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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613화 (604/1,590)

# 613

회귀자 사용설명서 613화

떡락(2)

바젤 교황과 티 타임을 가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 이상 뺄 수가 없는 상황이기도 했고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성검에 대해서는 대충 아무 변명이나 지껄였고, 현재 이단심문관들에게 조사받고 있는 소년 용병 가레스 역시 혐의를 벗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낸 이후에는 짧게 눈을 붙인 이후 곧바로 작업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버전 공포의 정원 마무리 작업을 진행했고, 아귀의 촉매와 마수 살라트의 코어 핵을 합성해 버전 튜토리얼 던전의 작업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몸이 조금 피곤했지만 그렇다고 탱자탱자 놀 수 있을 리 만무.

수도에서 너무 오랜 시간 성과 없이 있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얻은 것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성검이 다시 한번 자리 잡았고 교황청의 인사들과도 더욱더 끈끈해질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사건만 안 터졌어도….’

하는 마음이 솟아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리라.

조금만 더 눈을 붙이는 게 어떻겠냐는 정하얀의 제안을 애써 거절한 이후에는 쉬는 시간 없이 달렸고, 그사이에 제이나 교황청 대변인이 방송에서 적당한 변명으로 입장 발표를 진행했다.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시스템이 활성화됐고, 그 결과 성검의 시험은 다시금 많은 이들의 관심 속에서 재개될 수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스무스한 흐름이었다.

하지만 다른 갤러리들과는 다르게 정작 이쪽은 벌어지고 있는 시험에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다.

말 그대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 자신이 꼽은 인물들이 시험을 받을 때는 여신의 거울을 바라보기도 했지만,

쉴 틈 없이 진행되는 시험을 온종일 쳐다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당장 용사가 선택받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성검이 그렇게 쉽게 주인을 선택하지 않을 거라는 건 이전에 나눴던 대화와 정황들로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하얀이 커다란 목소리로 나를 불렀을 당시에는 약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오, 오빠! 나왔어요! 나, 나왔어요! 용사가 나타났나 봐요. 지, 지, 지금 검을 뽑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 뽑히고 있어요.”

“어?”

“빨, 빨리 나와요. 용사 나타났어요. 용사!”

버전 튜토리얼 던전을 내팽개치고 무작정 여신의 거울로 달려든 것은 당연지사.

화면 안에 있는 녀석이 정말로 검을 뽑고 있는 놈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탈락한 놈들과는 이펙트부터 다르지 않은가.

그 가운데 서 있는 녀석의 모습은 여느 서사에 나오는 주인공이라고 하더라도 손색이 없다.

나이는 이제 막 20살이 되었을까. 아직은 소년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오는 앳된 얼굴을 한 용사는 회색의 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힘겨워하고 있다.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는 것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수많은 갤러리가 보고 있는 가운데 검 한 자루를 뽑아 들고 있는 용사.

찬란한 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자신에게 전해질 책임의 무게와 권리를 깨닫는 듯한 얼굴, 그 모습을 보고 기도를 드리는 사제단과 연신 신의 이름을 부르짖는 교국민들.

모두 내가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던 장면이었다.

-성검이… 성검이 뽑히고 있다. 성검이 뽑히고 있어.

-베니고어 님께 선택받은 용사다. 지금….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누구야, 저거… 누구야? 쟤, 도대체 누구야?

-용사님이다. 용사님….

여신의 거울 너머로 들려오고 있는 갤러리들의 목소리까지 완벽했다.

‘이건 진짜 무조건 떡상이다. 떡락의 여지가 없어. 무조건 떡상이라고!’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어떻게 기분이 나쁠 수가 있을까.

염원하고 또 염원하던 상황이었는데… 앳되고 순진해 보이는 녀석의 얼굴도 마음에 들었고, 아직 때가 타지 않은 듯한 외관도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든 것은 힘든 상황에 걱정거리를 해결해 줬다는 것.

몇 년 묵은 체증이 쑥 하고 내려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키야… 얘가 마음을 고쳐먹었네, 기냥. 거기 간 게 신의 한 수였네, 신의 한 수였어. 역시 사람은 대화를 해야 한다니까. 말이 잘 통해, 우리 성검 씨가… 이러니까 내가 얘네들을 안 좋아할 리가 있나.’

어째서 성검이 자신의 마음을 바꿨는지는 모르겠지만, 설득이 통했다는 사실에도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습관처럼 마음의 눈으로 녀석의 스텟창을 확인한 이후에는 입술을 꽉 깨물 수밖에 없었다.

[라파엘의 상태창을 확인합니다.]

[이름-라파엘]

[칭호-결사단의 마지막 생존자.]

‘하… 씨바….’

두말할 필요 없는 함정카드였다.

그야말로 한순간에 일어난….

성검 코인의 떡락이었다.

단순한 떡락이 아니라, 아예 수직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는 그래프가 눈에 아른거릴 정도였다.

“진짜… 진짜 시바… 나한테 왜 이래.”

‘결사단의 마지막 생존자?’

너는 또 왜 튀어나와….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5현장을 무너뜨린 더러운 악마계약자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빈틈없이 일을 처리했다고 믿었건만 더러운 반동분자 놈들의 끄나풀이 아직 남아 있는 상황.

그냥 남아 있는 것도 아니라 아예 선택받은 용사가 되셨단다.

어처구니가 없어 헛기침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아직도 거울에 빠져 있는 정하얀, 막스, 한소라를 뒤로한 채 별별 생각을 다 하게 된다.

‘이 더러운 마검 새끼가… 일부러 그런 거 맞지? 그런 거지?’

추악하고 역겨운 마력을 내 뿜는 칠흑의 어둠의 산물이 기어코 사고를 친 것이다.

잠잠히 이쪽의 뜻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이쪽에 엿을 먹이려는 게 분명했다.

