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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620화 (611/1,590)

# 620

회귀자 사용설명서 620화

거짓 없는 진실(2)

정말로 이기영이라는 인간이 내가 생각하는 인간이 맞는지에 대한 의구심.

정말로 명예추기경이 대륙을 자신의 손에 넣으려는 악마일까? 라는 것에 대한 의구심.

아주 작은 의심이라도 좋다.

현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건 아주 작은 의심이었다.

작은 생각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법이다.

물론 악마 계약자들의 세뇌에 의해 속이 꽉 막힌 우리 회색빛의 용사를 겨우 이걸로 되돌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작업의 첫걸음은 작은 씨앗의 발아였다.

무턱대고 진실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것보다 저 작은 의구심을 키워 나가는 게 더 중요했다.

‘저 씨앗을 심는 데 쓴 기간이 2개월.’

느리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갈 지경.

갑작스레 현자 타임을 맞이한 녀석의 얼굴이 구겨진 것이 시야에 비쳤기 때문이다.

“괜찮으십니까?”

라파엘을 향한 질문이 아니라 눈 앞의 환자를 향한 질문이었다.

“괜… 괜찮습니다. 이제는 정말 괜찮습니다, 명예추기경님. 이… 이걸 어떻게…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인사받자고 한 일이 아니니 고개를 드세요. 제 앞에서 그렇게 자신을 낮추실 필요는 없습니다.”

‘여신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니까. 그게 베니고어 교단의 교리잖아.’

“저희 같은 놈들을 위해서… 정말로… 정말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 역시 베니고어 님께서 사랑하는 자식들이 아닙니까. 계속해서 자신들을 낮추신다면 베니고어 님께서 슬퍼하실 겁니다. 맡은 역할은 다르지만, 저와 여러분 모두 같은 자식들입니다. 그러니… 모두 다 함께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명예추기경님….”

눈물을 쏟고 있는 환자들, 그리고 그 가운데 자리해 있는 명예추기경.

구태여 다시 한번 라파엘의 상태를 확인해 보지는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무척 뻔했으니까.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모습이라고, 연기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진실 된 모습이라 할 만했다.

대략적인 치료를 전부 끝낸 이후에는 스스럼없이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 와중에 말리는 사제들의 손을 뿌리치는 장면도 압권이었죠.’

사제단은 혹시나 소중한 명예추기경님께서 전염병에 걸리면 어떻게 하나 생각하고 있겠지만 정말로 전염병에 걸릴 확률이 있었다면 내가 먼저 자리를 박차고 도망쳤으리라.

“대충 정리가 된 것 같습니다, 명예추기경님.”

“후우… 다행이군요. 잠깐 쉬고 다음 마을로 이동하겠습니다.”

“네, 그럼 평소처럼….”

“예, 기본적인 복지 지원을 해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교황청의 사제단이 지속적으로 방문할 수 있도록 일정을 짜주시고 관리도 부탁드립니다. 추가로 좋은 상태를 보이는 분들에게는 일자리를 지원해 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제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명예추기경님이야말로 오늘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제가 무슨 고생을… 오히려 여러분들이 더 수고 많으셨습니다. 갑작스럽게… 연락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함께해 주셔서….”

“이런 자리에서 명예추기경님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무한한 영광이니 언제든지 불러주셔도 됩니다.”

존경이 가득 들어가 있는 사제들의 얼굴을 보니 내가 다 뿌듯해진다.

인기척이 느껴진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시야에 비친 것은 역시나 라파엘.

뭔가 쭈삣쭈삣거리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평소였다면 ‘저 새끼 왜 저래?’ 따위의 생각을 했겠지만 이게 다 녀석의 머리가 복잡해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다시 한번 영업용 미소를 장착하자 이쪽으로 슬금슬금 자리를 옮기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아니요, 형… 저는 뭐… 한 게 없어서….”

