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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614화 (605/1,590)

# 614

회귀자 사용설명서 614화

떡락(3)

조금은 긴장한 것 같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많이 긴장한 것 같은 얼굴이다. 내게 적의를 드러내고 있지 않았지만 조금 불편해하는 것 같은 느낌. 정확히 말로 표현하기 애매하지만 나를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녀석과 함께 자리해 있는 교황청의 인사들은 저런 반응이 당연하다는 모습. 내가 봐도 어색하게는 느껴지지 않는다.

일반인이 이기영 명예추기경을 실제로 목도했을 때의 반응과 별반 다르지 않게 보였으니까.

하지만….

‘미묘하게 다르네.’

다른 이들도 나와 같은 걸 느끼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녀석이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있다는 게 강하게 전해져 온다.

저 긴장한 표정 뒤에 숨은 감정이 분노인지, 아니면 경외인지, 의심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쪽에게 긍정적인 감정은 아니라는 것.

녀석의 정확한 속내를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그래도….

‘쟤보다는 낫지.’

그 말 그대로였다.

녀석이 나보다 더 답답해하고 있을 거라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나는 갑이고 녀석은 을이다. 녀석이 선택받은 용사라고 한들, 스위치는 내가 쥐고 있다. 아마 여러 가지로 불안하지 않을까. 정체를 들키면 어떻게 할지. 지금부터 상황을 어떻게 풀어나가는 것이 좋을지.

생각이 많아져야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라파엘 쪽이라는 거다.

‘참 배짱도 좋아.’

우연히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전부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고 하는 게 정황상 맞다. 물론 성검에게 선택받을 거라는 건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녀석의 입장에서는….

‘로또를 맞게 된 건가. 떡상 하셨네요… 운도 좋은 새끼. 누구는 완전히 떡락해서 존버밖에는 답이 없는데 말이야.’

일단은 웃으며 다가간 것은 당연지사. 평소와 같은 것처럼 행동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본격적인 탐색전에 들어가기 전에 간을 보는 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제가 조금 늦은 것 같습니다만…. 이렇게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아니요. 저야말로 영광이에요, 명예추기경님. 여신의 거울을 통해서만 뵐 수 있는 분을 이렇게 실제로 만나게 되니 너무나도 감, 감격스럽습니다.”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니 그리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제가 감격이고 제가 더 영광이지요. 대륙을 구원해 주실 선택받은 용사님이 아니십니까. 물론 여러 가지로 더 지켜봐야겠지만 성검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 대륙에 복이라는 생각에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아마 베니고어 님도 기뻐하시고 계실 겁니다.”

“제가 베니고어 님의 기대를 충족시켜 드릴 수 있을지… 걱정이 먼저 앞섭니다. 저는… 그저….”

“…….”

“모든 게 갑작스럽기만 해서….”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교황청과 대륙 보호 관리위원회를 비롯한 많은 분들이 도와줄 준비를 하고 있을 테니… 저 역시 라파엘 용사님께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진심으로 노력하겠습니다.”

한 발자국 앞에 나서며 어깨를 두드리자 이쪽을 경계하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마치 궁지에 몰린 쥐 같은 얼굴. 성검을 더더욱 자신의 품속으로 끌어들이는 꼴은 가관이라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표정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얼마나 대륙을 위해 희생하는 인간인지 알아야 했으니까.

오히려 세상 따뜻한 미소를 장착한다. 최대한의 호의를 내보이고 과거 권력자들에게 내보내던 친절함을 얼굴에 박아 넣는다. 김현성을 포함한 소수에게밖에 보여주지 않은 표정이었다.

표정은 성공적으로 먹혀들어갔다. 약간은 당황스러워하는 녀석의 얼굴이 눈에 보일 정도였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당황했네. 새끼.’

녀석이 생각했던 내 이미지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을 터.

물론 연기를 한다는 사실은 머릿속으로 되뇌고 있었겠지만 대놓고 이런 모습을 눈앞에서 보는 건 조금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대외적으로 보는 명예추기경의 모습이 아닌, 진짜 사람 같은 명예추기경의 모습.

순수하고 친절하고 따뜻하기까지 한 사람,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건네며 손을 뻗고 싶게 만들어지는 사람, 휴먼 중의 휴먼 빛기영의 모습이다. 때마침 창문으로 햇빛까지 들어오고 있지 않은가.

“감… 사합니다.”

“일단 자리를 옮기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익숙하지 않으실 테니 제가 직접 주변을 안내해드리고 싶은데…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제이나 대주교님.”

“네. 물론입니다. 다만….”

“아, 따로 스케쥴이 있었던가요?”

“네. 언론보도용으로 짧게나마 인터뷰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혹시나 불편하시다면 따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필요한 일이니까요. 아마 대륙민 여러분들도 새로 선택되신 용사님께 궁금하신 점이 많으실 겁니다. 앞으로 용사님께서 어떤 행보를 걸으실지, 어떻게 활동을 하실지에 대해서요. 아! 그러고 보니 쟤가 전에 말씀드린 건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아… 네. 소외 계층 지원 문제 말씀이시군요.”

‘그래. 저번에 말했었잖아. 그렇지?’

“명예추기경님께서 부탁하신 대로 처리 중에 있습니다.”

‘그래 잘 말해줬어요. 제이나 대주교님.’

“먼 미래에 위협보다는 당장 오늘 내일을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부족하겠지만 최대한 빨리 진행을….”

뜬금없이 꺼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대외홍보용으로 나왔던 이야기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들이 튀어나오기 시작.

정말로 시행할 생각이 없었다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이런 이야기에 녀석이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당연했다. 쓸데없는 정보라도 주워 담아야 하는 게 지금 녀석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일 테니까. 꽤 여러 가지를 계획하고 이쪽에 접근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거 제가 너무 말이 많아졌군요.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명예추기경님.”

