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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615화 (606/1,590)

# 615

회귀자 사용설명서 615화

부정적인 여론(1)

“고개 들어주세요. 명예추기경님. 제게 이러실 필요는….”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자 더욱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필요하다면 무릎을 꿇거나 납작 엎드릴 수도 있다. 심지어 가랑이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일도 아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고….’

지금 보여주는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당황하고 있지 않은가. 마음을 굳게 먹었지만, 시작부터 자신이 생각하고 상상하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니 약간은 혼란스러워하는 듯한 느낌.

물론 겨우 이런 거로 놈의 생각이 변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모르긴 몰라도 예상했던 범주 내에 들어가 있지 않을까.

말하자면 이건 빌드업의 일환이라 봐도 될 것 같았다.

커다란 그림을 그리기 위한 시도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으리라.

명예나 권력욕, 금전욕에 초탈한 빛기영의 모습, 오직 대륙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작업의 일환, 지금 라파엘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꽂혀 들어왔다.

당장 성검을 높게 들어 길게 뻗은 내 목을 치고 싶어 하지는 않을까.

어떻게 보면 위험한 행동이기도 했지만 내가 녀석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이라 볼 수 있으리라. 이런 상황에서 녀석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뻔할 뻔 자.

예상대로 슬그머니 내 어깨를 잡아 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이스고요.’

“…….”

“…….”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명예추기경님. 고개를 들어주세요.”

“…….”

“제게 고개 숙이실 필요 없습니다. 여러 가지로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저 역시 충분히 각오한 일입니다. 어째서 제가 여신님께 선택받은 건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제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니 고개 들어주세요.”

“…….”

“오히려,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아직 부족한 게 많으니까요. 도움이 필요한 것은 명예추기경님이 아니라….”

‘그래, 너지.’

성검의 주인이라고 하기에는 스펙이 너무 비루했으니까.

살짝 고개를 들고 안심했다는 얼굴을 보여주자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가식적이라고 느끼고 있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사실 지금 이쪽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크게 상관없다. 어차피 조금씩 생각이 변하게 될 테니까.

‘카스가노가 등판해도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겠어?’

카스가노와 함께 미래를 보게 된다면 뭔가 느끼는 게 있을 것이다.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베니고어가 여유만 있다면 조각상으로 들어와 현재 대륙에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뜻을 전할 수도 있다.

결사단의 인원들의 대부분이 베니고어의 기적을 거짓된 힘이라고 생각하는 만큼 녀석 역시 정말로 기적을 목도한다면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까.

방법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선택지 자체는 무궁무진하다는 거다.

그 무엇보다 회색빛의 성검이 녀석을 선택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는다. 아무리 이쪽을 엿 먹이기 위해서라지만 정말로 자기 성에 차지 않는 사람에게 몸을 넘길 리는 없다. 아마 라파엘의 성향이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껴서이지 않을까.

‘회색분자.’

노선과 목표나 성향이 명확하지 않은 사람. 본인만의 뚜렷한 가치관이 없이 주변에 영향을 많이 받는 종류의 인간.

[라파엘의 고유기벽을 확인합니다.]

[쉽게 흔들리지 않는 회색.]

조금은 함정처럼 느껴지는 고유기벽이기는 했지만….

‘흔들리기는 흔들린다는 거잖아?’

그 말 그대로였다.

경멸의 의미를 담은 회색분자라는 네이밍과는 다르게 녀석은 박쥐 같은 기회주의자 타입이 아니다. 오히려 중립론자나 신중론자라고 표현하는 게 맞다.

흑과 백 중, 하나를 선택할 때 굉장히 시간이 오래 걸리는 타입이고 어느 한쪽에게 손을 뻗을 때 그만큼 신중해지는 타입이다.

그런 의미에서 라파엘이 녀석들과 같은 뜻을 가졌다는 건….

‘어느 정도 이해해 줄 수 있지.’

날조된 이야기가 대부분이기는 했지만,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꾸며낸 이야기는 충분히 고개를 끄덕여 줄 만했으니까.

이렇게까지 자세하고 치밀하게 날조된 자료로 선동을 하다 보면 녀석 같은 신중론자들도 휩쓸릴 여지가 있다. 아직 나이도 어리지 않은가.

물론 겨우 몇 살 더 먹었냐가 생각에 신중함을 더해준다고 판단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여러 가지 가치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다.

인간이 주변 배경의 영향을 얼마나 받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악마 계약자 놈들이 얼마나 사탕발림으로 입을 털었으면… 그렇게 됐겠어… 딱하기도 하지… 진짜.’

녀석 역시 제대로 된 환경이 마련되지 않았을 뿐이다.

‘형이 잘 챙겨줄게. 의심하지 말고 알겠지?’

“그럼… 돌아갈까요? 괜히… 무거운 이야기를 드려서 죄송합니다. 처음부터 너무 부담을 드리는 것 같아서….”

“오늘 말씀은 충분히 도움이 됐습니다. 마냥 기뻐하고 당황스러워하고, 쓸데없는 기분에 취해 좋아해야 할 상황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으니까요. 만약 이런 말씀을 해주지 않으셨다면 단꿈에 젖어 정말로 중요한 것을 바라보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지.’

“명예 추기경님이 계셔서 얼마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지 모를 겁니다. 이곳은 전혀 새로운 환경이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또….”

“라파엘 님께서 저를 의지해 주고 계시다니 기분 좋은 소식이군요.”

“아… 그런 뜻이 아니라… 건방졌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너무 딱딱하게 대해주시지 마시고 조금은 편하게 대해주셨으면 합니다.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얼굴을 볼 기회가 많을 테니까요.”

“…….”

“…….”

“그럼… 실례가 안 된다면 말을 조금 편하게 해도 괜찮을까요?”

