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618화 (609/1,590)

# 618

회귀자 사용설명서 618화

부정적인 여론(4)

“오늘 즐거웠습니다. 조만간 다시 시간을 만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평상시와 같은 인사였지만 빨리 집에 가라는 소리처럼 들려오는 것은 기분 탓일까.

라파엘도 현시점에서 이곳에 자리하는 게 손해라고 생각했는지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

‘오늘 하루 완전 망했다고 생각하고 있겠는데… 저거.’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파란 길드원들과 친분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슴에 품고 진입했을 게 분명했다.

오늘 하루로는 시간이 부족하기는 했지만 그 시간 동안 한 게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히려 본인의 생각만 많아진 시간이었다니, 무익하다 못해 쓸데없는 시간이었다고 장담할 수 있다.

느낌이 좋지 않다며 억지 주장을 했던 박덕구와 영 좋지 않은 촉을 느꼈던 김현성, 애초에 타인에게 배타적인 선희영, 사춘기가 와버린 김예리, 아예 관심 자체가 없었던 정하얀….

몇몇 이들이 녀석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오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길드마스터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김현성이 싫은 티를 내는 상황에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나댈 수 있는 길드원은 파란 길드에 없다.

‘너무 그렇게 실망하지 마라, 새끼야. 원래 사람 일이라는 게 자기 뜻 대로만 되는 건 아니잖아.’

평점 2.0 정도를 받을 만한 자리, 축객령 아닌 축객령까지 전해 들었으니 표정이 더 어두워지는 게 당연하리라.

“숙소까지 가는 길은….”

“다 기억하고 있어요, 형.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시지 않아도 돼요.”

“제가 사람을 붙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습니다, 파란 길드마스터님.”

“괜찮다고 하시니 다행이군요. 그럼 문 앞까지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녀석을 내보내려는 듯한 모습에는 내가 다 뻘쭘해진다.

김현성이 라파엘을 빠르게 내보내고 싶어 하는 이유야 뻔했다.

아마 이쪽에 무언가 전달할 말이 있어서겠지, 뭐.

‘…….’

결국 라파엘이 자리를 떠나고 나서야 김현성이 입을 열어왔다.

“잠깐 말씀드릴 게 있는데,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 네. 뭐….”

“희영 씨가 길드원들 인솔해서 다음 자리로 이동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잠시 후에 따라가겠습니다.”

“네.”

걱정되는 게 있는지 조혜진이 슬그머니 나를 바라봤지만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자,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중간에 쓰러지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는 모양이다.

당연하지만 김현성은 제법 진지한 얼굴, 아마 본인이 느낀 것에 대해 말하려고 하지 않을까.

뭐라고 입을 열어올지도 대충 예상이 간다.

선택받은 용사가 아닐 가능성이나 의심이 가는 정황들을 열거하며 내 선택이 옳지 않음을 주장할 것이 분명하리라.

하도 오래 붙어 지내다 보니 이제는 대충 레퍼토리가 머릿속으로 그려진다.

물론 이쪽이 녀석의 말을 들을 리 없다.

김현성이 불안하다고 해서 녀석이 변방으로 가버리면 똥줄이 타는 것은 이쪽이다.

차라리 가까이에 두고 확실하게 빛으로 인도함이 옳다.

녀석의 입에서 여러 가지 말들이 튀어나오기 전에 사전 차단을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아주 약간 가슴이 아파오기는 했지만, 곧바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는 방귀 뀐 놈이 성을 내는 것이 맞다.

반 박자 빠른 공세.

원래 이런 관계에서의 승자는 먼저 화낸 놈이다.

“도대체 왜 그런 태도를 취하신 겁니까.”

“네?”

“라파엘에게 보이신 태도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성검에게 선택받은 용사가 아닙니까. 기다리고 기다려 왔던 사람이었고요. 이렇게 밀어내는 태도를 취하는 건 파란 길드에도, 저에게도 좋지 않아요. 최대한 협조를 받아내야 하는 건데….”

“설명해 드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이유가 있었다고 한들 잘못된 태도를 취했다는 건 명백합니다. 제가 직접 데리고 온 손님인데 그렇게 대하면 제 체면이 뭐가 되겠어요? 제 입장도 생각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오늘 일에 대해서 어떻게 사과를 드려야 할지 막막하네요.”

“그러니까….”

“만약 선택받은 용사가 파란 길드나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 대해 안 좋은 생각이라도 가진다면 여러 가지로 상황이 복잡해질 겁니다. 지금 당장은 문제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단언컨대 이후에는 문제가 생길 겁니다.”

“그게….”

“제 손님이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대접해서는 안 됐어요. 덕구나 다른 길드원들은 그나마 이해가 가지만 현성 씨까지 같이 그런 분위기에 편승하면 안 됐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오늘 식사 자리에서 있었던 일은 정말로… 정말로 실망스럽습니다.”

“…….”

‘이거 너무 세게 말한 거 아닌가.’

속으로 걱정 아닌 걱정을 하면서도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들에는 내가 다 놀라울 지경.

“물론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아, 이 새끼. 너무 위축된 것 같은데….’

그 와중에 작아지는 김현성의 모습이 신경 쓰인다.

‘최근에 너무 심하기는 심했나?’

악마계약자 습격 사태 때부터 계속해서 작아지기만 하는 김현성을 보니 확실히 떠오르는 게 많다.

너무 내 생각만 하며 밀어붙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 회귀자의 사회성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걸 잠깐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와 꽂혔다.

‘너무 섭섭하게 한 거야?’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네 잘못이 맞는데.

‘근데 조금 신경이 쓰이기는 해….’

김현성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는 만큼 여러 가지로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유일하게 마음을 나눈 친우, 혹은 친형제 같은 사람, 함께 짐을 드는 소중한 동료.