“예정된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조금 있으니 이 근처라도 한 번 돌아보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교황청에는 한 번쯤 와보셨을 것 같지만… 아무래도 일반인들에게는 공개되지 않은 공간 같은 경우도 있으니까요.”

“네.”

“이를테면 저기 정원 같은 경우도 그렇고요. 교황청의 사제들이 직접 사용하고 있는 공간은 아무래도 볼 기회가 없지 않습니까. 라파엘 님께서도 교단의 신도이신 만큼 궁금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네.”

“이쪽으로 조금만 더 가다 보면 수습사제들이 신학에 대해 공부하는 대학교가 나옵니다. 반대쪽으로는 고위사제들에게만 입장이 허락된 신전도 존재하고요. 사실 하루 만에 다 볼 수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그렇군요.”

“오늘은 시간이 없으니 가까운 곳 밖에 소개를 시켜드릴 수 없지만 내일, 혹은 그 이후에라도 천천히 안내해 드리고 싶습니다.”

“꼭 그렇게 하실 필요는….”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입니다. 라파엘 님에 대해서 궁금하기도 하고요.”

다시 한번 웃어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지금 네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한 것이다.

녀석 역시 이쪽이 방심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지 표정이 한결 풀린 것 같은 느낌, 점점 말이 길어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사실상 이후로는 쓸데없는 이야기의 연속이라 할 수 있으리라.

“체스는 좋아하십니까?”

취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오신 건지….”

녀석에 대한 간단한 호구조사를 하기도 했다.

“부모님이 두 분 다 돌아가시고… 뭘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을 때 좋으신 분들이 저를 거둬주셨어요.”

아마 악마 계약자 새끼들의 이야기였을 거다.

“항상 대륙을 위한 길이 뭔지, 어떤 게 정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을 위한 것인지 알려주는 분들이셨지요. 그분들께 영향을 받아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의외로 대화가 잘 통하는 느낌에는 나조차도 놀랄 지경.

약 20분 정도를 더 걸었다고 생각했을 때 작은 호수공원이 시야에 비친다. 빛무리가 쏟아지는 공원의 모습은 내 눈으로 봐도 아름답게 보인다.

‘이걸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호수공원의 밑바닥에 쳐넣는 건 어떨지 고민이 될 정도였다.

‘이건 진짜 어떻게 해야 되지….’

쓸데없는 자신감일지도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장기 말로 써먹을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대뜸 검을 날려 오지 않는 것만 봐도 그래.’

이성적인 타입이라 봐도 될 것 같았다. 당장 너 죽고 나 죽자의 느낌으로 개 거품을 물고 달려들 수도 있지 않은가.

아마 내 배를 성검으로 쑤시고 호수 밑바닥에 쳐넣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실제로 그럴 만한 거리에 있었으니까.

정하얀과 박리안이 일정 거리를 둔 채로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보면 녀석이 지금 이 자리에서 암살 시도를 한다고 한들 성공할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런 상황을 신경 쓰고 있는 상황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원하는 게 내가 그냥 뒈지는 건 아니라 이거네.’

라파엘이 원하는 건 내 죽음뿐만이 아니다.

진실을 밝혀내는 것, 결사단원에게 쓰인 억울한 누명을 벗겨내는 것.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사회적인 죽음과 정당한 처벌을 받는 것.

뭐 아마 그딴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녀석도 시간이 필요했고 나도 시간이 필요한 상황, 지금 당장 뭐라고 판단을 내리기 힘든 상황이라는 거다.

‘조금 더 두고 보지 뭐.’

이미 성검 코인이 밑바닥 끝까지 떡락하지 않았던가. 누군가 존버는 과학이라고 했었다. 내 손으로 이 종목을 휴짓조각으로 만들 수는 없다. 존버하다 보면 언젠가 날아오를 거다. 그런 생각들이 점점 머릿속에 틀어박히기 시작했다.

괜스레 분위기를 한번 잡아보자 녀석도 뭔가 심상치 않은 말이 나올 거라는 걸 직감했는지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커다란 짐을 지게 한 것 같아… 사실 그리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커다란 짐….”

“평범한 사람들이 어쭙잖은 각오로 마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요. 라파엘 용사님께서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이 일은 그런 일입니다. 여신님께서 검을 내리신 이유는 대륙을 위협하는 적을 마주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

“싸우기 위해서예요. 라파엘 님께서 회색빛의 검에 선택받은 것 역시 그러한 이유겠지요. 힘에는 영광만이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나 이번 같은 경우는 더욱 더요. 책임과 고통이 분명히 따라올 겁니다. 커다란 짐, 말입니다.”

“그렇… 군요.”

“여러 가지 형태로 지치거나 다치실 수도 있을 겁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도 많을 거고… 모든 것들을 위해 희생하셔야 될 지도 모릅니다. 말 그대로 모든 것들을 위해서요.”

“…….”

“검을 놓고 싶어질 때가 분명 생길 겁니다. 역경와 고난이 있을 거라고 저는 확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네….”

“부디 검을 놓지 말아주세요. 대륙 위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위해 끝까지, 끝까지… 함께해 주십시오. 이렇게…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고개까지 숙여주는 게 좋을 것 같은 타이밍. 진심을 담은 얼굴을 대놓고 보라고 보여준다. 희생을 강요할 수밖에 없는 비련의 남 주인공 행세를 하며 눈물 한 번 쏟아주고 천천히 고개를 숙인다.

자존심 따위는 내팽개친 듯한 모습, 대륙의 빛이라고 불리는 이가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예상했던 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놈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누가 봐도 성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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