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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619화 (610/1,590)

# 619

회귀자 사용설명서 619화

거짓 없는 진실(1)

실제로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었지만, 체감상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듯한 기분이었다.

단시간에 엄청난 일을 몰아서 하다 보니 짧은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진 것이다.

라파엘과 파란 길드원들이 모여 식사를 가진 이후 불과 2개월이 지난 시점.

6개월 정도가 지난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물론 그만큼 성과를 얻었다는 것 역시 환호성을 지를 만한 부분이었다.

손안에 쥐고 있는 코인 3개가 전부 날아오를 기미를 보이고 있었으니까.

예전처럼 단순히 행복 회로를 돌리는 게 아니라, 정말로 날아오를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첫 번째로 열매를 맺은 것은 역시나 순항하던 키메라 코인.

떡락 따위는 예정에 없던 안정적인 종목이었다.

주변 상황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지만 이런 확실한 종목을 버릴 리 없다.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밤잠을 줄이며 5현장을 들락날락했고 고개를 끄덕일 만한 결과물을 가질 수 있었다.

‘버전 튜토리얼.’

완성.

‘버전 균열박물관.’

완성.

‘버전 공포의 정원.’

완성.

무려 3기의 네임드 천사들을 완성한 것.

예정되어 있던 기간보다 몇 달을 단축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나머지 3기는 아직 기틀도 제대로 잡히지 않았지만 한소라의 활약에 힘입어 전체적인 제작상황이 탄력을 받고 있었다.

정말로 666기를 전부 완성 시킬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지만, 지금의 속도라면 666기 이상도 뽑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빛과 함께 싸우는 666명의 천사.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장면이지 않은가.

‘이대로만 가면 되는 거야, 이대로만….’

가장 걱정거리였던 베니고어의 일 역시 나름대로 잘 해결되고 있다.

사실 이 경우는 정체됐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베니고어의 처우와 대륙의 관련 문제에 대해 아직 다른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이래서 얘네가 안 된다니까.’

확실히 악마 쪽와 성향이 다르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베니고어가 만약 루시퍼 소속의 악마였다면 벌써 떨어져 나가서 콩밥을 먹고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통 크게 용서했을 수도 있고….’

벌을 받던, 흐지부지 넘어갔든 간에 결론이 나왔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뭐가 문제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마 윗분들의 썰전이 끝이 나지 않는 것이 저들이 겪고 있는 문제.

당연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호재였다.

안 그래도 여러 가지 일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상황에서 존버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베니고어 오피셜로는 가장 최근에 있었던 논쟁을 해결하는 데 무려 천 년이 걸렸다고 했으니 일단은 잠정적으로 일이 마무리됐다고 판단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억류되어 있었던 베니고어의 신성도 되돌아온 상황이었고 심지어 이야기 자체가 긍정적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전해오지 않았던가.

지금까지 내게 고통만 안겨주던 코인이 잠시나마 안정감을 선사해 줬다는 것만으로도 밤잠을 설치지 않게 됐다.

하나하나 조목조목 따지고 보면 그저 떨어지지 않고 있을 뿐이었지만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물론 언제 또 일이 터질지 모르는 만큼 베니고어에 재판 준비는 착실히 진행하고 있었지만, 한결 여유가 생겼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개좋아.’

나머지 코인 하나 역시….

‘나쁜 상황은 아니지.’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점점 상한가를 치고 있는 시점이다.

완전히 떡락한 줄 알았던 성검코인이었기 때문에 작은 떡상에도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라파엘이 나를 완전히 따르게 된 것은 아니다.

‘아직 의심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고….’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머릿속에 들어차 있는 마구니를 완전히 벗겨내기에는 짧은 시간이었으니, 사실 그리 아쉽지도 않다.

오히려 급하게 진행했다면, 괜스레 더 초조해지지 않았을까.

천천히 유대감을 쌓아야 했고 빛기영이라는 사람에 익숙해지게 만들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본다면 충분히 성과를 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으리라.

습관처럼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게 익숙해졌으니까.

과거와 비교해도 대조적일 게 분명하다.

