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4
회귀자 사용설명서 624화
거짓말이야(2)
이따금 이기영이 비슷한 행동을 보일 때가 있었다.
멀리 있는 곳을 바라본다든지, 혼이 나간 듯한 얼굴을 하는 등의 일이었다.
당연하지만 단 한 번도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생각에 깊이 빠졌을 때의 습관 같은 것으로 판단했고, 실제로 그런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보이는 행동은 지금까지와는 다르다.
‘뭔가 있어.’
그동안 별것 아니라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는 습관과 별로 다르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모습에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뭐지? 도대체 뭐야?’
여전히 고통이 가시지 않는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모습은 뭐라 형용하기 힘들 정도.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혼이 나간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만약 말을 걸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저 상태를 유지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형….”
“…….”
“형, 괜찮으세요?”
“…….”
“형!”
“아! …네?”
“아까….”
“네… 아… 제가… 뭔가….”
“…….”
“네… 괜찮습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하지만….”
“정말로 괜찮습니다. 최근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조금 어지러워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금 쉬다 보면 나아질 겁니다. 일이 바쁘다 보면 이따금 생기는 현상이기도 하고… 습관, 습관 같은 거라고 보면 됩니다. 이거… 제가 깜짝 놀라게 한 모양이군요. 죄송합니다, 라파엘 님. 하… 하하하.”
‘거짓말이야.’
확실하지는 않다.
하지만 눈앞의 대상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 하나만은 전해져 온다.
이기영이라는 인간은 방금 일어난 사건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항상 완벽했던 모습과는 조금 다른 흐트러진 모습이지 않은가.
부자연스러운 표정과 부자연스러운 행동, 무엇을 경계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굉장히 조심하는 느낌이다.
그와 오랜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었지만,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이것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지금의 이기영은 가면을 벗고 있다.
항상 자신을 완벽함으로만 포장하던 가면을 집어 던지고, 진짜 약점을 드러내고 있는 상태였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모습이야말로 이기영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
명예추기경이나 위원장, 파란 부길드마스터, 대륙을 구한 영웅, 용에게 선택받은 자, 베니고어의 현신이라는 가면 속에 가려진 그의 진짜 모습 말이다.
‘이건 기회야.’
충분히 기회라고 할 만했다.
빈틈이라고는 없을 것 같았던 명예추기경이 자신의 유일한 약점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이날만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모른다.
이런 기회가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녀석에게 접근한 것이다.
하지만 입안이 쓰다.
이유는 자신조차 알 수 없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씁쓸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감돌기 시작했다.
“정말로 괜찮으신 거 맞아요? 방금 분명히….”
“네, 괜찮습니다. 전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형.”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로요. 그것보다… 네, 다른 이야기를….”
‘말을 돌리고 있어.’
“아까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죠?”
‘초조해하고 있다.’
“…….”
“아… 네, 거기까지 말씀드렸었죠. 그러니까… 네, 오늘은 피곤하신 것 같아서 일정을 조금 줄였습니다. 그리고… 네, 또, 아마 다음 주 즈음부터는 위문차 병사들을 방문하게 될 것 같고요… 그러니까 저와 함께 직접 전진기지들을 둘러보기도 할 것 같으니 준비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뭐?’
“전진기지에 있는 병력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하고 어떤 게 가장 도움이 될지도 한번 알아봐야 하는 부분이니… 책임자들이 보고해 오는 건의사항과 현장에서 체감되는 것의 느낌은 많이 다를 겁니다. 병력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게 무엇인지 느낄 수 있을뿐더러….”
‘당신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장… 담하건대… 라파엘 님께서 방문하시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커다란 힘이 될 겁니다.”
‘뭐라는 거냐고….’
저절로 침묵하게 되는 게 당연했다.
불과 몇 분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가.
아니, 비슷한 이야기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잠시 표정관리를 하지 못하게 된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다시 한번 미소를 띄웠지만… 자신의 표정을 확인했는지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다행이군요.”
“…….”
“조금은 기운을 차리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렇게 웃는 모습을 본 것도 굉장히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그 누가 이 기묘하고 이상한 상황을 정상적이라고 판단할까.
“그럼 오늘은 예정대로… 네… 그렇게, 하면 괜찮을까요? 일이 전부 끝나고 체스를 두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요. 사실상… 네, 휴일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
“그동안 심적으로 지치셨을 테니 오늘만이라도 마음 편히 쉬셨으면 합니다. 혹시 어디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말씀하셔도 됩니다. 내일 훈련에 지장이 가지 않을 정도라면… 훈련에… 지장이… 네, 지장이 가지 않을 정도….”
“…….”
“저… 잠깐.”
“형?”
“잠깐… 잠깐만….”
“형.”
“오늘… 일정은 모두… 네, 잠깐… 급한 일이 생각….”
아까 일어났던 일보다 더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때.
잠시 비틀거리던 이기영이 급하게 몸을 뒤로 돌린 것이다.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달려가려고 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혹시나 무슨 사건이 터지지 않을까 초조해진 마음은, 저도 모르게 복수의 대상의 뒤를 쫓게 했다.
