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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621화 (612/1,590)

# 621

회귀자 사용설명서 621화

거짓 없는 진실(3)

콰아아아아아앙!!!

“…….”

“콜록… 콜록….”

“자기. 얘 정말로 용사 맞아? 더럽게 약해서 어디 쓸 데도 없을 것 같은데.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 하면 안 돼?”

“…….”

“그래도 처음 만났을 때는 조금 괜찮지 않나 싶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영 맹탕이었네. 성검은 뭘 믿고 얘를 선택했는지 몰라. 아니, 정말로 선택받은 게 맞기는 한 건가? 그 검이 사람을 착각한 건 아닌가. 이딴 게 용사라니 베니고어 님도 참….”

“…….”

“저기요, 용사님. 그래, 너. 너 말하고 있는 거예요, 너. 왜? 대답할 기운도 없어? 도대체 얼마나 더 추해지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빨리 좀 일어나는 게 너한테도 좋을걸.”

“하아… 하아….”

“내가 얼마나 바쁜지는 알고 있는 거야? 붉은 용병의 길드마스터가 본인 시간까지 빼면서 여기에 나와 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돼? 내 입으로 말하기도 웃기는 이야기지만 평생이 가도 오지 않을 기회….”

“…….”

“됐다… 더 이상 말해도 내 입만 아프지. 기초훈련 25세트 반복하고 끝내는 거로 할게. 할 마음도 없는 학생한테 시간 쓰는 것보다 더 멍청한 일이 어디 있겠어. 끝나면 알아서 네 발로 돌아가. 괜히 서성거리면서 내 신경 긁지 말고.”

강도가 높은 훈련으로 인해 넝마가 된 라파엘의 몸이 눈에 보였다.

물론 그것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근심과 걱정을 숨기지 못하는 듯한 얼굴, 예상했던 그대로 멘탈이 나간 것 같은 표정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아… 쟤 진짜 멘탈 심하게 나간 것 같은데….’

오랜만에 만난 차희라가 저렇게 짜증 내는 것도 이해가 간다.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는 가운데 특별히 시간을 내준 것이 아니던가.

어디까지나 호의로 내어주고 있었던 시간이었고 녀석만을 위해 준비한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자세로 수업에 임하고 있으니….

‘뚝배기가 안 깨진 게 용하지.’

차희라가 이쪽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면 아마 곧바로 손을 놓지 않았을까.

아무리 녀석이 중요하다고 말해놓은들, 그녀는 자기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는 성격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충격적이었나.’

아니, 이 경우에는….

‘혼란스러워한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며칠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저 상태를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저런 상태의 녀석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고민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여러 가지 가설이 있지만 가장 가능성이 큰 추측은 놈이 아직 선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빛과 어둠, 둘 중 하나를 선택했다면 저런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쪽에 복수하기를 원하든, 대륙을 지키기 위해 각성을 하든 간에 뭔가를 선택하기는 했을 거라는 거다.

이 두 가지의 선택지 모두 공통으로 필요로 하는 수단이 바로 무력이 아니었던가.

저렇게 훈련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현재 녀석이 갈팡질팡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맞다.

‘그 꼴을 보고도 못 믿으시겠다.’

물론 내 예상이 틀렸을 수도 있지만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아직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내게는 썩 달가운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뭘 선택하든 간에 훈련은 해야지.’

오늘 하루 현장의 일을 내팽개치고 오지 않았던가.

‘시간 아까워 죽겠네, 시바.’

내 마음 역시 차희라와 별반 다르지 않다.

들려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자 시야에 보인 것은 붉은 용병의 길드 마스터, 용병여왕 차희라.

트레이드 마크가 돼버린 붉은 머리,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것 같은 머리카락도 여전했고 거친 용병 같은 느낌도 여전했다.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숨을 몰아쉬며 이쪽으로 다가온다.

살짝 미소를 짓자 수건으로 대충 땀을 닦고 옆에 털썩 주저앉는다.

그 와중에 빨리 옆에 앉아 앵겨보라는 듯 쓰윽 자리를 만드는 모양새는 권력자가 전형적으로 가지고 있는 모습 중 하나였다.

저도 모르게 옆으로 다가가 엉덩이를 앉히자 자연스럽게 어깨 위로 손이 올라오는 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얘, 손버릇 봐.’

“고생했어, 누나.”