더러운 마검이 어떻게 저놈이 어떤 놈인지 눈치채지 못했을까.

무조건 알고 선택했다고 보는 게 맞다.

단순히 나를 적대하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본격적으로 시위를 하려고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상황이 내게 마이너스가 될 것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 아. 선택받은 용사의 탄생을 전 대륙민들에게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익숙한 얼굴이실 겁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자기소개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일단… 이런 기회를 주신 명예추기경님과 바젤 교황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지금 이 상황이 조금은 갑… 작스럽고 당황스럽지만… 여러분들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

-제 이름은… 제 이름은 라파엘입니다. 검술에 대해서는… 무지하지만… 이번 시험을 치르면서 익숙해졌고… 또… 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그 와중에 인터뷰가 시작됐고 모두의 관심 속에 악마계약자 놈이 교황청의 심장 안으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순식간에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상황을 보고 있자니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다 나올 지경.

실성한 것처럼 웃자, 이쪽을 바라보는 정하얀과 한소라의 얼굴이 눈에 보였다.

“…….”

“…….”

“저… 부길드마스터. 교황청으로는 안 가시나요? 지금 빨리 와달라고 메시지가 오고 있는데….”

“…….”

“…….”

“후우… 곧바로 출발한다고 연락 좀 전해주세요. 조금 늦을 수도 있다고 전해주시고요. 하얀이는 같이 갈 준비하는 게 좋겠네.”

“네, 네… 네.”

“아, 그리고 현성 씨한테도 연락 꼭 넣어주세요. 꼭, 아니… 그럴 게 아니라 길드원들을 전원 소집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네.”

‘어이가 없네, 정말로… 어이가 없어.’

상황이 어느 정도 파악된 이후에는 머릿속에 화가 쌓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속에서 열불이 나오는 듯한 느낌.

지금까지 개고생했던 추억들이 스쳐 지나간 탓인지 모르겠지만 전부 다 뒤집어 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걸 어떻게 하는 게 좋으려나.’

라는 고민을 하는 것도 당연지사.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둘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무엇 하나 정확히 정해진 것이 없지 않은가.

일단 저 악마계약자 놈이 이쪽으로 직접 찾아온 이유가 최대의 관심사였다.

물론 동기가 무엇일지는 뻔하다.

회개한 이후, 새 인생을 찾기 위해 이쪽으로 온 것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확률은 낮다.

정말로 새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이 미쳤다고 이쪽으로 찾아와 시험을 받고 있겠는가.

어떻게 생각해도 확고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자리했을 거라 판단하는 게 맞다.

그 확고한 목표는….

‘복수겠지, 뭐.’

복수일 것이다.

동료들의 복수, 동료들이 미처 행하지 못한 임무의 완성, 동료들이 염원을 들어주기 위해 녀석은 저 자리에 서 있다.

빛을 위협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위험하려나?’

당장은 위험하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다.

마검의 선택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현재 녀석은 준비된 상태가 아니다.

아마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내 목을 노리기 위해 노력할 테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공작이나 작업을 치려고 해올지도 모른다.

날조된 자료를 알릴 계획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세상이 진실을 알아야 한다며 떠들어댈 수도 있다.

만약 마음에 눈으로 녀석이 반동분자였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끔찍했겠는데….’

모르기는 몰라도 뒤통수에 커다란 상처 몇 개는 생기지 않았을까.

어쩌면 죽었을 수도 있다. 녀석의 현재 위치는 반동분자가 아니라 선택받은 용사였으니까.

‘이걸 어떻게 해결하지?’

물론 해결책이야 간단하다.

‘죽이면 돼.’

없던 일로 만들면 된다.

체면이야 조금 구겨지고 뒷말이야 나오겠지만, 살인 멸구보다 좋은 해결책은 없다.

미래의 위협을 가만히 놔두는 것보다는 죽이는 게 백번 낫지 않은가.

솔직히 제법 끌리는 선택지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한 큐에 문제를 해결해 버릴 수 있으니까.

추가 선택지 역시 존재한다.

‘아니면 마검을 내가 받아들이는 게 좋을까?’

이것도 나쁜 선택지는 아니지만, 이쪽은 결정권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니 논외.

마지막 선택지가 바로 이거다.

‘키워보는 건….’

오히려 조금 더 가까워지는 것.

반동분자들이 만든 정보들 모두가 날조된 정보라는 사실을 은근슬쩍 알리면 된다.

모든 건 오해였을 뿐이고, 너 또한 그들에게 세뇌당한 피해자라는 프레임에 가둬 버리면 된다.

직접적으로 알릴 수야 없겠지만 간접적으로 알릴 방법은 충분하다.

모두에게 존경받고 사랑받는 명예추기경의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본다면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까.

이후에는 최전선에 세우고 토사구팽 해버리면 끝이다.

조금 고민해 보기는 했지만 셋 모두 나쁘지 않은 선택지처럼 느껴졌다.

가장 마음이 끌리는 것은 세 번째 이기는 했지만….

이 자리에서 당장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녀석이 어떤 인간인지 정확히 판단하는 것.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도 준비를 재빠르게 마치자 눈치 빠른 정하얀이 곧바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내 기분이 안 좋아졌다는 걸 눈치챘는지, 괜스레 힐끔힐끔 이쪽을 바라봤지만 그래도 주문을 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막스와 한소라 역시 불안한 듯한 표정이다.

분명히 입꼬리를 올린 것처럼 보였는데 녀석들에게는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다시 한번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며 평소대로의 영업용 미소를 얼굴에 담는다.

정하얀이 주문을 외운 직후, 시야가 변했고 내 앞에 서 있는 인물의 모습에, 나는 아까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기영이라고 합니다.”

“라… 라파엘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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