어떻게든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은가.
벽을 짚고 아슬아슬하게 걷는 모습은 불안해 보이기까지 하다.
거친 숨을 헐떡이고 있었고, 한 손으로는 계속해서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헛구역질하는 듯한 소리를 내며 힘들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디디고 있다.
종국에는 코너를 돌아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조금 더 빠르게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누가 보더라도 위태로운 뒷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찮은 건가? 몸이… 몸이 아픈 건 아닌가?’
분명히 뭔가 있다. 이 코너를 돌면 그가 숨기고 있는 것이 있다.
‘문제가 있는 거야?’
그토록 찾고 싶었던 그의 약점.
이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는 패.
복수를 완성할 퍼즐 조각.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떠올릴 수가 없다.
속도를 올려 코너를 돌자 눈에 들어온 장면은 기다란 복도에 홀로 쓰러져 있는 이기영의 모습.
‘어?’
“형?”
‘뭐야.’
“형… 괜찮아요?”
허겁지겁 뛰어가 상태를 확인하려고 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한 인영의 모습에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앞을 가로막아 선 것은 작은 키의 여자.
어디에서 나타난 건지는 확실치 않지만, 처음부터 이 장소에 있었던 것처럼 자리해 있었다.
누구인지는 당연히 알고 있다.
이기영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존재의 이름을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쌍검을 들고 있는 여자는 더 이상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듯 앞을 막아섰다.
“가까이 다가오지 마십시오.”
“박리안 님?”
“필요에 따라서는 무력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네?”
“조용히 왔던 길을 되돌아가세요. 오늘 일정은 잠시 후에 따로 전달 드리겠습니다.”
“지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기영이 형이… 일단… 일단은….”
“두 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조용히 돌아가세요.”
“비켜요. 사제를 불러야 해요. 지금 당장 불러야 한다고요.”
“당신이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걱정하시는 사안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이 일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라파엘 님께서는 할 일을 하시면 됩니다.”
“비켜요….”
“돌아가세요. 두 번 말씀드리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비… 키라고!”
콰드드득!
자신도 모르게 뛰어들어 가봤지만 느껴지는 것은 차가운 바닥.
목 위로 서늘한 감촉이 느껴진다.
자신은 바닥에 형편없이 꼬꾸라졌고, 박리안이라는 여자가 자신을 위에서 짓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언제 이렇게 되었는지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순식간에 몸이 공중에서 한 바퀴 나돌았고, 결과는 보이는 그대로.
처박힌 얼굴과 맞닿은 차가운 바닥의 감촉이 그대로 느껴졌다.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고 해봤지만 이미 구속된 육체가 움직일 리가 없다.
허리춤에 매달린 검은 마치 장식인 것처럼 자신의 말에 응답하지 않는다.
최대한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자, 조용히 쓰러져 있는 이기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봐도 여전히 믿을 수 없는 장면이지 않은가.
그 이기영이… 그 이기영이 정신을 잃고 형편없이 쓰러져 있다.
‘당신,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어째서 그렇게 쓰러져 있는 거야.
‘당신 악당이잖아.’
왜 그렇게 괴로운 듯이 몸을 웅크리고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건데.
‘대륙을 집어삼키려고 하는 독재자잖아.’
그런 모습 보이지 마. 내 앞에서 그런 모습 보이지 말라고….
‘일어서. 당장 일어나라고.’
약한 척하고 있는 거 다 알아. 지금도 연기하고 있는 거 전부 알고 있다고.
‘그러니까 일어나.’
작다.
무척이나 작아 보인다.
그렇게 무섭고 두려워했던 이가, 악마의 화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가, 이상하게 너무나도 작아 보인다.
힘을 주면 부서질 것만 같은 모습 아닌가.
마치 병든 새처럼 보일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왜 그동안 눈치채지 못했을까.
왜 지금까지는 저런 모습을 보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비켜….”
“돌아가신다고 확언해 주시면 구속을 풀어드리겠습니다.”
“비키라고….”
“실례를 용서해 주십….”
“비키라고 말했잖아!!”
콰아아아아앙!!
터져 나온 것은 회색의 빛.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자신을 짓누르고 있었던 이가 튕겨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곧바로 몸을 일으켜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지만, 언제 자세를 바로잡았는지 두 자루의 검이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빨라.’
지금의 자신은 반응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쾌검.
본의 아니게 머릿속으로는 주마등이 스쳐 지나간다.
“그만하세요.”
그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익숙한 목소리.
정신을 완전히 잃은 이기영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기다란 창을 등 뒤에 멘 여자였다.
“수습은 제가 하겠습니다. 박리안 님께서는 주변의 통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라파엘 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조용히 방에 들어가세요. 그리고….”
“…….”
“당신은 오늘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겁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
절대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진실.
이기영, 그자가 그렇게 숨기고 싶어 하던 비밀의 일부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순간이었다.
“거짓말이야….”
“…….”
“거짓말… 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