“뭐, 한 것도 없는데 고생은 개뿔. 짜증 나 죽겠다니까. 어디서 저런 놈을 주워 와서는… 계속 지금 같은 상태라면 그냥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

“자기 부탁 아니었으면 벌써 때려치웠을 거야. 벌써 며칠째 이런 상태인데… 저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너무 화가 나서 중간에 머리통을 뽑아버릴 뻔했다니까.”

‘그러면 안 돼….’

“우리 애들 훈련시간까지 빼면서 만든 자리야. 자기가 저 핏덩이를 어떻게 쓸려고 그러는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이런 쓸데없는 시간 허비하는 것보다 우리 애들 한 놈이라도 더 훈련시키는 게 낫다고. 최소한 전쟁터에서 지들 목숨은 알아서 챙기게 만들어 줘야 하지 않겠어? 물론 저치가 제대로 활약해 주면 그건 그거대로 이득이기는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럴 것 같아 보이지 않네.”

“뭔가 걱정거리나 고민거리가 있어서 그런 것 같은데… 극복한다면 지금보다 더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누나가 보기에는 조금 어떤데? 그러니까….”

“뭘? 지금 저 꼴을 보고도 그런 게 궁금해?”

“아니, 저런 부분이 아니라 육체적인 능력이나 가지고 있는 재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냐고 물은 거야. 이해도, 이론 같은 것들, 몸을 움직이는 방법 같은 건 난 잘 모르니까.”

“…….”

“…….”

“솔직히 말해서….”

“응.”

“재능 자체는 우수한 편이야. 아니, 그것보다는 조금 더 위에 있다고 봐도 되나. 만약 성검이나 다른 지원이 없었어도 교국 8좌 정도까지는 무난하게 올라갈 수 있을 정도…?”

“흐음….”

‘현성이 말이랑은 다르네.’

전에 김현성에게 학부모 상담을 받았을 때와 나온 말과는 달랐기 때문에 조금은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김현성이 표현하는 라파엘의 이해도는 둔재보다 조금 더 나은 정도.

‘제대로 키울 수 있을지… 확실히 말씀드리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많이 봐줘도 평범한 정도인 것 같아서… 물론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현재로서는… 성검의 힘을 빌린다고 하더라도 기영 씨가 생각할 만한 성과를 거둘 수는 없을 겁니다.’

‘네? 정말이에요?’

‘네, 현재로서는 그다지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라고 말을 줄이지 않았던가.

‘희라 누나한테도 물어보기를 잘했네.’

나도 우리 얘가 재능 있다는 소리에 기뻐하는 부모 같은 성향이 있기는 있었나 보다.

김현성의 거침없는 코멘트가 약간은 의아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아마 그건 녀석이라서 할 수 있는 발언이라고 생각했다.

자타공인 천재 중의 천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녀석의 눈에, 그 누가 성에 차겠는가.

라파엘의 검술 역시 한심하게 보일 것이라는 건 너도나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하지만 차희라의 경우는 다르다.

‘희라 누나는 천재라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하니까.’

물론 천재의 종류라고 볼 수 있지만 차희라의 그것은 본능에 더 가까웠다.

경험과 본능, 그리고 순수한 힘으로 만들어진 강함.

정교하고 약속되어 있는 검술 자체가 쓸모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김현성과 의견이 대립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최소한 나쁘지는 않다는 거네.’

차희라의 보증이 있으니 성장하기는 할 것이다. 저 위기만 제대로 극복해 준다면 말이다.

“그렇게 말해주니 괜찮게 느껴지기는 하는데? 안심이 되기도 하고….”

“글세, 아무리 재능이 괜찮으면 뭐 해. 저 모양 저 꼴인데.”

“아마 곧 일어날 거야. 라파엘이 겪고 있는 개인적인 문제는 내가 해결해 줄 거고. 그때까지는 너무 빡세게 굴리지는 마, 누나.”

“자기, 말을 웃기게 한다. 그나마 나는 여유는 주는 편이야. 다른 쪽에서 안 그래서 문제지. 내가 나쁜 경찰인 것처럼 보였어? 진짜 나쁜 경찰은 따로 있는데… 자기, 쟤가 다른 훈련장에서 어떻게 깨지는지 본 적 없지?”

“훈련 참관하는 건 처음인데….”