“아니요. 충분히 도움이 되셨습니다. 회색빛의 용사님이 직접 자신들을 보러 와준다는 것만으로도 저분들에게는 커다란 힘이 될 테니까요.”

“이건… 그러니까.”

“훈련하느라 바쁜 와중에… 제가 방해된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조금이라도 더 배워야 하고 열중해야 할 시기였는데….”

“…….”

“하지만 라파엘 님이 한 번쯤은 이런 곳에 와보기를 원했어요.”

옆에 앉으라는 듯 슬쩍 자리를 비키자 의자에 조심스레 앉는 놈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보이고 있는 풍경은 여전했다.

처참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촌락이었고,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이 살아가는 터전이었다.

아까와 다른 곳이라고 한다면 저들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는 것.

타이밍 좋게 꼬맹이 한 명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주변에서 다른 이들이 말리고 있었지만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것은 당연지사.

이윽고 도착한 꼬마는 꼼지락 거리는 손으로 사탕 하나를 내민다.

‘아… 얘, 이거 진짜 심어놓은 거 아니야? 이거 진짜 심어놓은 거 아닌데…’

공익광고 협회에서나 튀어나올 것 같은 연출이었지만 작은 도우미가 패스한 볼을 받아 내야 했다.

싱긋 웃으며 사탕을 받은 이후에는 입안으로 곧바로 털어 넣는다.

“고맙구나.”

살살 머리를 쓰다듬자 부끄러운지 곧바로 도망치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살짝 옆을 보자 저도 모르게 미소 짓고 있는 풋내기 용사의 얼굴이 눈에 보였다.

‘요게 먹히네.’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너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나이가 어리다 보니 요런 감성이 먹히는 것 같다.

라파엘이 좋다니 다음번에는 심어두는 게 좋지 않을까.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달려가다 보면 보이지 않는 게 있게 마련이거든요. 본인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

“좋은 것들에 둘러싸여 좋은 것들만 바라보다 보니 제 영역 밖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무지해지고… 항상 커다란 숲만을 보고 있자니 작은 나무들이 보이지 않게 되더군요. 아무리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상기한다고 한들… 결국에는 자기 자신이 자리한 환경에 익숙해져 가는 것만 같습니다. 최소한 저는 그랬어요.”

“그건….”

“라파엘 님은 더 큰 일을 위해 더 커다란 가치를 위해 노력하고 나아가시게 될 겁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위협을 겪고, 가치관이 변하고, 여러 가지 생각들을 머릿속에 품게 되겠죠. 그걸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라파엘 님에게 주어진 책무를 생각하면 당연한 이야기니까요.”

“…….”

“제가 여기에 라파엘 님과 함께 오자고 한 이유는 이런 풍경들을 잊지 않았으면 해서예요.”

“무슨….”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싸우는지 우리가 어떤 가치를 위해서 싸우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렇군요.”

“지켜야 할 것이 많습니다. 이곳에는….”

무척이나 숙연해진 장내.

이 정도로 숙연해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진실인 거야.’

라고 생각할 만하리라.

지난 2개월 동안 몇 차례나 나를 만나지 않았던가.

짧다면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이기영이라는 인간에 본질에 마주했으니, 저런 종류의 생각이 깔릴 만도 했다.

비열한 미소를 흘리던 얼굴로 가슴 따뜻해지는 미소를 보내고 있었고, 소외 계층을 짓밟는 줄로 알았던 두 손으로는 그들을 돕고 있다.

취미는 체스 정도가 유일, 베니고어 님에게 항상 기도를 올리며 오직 타인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네가 쉴 때 뭐 했는지 잘 알고 있지.’

기록관으로 가서 이전에 있었던 일들과 명예추기경이 나오는 영상들을 정주행하지 않았던가.

그것 역시 거짓이라고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특히나 라이오스 악마소환 사태 때 찍힌 영상은 린델 토마토 지수 100%를 채우고도 남는다.

