 결정한 것이 아닐까.
적어도 이쪽을 찌르기 위해 스스로 뽑히고 있다는 것보다는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벨리알이나 루시퍼 같은 악마들이 친근감을 느낄 정도의 역겨운 영혼이라고 하니, 놈 역시 이쪽의 영혼에 끌린 것일 수도 있다.
‘순수한 영혼을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아니면 자신이 아무리 타락시킨다고 한들, 그 결과물이 이쪽의 영혼에게 닿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뭐가 어찌 됐든 놈이 내게 군침을 흘리고 있다는 것 하나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뽑히려는 자와 뽑히지 않게 하려는 자의 싸움.
‘제기랄.’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게 될 수밖에 없었다.
저주받은 신단의 율리에나 때가 생각나는 것은 기분 탓일까.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멀찍이 떨어진 이지혜가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오빠는 진짜네요. 와… 얼마나 영혼이 깨끗하면 성검이 저렇게 반응을 해요?”
‘누나, 그거 반어법이지?’
“나한테 주인 될 생각 없냐고 이죽거리더니… 역시 진짜는 진짜를 알아본다니까. 아무래도 성검의 선택을 받기에는 제 인성이 조금 모자랐던 모양이네요. 역시 성검의 용사가 될 사람은 속내가 투명한 사람이 어울린다니까.”
‘누나도 도긴개긴이야. 내가 없었으면 누나한테 갔을 거라고.’
“이거 촬영해도 되요? 선택받은 용사가 여기서 탄생. 내일 언론이 떠들썩해지겠네요. 힘내요. 대륙의 전설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되니 이보다 더 영광일 수가 있을까요.”
“그만해… 누나. 지금 농담할 상황이 아니니까. 내가 진짜로 용사 되면 성검코인은 떡락이라고, 떡락… 써먹을 줄도 모르는 검의 주인이 돼서 도대체 어디에 쓰려고.”
“왜요. 좋아 보일 것 같은데….”
자신의 인성에 대해 감탄했던 나에게 통쾌해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평소라면 이지혜와 설전 아닌 설전을 벌였겠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제발 나오지 마, 새끼야. 난 너랑 안 된다고. 다른 검사들도 많은데 왜 연금술사한테 반응하고 그래?’
우우웅.
‘상관없다고?’
우우우웅.
‘나는 상관있어. 그러니까 이러지 말자, 우리…. 네가 원하는 사람으로 잘 구해줄게. 지금 상황이 조금 급해서 그러니까 우리 만남은 나중으로 미루자. 어차피 너나 나나 시간 많잖아. 루시퍼 님한테 들었잖아. 2000년만 기다리면 나도 필멸자 벗어날 수도 있다니까? 그럼 영원히 함께라고….’
우우우우웅.
‘못 기다리겠어? 더 이상 못 참겠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게 맞아?’
우우우우우웅.
이제는 사념이 전해져오기까지 한다.
말로 들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놈이 현재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대략 느껴진다.
벌써 영혼이 연결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될 지경,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강제로 도장이라도 찍게 생겼다.
물론 나도 이런 종류의 아이템의 주인이 되면 좋다.
제물을, 좋은 아이템을 싫어하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하지만….
‘써먹을 수 있는 사람이 써먹어야 돼.’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처럼 이 검의 효율을 제대로 살릴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같은 신화 등급이기는 하지만 김현성이 가지고 있는 듀렌달보다 더욱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되는 녀석이지 않은가.
검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초짜가 녀석을 휘둘러 봤자 얼마나 효율이 나올까.
나 자신을 깎아내리고 싶지는 않지만, 돼지 목에 진주를 걸은 것이나 다름없다.
무엇보다….
비둘기들은 물론이거니와 바깥 세계의 신을 상대할 때에도 김현성의 옆에 설 수 있는 강자가 필요했다.
차희라가 있기는 하지만 그녀는 팀 플레이에는 어울리지 않는 종류의 패였고, 조혜진이 아무리 성장했다고 한들, 김현성의 옆에 서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패였다.