“나중에 한 바퀴 돌아봐.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라파엘만 개인적인 문제를 겪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겪고 있는 문제는 언제 해결해 줄 건데?”

“길드에 문제라도 있어?”

“아니, 나 개인이 겪고 있는 문제.”

“아… 그….”

“제어해 보려고 했지만, 제어가 안 되는 것 같아… 최근에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아무것도 안 보이더라도 웃기게도 자기 생각은 나더라. 무슨 말 하는지 대충 알겠지?”

“뭐….”

“나 스스로가 판단하건대 내가 이성을 잃을 때마다 짐승 새끼처럼 본능에 따라서 움직이는 건 평소에 쌓아둔 게 많아서 그래. 여러 가지 욕구는 쌓여가는 데 제대로 배출하지 않으니 결정적일 때 문제가 된다는 거야. 무슨 말 하는지 대충 알겠지?”

“…….”

“무슨 말 하는지 대충 알겠지?”

‘아니…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어.’

“알고 있잖아, 자기.”

“대충은… 그런데… 안 그래도 내가 누나 몸을 한번 살펴보려고 하기는 했는데….”

“그거 신호야?”

“아니, 신호가 아니라 말 그대로의 이야기야. 정확히 돌아버리는 원인이 뭔지 파악해 보려고 했었다고.”

“파악할 필요 없어. 이미 답은 나왔으니까. 그동안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지 뭐야.”

“무슨 뜻이야?”

“내가 진짜로 강해질 방법이 뭔지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거야. 샌님처럼 훈련하는 건 별로 의미가 없다고.”

“그게 뭔 소리야?”

“자기는 맹수가 훈련하는 걸 본 적 있어? 앞발 휘두르기나 물어뜯는 방법을 연습하는 걸 본 적이 있냐고.”

“…….”

“머릿속에 꽉 들어가 있는 욕구를 해소해 주는 식으로 방법을 바꿨다고. 잘 처먹고 잘 싸고. 짐승처럼 사는 거로 방법을 바꿨다, 이거야.”

“…….”

“피가 생각날 때도 굳이 억제하지 않아도 되겠더라고. 사방에 깔린 게 사냥감인데 가까운 던전이나 숲에 들어가서 한바탕 하고 들어오면 머릿속이 꽤 상쾌해지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말한 거야. 무슨 말 하는지 대충 알겠지?”

저 ‘무슨 말 하는지 대충 알겠지?’라는 말을 이 짧은 순간에 몇 번이나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뭔가에 홀린 것처럼 고개를 살짝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왠지 모르게 끄덕여야 할 것 같았으니까.

‘이 누나 바쁘다는 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사느라 바쁜 거였어?’

물론 그건 아닐 것이다.

그녀는 한 집단을 이끌어가는 수장이 아니던가.

아마 그 와중에도 본인의 욕구를 해소하고 있다고 표현한 것이 아닐까.

솔직히 차희라의 말이 진실인지 의구심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마음의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니 곧바로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

한 차례, 아니, 두 차례 더 성장한 것 같은 모습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본인 욕구에 충실한 것만으로 이렇게 성장할 수 있다는 게 어처구니없이 느껴진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따위의 말을 달고 사는 놈들이 이 꼴을 본다면 절망에 빠질 거라고 생각했다.

‘이딴 게 어디 있어.’

이게 뭐야. 시바.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까 알아둬. 아, 거기 물 좀.”

“아… 응.”

스리슬쩍 물컵을 건네자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형편없이 부서지는 물컵이 눈에 띈다.

“미안 아직 힘 조절이 안 돼서. 곧 익숙해질 테니까 신경 쓰지 마.”

솔직히 신경을 아예 안 쓸 수가 없다.

“쟤는 내버려 두고 와인이나 마시러 가자. 자기 온다고 해서 좋은 거로 준비해 놨는데. 아마 마음에 들걸. 포션으로 만들어진 와인이라는 데. 놀랍게도 자기가 만든 게 아니야. 원래부터 쭈욱 있었던 아이템인데 나쁘지 않아 보이더라.”

‘…….’

“일단 무슨 말 하는지 알겠어. 근데 오늘은 조금….”

“뭐, 그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 일주일 안에 한 번은 들리면 되니까. 용건은 저쪽?”

“물론.”

다른 이유는 전부 제외하더라도… 차희라의 개인적인 문제보다는 가라앉을 조짐을 보이는 종목 쪽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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