‘이 새끼 봐라.’

“아니,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명예추기경님. 제가 너무… 기뻐서 쓸데없는 소리를….”

여기서는 한 번 푸근한 미소를 지어줘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녀석이 먼저 이쪽과 친해지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한 시점이었으니까.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깜짝 놀라는 듯한 모습도 좋겠지.

“괜찮습니다. 오히려 편하게 말씀해주시는 게 제게도 더 편할 것 같으니까요. 먼저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적극적이네. 그래… 너도 가까워지고 싶다 이거지?’

“그럼 형이라고….”

‘붙임성 좋네… 새끼.’

밀어붙이는 게 빠르다. 그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훈훈한 대화를 이어나가기는 했지만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당황스러운 타이밍이기는 했다.

당연하지만 녀석의 본래 성격은 이렇지 않을 확률이 높다. 아마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먼저 다가가는 이미지를 구축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게 녀석이 활동하기 더 편한 환경을 만들어줄 것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일차적으로는 내가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을 거고,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자기 성격이 열려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을 수도 있다.

당연하지만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다. 저쪽과 가까워져야 하는 건 이쪽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다시 한번 입가에 미소를 장착하자, 본인이 행동이 옳았다고 판단했는지 주먹을 꽉 쥐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네. 마음대로 부르셔도 됩니다.”

“명예추기경님도… 아니, 형도 말 편하게 하세요.”

“사실 반말을 하는 게 그리 익숙하지가 않아서요. 차차 놓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오늘은 기분이 좋은 날이군요. 성검에게 선택받은 용사를 찾기도 했고 믿음직한 동생이 생긴 것 같아서… 기분이 좋습니다.”

‘절반 정도는 성공.’

천천히 편하게 대하겠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거절의 뜻은 아니다. 내 앞에 서 있는 녀석이 가장 잘 느끼고 있지 않을까.

“저… 형.”

“네?”

“그럼 지금부터 저는 어떻게… 어디서 뭘 하면 되는 건가요?”

‘그래, 그게 가장 궁금하겠지.’

아직 본인이 먼저 나서서 뭔가를 할 수 있는 입장이었으니까. 파도가 치는 대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판단하고 있을 것이다.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 아마 현시점에서 녀석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조금이라도 주도권을 얻어내는 것이 아닐까.

성검의 선택을 받았다고 한들, 아무런 기반도 없는 이가 혼자서 뭘 할 수 있겠는가. 어디에 갈 것인지, 어디에 소속이 될 것인지가 아마 가장 궁금할 것이다.

“글쎄… 아마… 기본적인 절차가 끝난 이후에는 어디서 지낼 건지를 결정하게 될 것 같습니다. 교황청이 될 수도 있고, 파란 길드가 될 수도 있고,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가 될 수도 있겠죠. 붉은용병이나 검은백조, 그것도 아니라면 아예 다른 국가 집단이나 길드를 살펴보시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물론 네가 그렇게 할 리는 없겠지.’

“파란 길드 마스터를 비롯한 대륙의 강자들에게 튜터링을 받는 게 일단은 최우선이고… 이외의 시간은 제가 여러 가지에 대해서 가르쳐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교양 과목이라고 생각하시면 이해하기 편하실 겁니다. 기본적인 일은 배워두는 게 좋으니까요. 혹시 생각하시고 계신 곳이 있으십니까?”

“…….”

아마 여러 가지를 고려해 보면 린델이나 수도를 베이스로 한 길드나 집단, 대표적으로는 파란 길드, 혹은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품 안에서 행동하는 게 더 최선의 선택지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파란 길드가 조금 더 나으려나.’

아무래도 이쪽과 딱 붙어서 행동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부담스러운 상황을 많이 겪을 테니까. 이 전에 내가 활동했던 곳에서 천천히 기반을 다지는 게 가장 나은 선택지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교황청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아무래도 접근할 수 있는 정보들이 제한적일 테니 군침을 흘리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내 입장에서 최선의 선택지는 가장 가까운 곳에 두는 것.

물론 신체적인 위협이 존재하기야 하겠지만, 놈의 진짜 목적을 생각해 보면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다.

예전의 그 약한 이기영이 아니기도 했고, 무엇보다 녀석이 그런 무리수를 투척할 리가 없다.

“조심스럽게 추천해 드리건대… 아마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 소속으로 활동하는 게 가장 좋을 겁니다.”

“…….”

“튜터링 같은 경우는 시간을 따로 내면 되는 문제니까요.”

‘키메라 작업은 얘가 훈련하고 있을 때 하면 그만이고….’

“그리고… 사실 소속이 크게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파란 길드 소속으로 움직인다고 한들… 린델에 체류하는 기간보다 현장 쪽에서 체류하는 기간이 더 길 겁니다. 튜터링도 린델이나 수도에서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할 거고요. 조금 부담스러우시겠지만 아마도 스케쥴에 따라 움직이게 될 것 같습니다. 불편하실지는 몰라도 이게 가장 효율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일 겁니다.”

“아….”

“대륙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을 생각해 보면 더욱 더요. 당장은 힘에 부칠 수도 있지만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배운 이후에는 라파엘 님의 도움이 필요하신 분들께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드릴 수 있게 되겠죠. 일단 커다란 숲을 먼저 바라볼 수 있으니… 무엇보다 제가 여러 가지로 챙겨드릴 수 있다는 게… 가장….”

‘그게 내가 널 관찰하기 더 편하잖아. 너도 마찬가지고. 그렇지?’

확실히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은 느낌. 아마 무난하게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로 들어오는 흐름을 타지 않을까.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항상 그렇듯 일이 무난하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김현성을 비롯한 파란 길드원들 사이에서 부정적인 여론이 흘러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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