그게 바로 현재 이기영의 포지션이 아니었던가.

1회 차와 2회 차를 통틀어서 진정으로 자신을 이해해 주는 친구와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여기도 친구, 저기도 친구, 저쪽에도 친구가 있어서 매일 매일 신나게 놀아젖히는 슈퍼 인싸들에게는 별로 시답잖은 일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김현성이 그런 종류의 인간이 아니라는 건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유치하지만 인간관계라는 게 그렇다는 거다.

80살 먹은 최 영감도 오 영감과 박 영감이 나만 빼놓고 술 퍼마시면 기분이 언짢아지는 게 사람의 심리다.

친한 친구에게 보낸 메시지가 지속해서 씹히거나, 어느 날부터 나를 피하기 시작한다는 느낌이 들면 기분이 찝찝해지는 것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으리라.

평범한 사회생활을 하던 주류들도 저러할 진데… 그동안 친구 하나 없었던 김현성이 느낄 불안감은 오죽했을까.

녀석의 경우에는 몇십 년 만에 처음으로 사귀게 된 친구가 바로 이기영이다.

누구에게나 다 인연은 소중하지만 아마 녀석에게는 그만큼 이쪽이 크게 다가오고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회귀 고백 이후에 한 발자국 진전이 있기는 했지만, 그 이후에 급속도로 멀어지며 서먹해지고 있는 시점.

차라리 검을 휘둘러 해결하는 게 더 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녀석은 이런 종류의 갈등을 해결하는 것에는 젬병이었으니까.

일단은 먼저 화내는 게 이기는 거라고 생각해 신경질 아닌 신경질을 부려봤지만, 김현성의 정신 건강을 위해 한 발자국 정도는 물러나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괜스레 이지혜가 해준 이야기도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으니까.

“후우….”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니에요. 죄송할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죄송합니다. 요즘 조금 예민해져서 순간적으로 욱한 것 같네요. 이렇게까지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는데….”

“…….”

“최근에 일이 너무 바쁘고… 여러 가지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다 보니까 마음에 여유가 조금 없었던 것 같습니다. 괜히 궁지에 몰린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고요.”

“괜찮습니다. 제가 잘못한 것도 사실이고… 네, 사실이니까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현성 씨가 그럴 반응을 보일 만한 이유가 있었겠죠.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겁니까?”

“네, 아직 확실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

“라파엘이 선택받은 용사가 아닐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성검의 정보를 읽을 수 없다는 것도 그렇지만….”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겠죠. 하지만 라파엘이 회색빛을 다룰 수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에요. 아까 했던 말들 역시 전부 귀담아듣고 있습니다. 사람을 너무 쉽게 믿으면 안 된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고요. 하지만 조심스럽게 움직이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해요.”

“그건….”

“육성 계획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거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금 저희가 가지고 있는 카드 외에 다른 카드가 한 장 더 필요해요. 북서쪽 지역을 틀어막는 것 외에도 현성 씨를 따라가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공화국과의 전쟁에서는 어떠셨어요?”

“무슨….”

‘뭐긴 뭐야, 전술 김현성이지.’

“라파엘도 현성 씨 같은 일을 해 줄 수 있다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더 많아질 겁니다. 현성 씨의 안전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고요.”

아직은 김칫국을 마시는 행동이나 다름없지만, 만약 전술 라파엘을 사용할 수 있다면 전황 자체를 완전히 뒤집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김현성에게 가해지는 육체적 부담도 줄이는 것은 물론 효율적인 장기 말로 사용하는 게 가능하다. 제대로만 키운다면 말이다.

물론 라파엘에게 부정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는 김현성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지만….

‘이건 네 안전에도 직결된 일이야, 현성아.’

김현성의 체력은 무한하지 않다.

괜스레 손을 들어 올려 녀석의 어깨를 툭툭 치자, 슬그머니 미소를 짓는 게 눈에 들어왔다.

뭔가 억지 미소 같은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일단은….

‘수긍한 거 맞지?’

슬슬 쐐기를 박을 때가 됐나 보다.

“제 안전에 대해서 많이 걱정하시고 계시는 건 알지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겁니다. 박리안 씨나 하얀이가 계속 붙어 있을 거고요. 무엇보다 지금 라파엘의 수준으로는 저에게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다는 거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네.”

“용사 육성 계획은 최대한 빠르게 진행되어야 합니다. 일단은 시작한 이후에 판단을 내려도 늦지 않을 겁니다. 정말로 문제가 생긴다면 그 이후에 수습하면….”

‘되는 문제고.’

“만약 현성 씨 생각처럼 라파엘이 뭔가 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제가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릅니다. 분명히요.”

“…….”

“그러니까 이만 들어갑시다. 다른 사람들 전부 기다리고 있겠네요. 2차부터는 정말로 파란 정기 모임이 되겠네요.”

“네, 그렇군요.”

갈등이 조금 있기는 했지만, 우리 우정은 변치 않을 거라는 듯이 활짝 웃어주자 조금은 안심하는 녀석의 얼굴이 들어왔다.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은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짧은 대화가 끝난 셈이었지만 아마 자신이 전달하고 싶은 것은 전부 전달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물론 나도 우리 회귀자가 어떤 부분을 염려하는지 알고 있다.

요지는 자기 자신이 느끼는 불안감이 혹시나 내 안전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사실 그 자체.

내가 염려하는 부분과 같다.

‘카스가노 유노랑 베니고어 한번 만나러 가자.’

너무 급하게 몰아붙이는 것보다는 텀을 주고 보여주는 게 좋겠네.

그동안 자신이 사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모두 거짓이라는 걸 알았을 때, 라파엘이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 궁금해진다.

‘부정할까, 아니면 받아들일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