빛 한 점 보이지 않은 골방에 처박혀 악마 관계자와 개짓거리를 하던 과거 대신 자리 잡은 것은 빛과 함께하는 포근한 일상.

균형 잡힌 식사와 배부르고 등 따뜻한 생활, 잠들 것만 같은 빛을 쬐며 건설적인 대화를 나누는 하루하루.

웃기도, 떠들기도 하면서 가치 있는 땀을 흘리는 매일 매일.

인간은 환경에 익숙해지게 마련이다.

녀석의 속 안을 불태우고 있는 복수심이 옅어질 거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최소한 현재의 생활을 즐기게 할 수는 있다는 거다.

지금만 봐도 굉장히 기분 좋은 것 같은 얼굴이지 않은가.

“그럼… 이쯤에서 베니고어 님께 대한 기도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라는 말로 짧은 기도를 끝마치자 조용히 여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제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가장 앞에 자리 잡은 라파엘의 얼굴도 보인 것은 당연지사.

때마침 따뜻한 빛이 창문을 타고 들어와 이쪽을 비추는 모습에는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누가 봐도 대륙을 좌지우지하려는 악마의 모습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지 않은가.

‘환한 미소도 한 스푼 정도는 넣어줘야지.’

경건한 분위기에서 시작된 예배가 마무리되는 순간, 가장 먼저 말을 걸어온 사람은 역시나 바젤 교황이었다.

“훌륭했네, 명예추기경.”

“부족하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에 부끄러울 뿐입니다.”

“하하하, 그 누가 명예추기경의 기도를 부족하다고 생각하겠는가. 베니고어 님께서도 크게 기뻐해 주셨을 것이네. 우리 회색빛 용사의 얼굴을 보니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모양인 것 같은데….”

“네, 저 역시 바젤 교황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신성해 보였던지라… 왠지 저 자신을 부끄러워지게 만드는 기도였던 것 같습니다.”

‘이 새끼. 말 잘하네, 이거.’

“그렇다고 하는군….”

“…….”

“어떤가, 명예추기경? 이왕 이렇게 된 거 저 자리에 한번 앉아보는 것은… 많은 신도가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주도하에 올리는 예배를 기대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신도들을 위해서라도 한 번쯤은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네.”

“교황님이 계신데 제가 어떻게 이렇게 신성한 자리를 주관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네. 이런 말을 하기에는 민망하지만 이제 내 건강도 예전 같지가 않아. 베니고어 님께서 나를 부르실 때가 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이 영감님은 화도 버럭버럭 내면서 건강하게 잘 지내는 데, 왜 그래. 저 교황 될 생각 없어요.’

“그런 말씀은….”

“본격적인 이야기는 조금 더 시간이 지난 이후에 하세나. 이런저런 일도 엮여 있으니… 이런 자리에서 나올 이야기도 아니고… 하지만 그전에… 회색빛 용사의 임명식만이라도 명예추기경이 직접 주관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야.”

‘그건 땡큐죠.’

“바젤 교황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잘 생각했네, 명예추기경. 그러고 보니 오늘은 갈 곳이 있다고 했었나?”

“네.”

“끄응… 그거 아쉽게 됐구만.”

“다음에 또 기회가 있으니 그리 아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교황님.”

“그때는 꼭 차 한잔하고 가게나.”

“물론입니다.”

“고생하셨어요, 형.”

“고생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그럼 나갈까요?”

“네.”

살짝 웃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정말로 웃음이 나와 웃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로서는 연기라고 판단하는 것이 맞을 듯했다.

‘뭐, 연기여도 별 상관없지만….’

그 말 그대로였다. 이쪽은 급할 게 없다. 오히려 급한 것은 저쪽이었지.

모든 일이 착착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는 이쪽과는 달리 저쪽은 제법 애가 타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성과가 없지. 성과가 없어.’

성과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아예 없다는 게 커다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물론 신체적으로 강해지기는 했지만, 녀석의 목표와는 점점 멀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캐내야 할지, 무엇부터 하는 게 좋을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교황청의 사제단이나 보호 관리 위원회의 몇몇과는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것 같았지만, 녀석이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애초에 그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도 쉽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수상하다고… 뭔가 이상한 정황과 증거가 있으면 그것 좀 보여달라고 말할 수 있겠어?’