검은 백조의 박연주 역시 마찬가지, 애초 그녀는 등 뒤에 숨은 단도가 아니었던가.
암살자 타입을 김현성과 함께 보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김예리도 아웃.
미안하기는 하지만… 우리 거북이 돼지 새끼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김현성에게 따라붙으라고 앞서 나열한 모든 이에게 지시한다면 저들의 가랑이가 찢어질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말하자면 현재 김현성과 발을 맞춰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거다.
비둘기 침공 때는 북서부 지역을 틀어 막아주고, 바깥 신과의 결전 때는 회귀자와 호흡을 맞춰줘야 한다.
혹시 모를 변수에 대응해 줘야 했고, 필요할 때는 희생도 해줄 인재가 필요했다.
김현성이 이야기한 외부 세력의 전력을 대략 수치화해 보면 용사의 존재는 무조건 필요한 상황이라 할 만했다.
괜히 성검 코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검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는 양반이 폼 잡으려고 무턱대고 집기에는 그 리스크가 너무 크다.
그리고.
‘부작용, 시발러마… 부작용!’
내 몸을 갉아먹는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디 잠깐 아픈 거야 치료하면 나을 수 있지만 이런 종류의 검들이 뿌려주는 부작용은 그런 종류의 고통이 아니지 않은가.
우우우우우우웅!
‘그렇게 나쁘지 않을 거라고? 웃기지 마, 새끼야. 나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 거야. 괜히 엄한 데 군침 흘리지 말고 괜찮은 놈 아무나 하나 잡으라니까….’
우우웅!
‘아니, 오래 살아도 아프면 오래 살아 있는 게 아니지. 건강하게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 거라고….’
우우우우우웅!
‘이런 식으로 나오면 너한테도 안 좋아.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 율리에나도 창고에서 썩고 있잖아… 어차피 너는 내 밑으로 들어와 봤자, 창고로 가거나 가방 안에 들어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우우우우우우우웅!!!
거리는 진동에 내 몸이 저절로 떨려온다.
당연하지만 근력이 낮은 내 몸으로는 녀석이 튀어나오는 걸 막을 수가 없다.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 손가락을 튕기자 아래쪽에서 작은 촉수들이 나와 녀석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뽑혀 나오려고 하는 성검을 잡아당겼지만 뚜둑뚜둑 거리는 소리가 나며 촉수들이 끊어지는 상황에 절로 입술을 꽉 깨물게 된다.
그만큼 필사적으로 빠져나오려고 하는 놈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우우우우우웅!
겉모습만 멀쩡할 뿐이지. 루시퍼가 전에 보여줬던 베니고어의 6 혓바닥과 비슷한 놈이지 않은가.
차라리 이럴 거면 그 자식을 데려오는 게 나을 뻔했다. 걔는 시바….
‘걔는 시바, 혓바닥이라도 꺼낼 수 있지. 너는 할 수 있는 것도 없잖아. 요즘 같은 스마트 시대에 누가 검을 휘두른다고 그래… 율리에나도 자동 공격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서 그나마 데리고 있는 건데… 네 검신이 날카로우면 뭐 해. 기껏해야 지팡이로 쓸 텐데.’
우우우우우우우웅!
‘아니야, 욕하는 게 아니잖아. 화나라고 한 말이 아니라고… 조금 더 합리적으로 생각하자는 거지. 딱 10년 정도만 참아봐. 나도 일 좀 끝나고 검술 좀 익혀볼게. 그러면 너도 좋고 나도 좋잖아.’
뚜둑. 뚜둑.
거의 봉인하다시피 녀석을 묶어놓고 있는 촉수들도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다.
계속해서 위에 덮어놓기는 했지만 막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아니, 왜 이렇게 질척거려. 싫다는 사람한테… 내가 나중에 챙겨준다니까. 루시퍼 님한테도 잘 말해줄게. 그러니까 그만… 들어가자, 우리. 좋은 주인 찾아줄게. 정말로 좋은 주인 찾아줄 테니까… 이제 그만하자.’