화면을 빨아들이는 박덕구의 절박함이 영상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무언가 이상한 점을 찾고 싶었겠지만, 개미 손톱만큼의 이상한 점도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서적이나, 타인의 평판, 기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대중들에게 이상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는 거다.

충분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평소와는 다른 생각이 싹을 틔우기에는 충분한 시간.

세뇌되었던 기억들을 부정하기에는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았기 때문에 딱 완벽하게 밑밥을 깔아놨다고 보면 무방할 것 같았다.

흔들리는 눈, 고민하는 얼굴, 심지어 혼란스럽다는 표정도 눈에 보인다.

어디가 아픈 사람처럼 초조해하고 있고 자꾸만 뭔가를 곱씹는 것처럼 보였다.

‘이 정도면 준비된 것 같지?’

마침 딱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야간의 빌드업 기간을 가져도 상관없을 것 같았지만, 계속해서 늦추는 것보다는 한번 질러보는 게 맞다.

“…….”

“…….”

“함께 가봐야 할 곳이 있습니다.”

“어디로….”

“보여 드릴 것이 있습니다.”

“…….”

“어째서 지금의 대륙이 선택받은 용사를 필요로 하는지, 어째서 대륙이 위기에 처해 있는지, 정말로 위협이 실존하는지에 대해서 궁금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라파엘 님께서는 성검의 선택을 받으셨지만 정말로 실감하고 계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실제로 느껴보지 않는다면 와닿지 않을 겁니다.”

“…….”

“베니고어 님의 말씀은 사실입니다.”

“…….”

“알고 계시는 것처럼 대륙은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고 있어요. 72군단의 악마들보다 더욱더 강한 악마들과 마주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천사의 탈을 뒤집어쓴 이들과 바깥에서 온 악마가… 머지않은 시일 내에 대륙에 들이닥칠 겁니다.”

“…….”

“많은 희생자가 생기고 많은 이들이 죽을 거예요. 모험가들은 목숨을 걸고 적들과 마주할 거고, 모든 대륙민이 힘을 합쳐 그들에게 대항할 겁니다.”

“그거….”

‘새빨간 거짓말 아니었냐고?’

“그건….”

‘민중들을 선동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냐고?’

“그러니까.”

‘이기영 위원장이 대륙을 집어삼키기 위한 자작극이 아니었냐고?’

응, 아니야. 진짜 악마새끼들이 쳐들어오는 거 맞어.

지금부터 넌 그걸 보게 될 테니까. 두 눈 똑바로 뜨고 똑똑히 봐.

더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다.

직접 보는 것보다 더 좋은 수단은 없을 테니까.

뭔가 큰 게 올 것이라는 걸 예상했는지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하는 라파엘의 모습이 보인다.

나 역시 딱히 말을 이으려고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무슨 말을 한들 들리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 증거가 있다는 어투로 당당하게 말을 잇지 않았던가.

놈의 입장에서는 선동과 날조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진실이 되는 기적.

카스가노 유노 한 방이면 충분하다.

물론 이 반동분자 집단이 카스가노 유노와 이쪽의 유착 관계에 대해 굉장히 많이 파고들었겠지만 마치 현실처럼 눈앞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떨쳐내는 것은 어려울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딱 지금같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는 말이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녀석은 다소 긴장한 듯한 모습으로 카스가노 유노의 앞에 자리 잡은 이후, 나는 그 어떤 설명도 하지 않고 녀석을 유노 앞으로 내몰았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시점.

미하일과 마찬가지로 구역질부터 하고 보는 놈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우웨에에에에에엑….”

“…….”

“하아… 하아… 우웨에에엑. 제가… 지금… 본 게….”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지만 그것도 잠시.

허겁지겁 문을 연 채로 무작정 바깥으로 향하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얘, 이거 멘탈 털린 건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진실로부터 멀어지려는 발버둥 같은 느낌.

생각보다 악마 계약자 놈들의 세뇌가 강하게 자리 잡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새끼, 이거. 멘탈 털린 거 맞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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