일반적인 경우라면 그딴 걸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이단이다.

호기롭게 적의 심장으로 들어오는 데는 성공했지만, 양팔이 묶이고 두 눈이 묶인 상황.

어떻게든 이기영이라는 인간에 대해 캐내려고 눈에 불을 켜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녀석이 볼 수 있는 건 이런 장면밖에 없다.

“더러운 몸입니다. 혹시나 명예추기경님께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요….”

“세상에 더러운 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순히 병에 걸린 것뿐이니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니 어서….”

“이러면 안 되는데… 이… 이건 전염….”

‘전염은 개뿔. 내가 역병군주인데, 누가 누굴 전염시켜, 이 양반아. 내가 당신을 전염시키면 전염시켰지.’

누가 봐도 전염병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지 않은가.

뒤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라파엘이 표정을 굳히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물론 녀석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지금 나와 녀석 그리고 일부 사제들이 자리하고 있는 자리는 인간이라면 저도 모르게 인상을 굳힐 수밖에 없는 자리였으니까.

코를 찌르는 구역질 나는 냄새, 절로 혐오감이 생기는 진물과 고름으로 얼룩진 바닥, 살이 썩어가는 병자들로 가득 찬 장소.

세상에 버림받은 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작은 촌락이었다.

이런 장소에서 땀 흘리며 열심히 봉사하는 모습을 보고 누가 이쪽을 흑막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저… 저도 도울게요, 형.”

“아니요, 괜찮습니다. 라파엘 님은 다른 사제님들을 도와주시는 게나을 겁니다.”

마음 같아서는 이곳에 자리한 환자들의 종기라도 직접 처리해 주고 싶을 지경이다.

그런 장면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게 천추의 한처럼 느껴졌다.

‘신성력이랑 연금술이 원망스럽기는 처음이다, 야.’

물론 그 정도로 따뜻한 장면을 만들 수는 없지만 지금 보이는 장면 역시 충분히 아름답게 느껴진다.

직접 치유 연고를 발라주고 한 명, 한 명의 몸을 차근차근히 살펴주는 것도 보통 멘탈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봉사는 좋지, 좋아.’

라파엘의 얼굴만 봐도 대충 반응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악마와 계약한 희대의 인간쓰레기, 대륙을 자신의 입맛대로 휘두르며 모든 것을 자신의 발아래 두려고 하는 흑막,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악독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빌런이 가장 낮은 위치에서 환자들을 치료해 주고 있다.

일반적인 신성력으로는 치료되지 않은 이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놓으며 그들에게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

‘악마 계약자 새끼들은 이런 거 시바… 하지도 않았잖아. 그렇지 않아?’

정치인들이 홍보 차원에서 사진이나 영상을 남기는 행동과는 엄연히 다르다.

녀석은 지금 인간 이기영의 일상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매체를 통해서 접한 장면들이 죄다 홍보용이라고 생각했었던 것이 분명하다.

물론 홍보용으로 사용된 것이 맞다.

하지만 아무리 홍보용이라고 한들 주기적으로 봉사를 나가 열과 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최근에야 조금 소홀해졌지만 이런 자리를 주기적으로 만들어오지 않았던가.

함께하는 사제단의 모습 또한 굉장히 익숙하다.

‘아… 이 양반 또 자기 이미지 챙기려고 등장했네.’

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다.

한두 번 호흡을 맞추어본 게 아닌 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봉사단의 모습을 보고 누가 이쪽을 비난할 수 있을까.

목적이야 어떻든 간에 인간 이기영이 약자들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반동분자 새끼들이 만들어진 모습이라며 개거품을 물었지, 아마.’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기는 했지만.

너희는 해본 적이라도 있냐고 물어보고 싶어지는 게 당연하다.

‘이거 좀 보세요. 나 나쁜 사람 아니라니까. 이거 보이지?’

풋내기 용사의 표정 변화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녀석의 얼굴에 자리한 것은 의심이다.

당연하지만 나를 향한 의심이 아닐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이 알고 있던 사실에 대한 의심이라고 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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