더 이상을 버틸 수 없을 것 같다.
검신이 뽑히며 회색빛이 주변을 비추는 모습, 반쯤은 포기하고 있었을 때였다.
‘나중에 보자고! 나중에!’
우뚝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몸을 멈춘 것이다.
“하아… 하아… 하아….”
짧은 시간에 많은 마력과 체력을 소모했기 때문인지 계속해서 숨이 차오르고, 땀이 턱선을 타고 뚝뚝 떨어진다.
“이거 잠잠해진 거 맞지? 하아….”
“오빠가 직접 보고 있잖아요. 제대로 설득한 거 맞아요? 뭐 어떻게 하겠대요? 서로 좋게좋게 잘 합의한 건 맞는 거죠?”
대화가 제대로 마무리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 아마도 그런 것 같은데….”
우우웅.
짧은 진동, 하지만 사념이 전해져 오지는 않았다.
긍정의 표현도 아니고 부정의 표현도 아닌 것 같았지만 정황상 녀석의 양보를 받아낸 것이 맞다.
괜스레 검의 끝머리에 달린 장식을 쓰다듬자 간헐적으로 떨리는 녀석이 느껴졌다.
화가 났다는 것을 표현하고는 싶지만 이런 식으로 쓰다듬어 주는 게 기분이 좋기는 한 모양이다.
‘그래… 잘 생각했어. 굳이 너도 이런 주인도 만나보고, 저런 주인도 만나보고, 이 사람 저 사람이랑 다 해 본 다음에 정착하는 게 좋잖아. 경험이 좋다는 게 뭐야. 한번 다 돌아보고 이제 조금 괜찮겠다. 싶었을 때 천 년 가약 맺고 그러는 거야, 원래.’
우웅.
‘나도 마찬가지지, 그럼. 너도 내가 다른 검이랑 같이 널 사용하면 기분이 좋겠어?’
우우웅.
‘나도 이런 검도 만나보고, 저런 지팡이도 만나보고, 저런 무기도 만나보고 하다가 정착하는 게 맞지. 너무 일찍부터 서로 눈 맞고 그러면 오히려 나중에 바람난다니까. 젊었을 때 화끈하게 놀아봐야 나중에 그런 생각도 안 들어요.’
우우우웅.
‘나중에 막상 직접 계약했다가 후회할 수도 있는 거잖아… 아무튼 잘 생각했어. 진짜… 큰 결정 한 거야.’
더 이상의 진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뭔가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납득해 줬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더 이상 오래 이 자리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녀석에게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뭐예요? 이대로 가는 거예요?”
“일단은… 아마 조만간 잠잠해질 것 같아. 오늘은 일단 저 상태로 놔두고… 내일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로 하자. 이번에는 타입들도 조금 더 다양하게 해서 올려 보내고, 마지막에 아쉽게 떨어져서 여기 못 밟아 본 애들도 몇 명 올리자.”
“어차피 겁먹어서 중도 포기한 얘들도 몇 명 있었으니까… 나쁘지는 않겠네요. 그 대신 교황청 입장 정리는 오빠가 직접 전달해 주시고요… 어차피 바젤 교황님이랑 만날 거니까. 아, 그리고 혹시 해서 물어보는 건데. 이 이상 사고 안 터지는 건 확실한 거죠?”
“…….”
솔직히 확신할 수는 없다. 지금은 잠깐 참아준다는 느낌이었지만 언제 또 폭발할지 누가 알겠는가.
사실 걱정되기는 했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일 만했다.
완전히 떡락하는 흐름으로 가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하지만 정확히 35시간 이후에는 머리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아… 아. 선택받은 용사의 탄생을 전 대륙민들에게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익숙한 얼굴이실 겁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자기소개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일단… 이런 기회를 주신 명예추기경님과 바젤 교황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지금 이 상황이 조금은 갑… 작스럽고 당황스럽지만… 여러분들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
-제 이름은… 제 이름은 라파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