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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625화 (616/1,590)

# 625

회귀자 사용설명서 625화

대륙의 진짜 어둠(1)

‘거짓말….’

괜스레 머리를 부여잡게 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초조함이 전신에 감돈다.

이상하게도 손은 점점 떨려왔고 호흡이 거칠어지는 게 느껴진다.

모든 이들이 신의 현신이라고 부르는 이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고통스러워하고 있다고?

신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라 하지 않았던가.

가장 순수한 영혼을 가진 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베니고어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런 사람이 아파?’

이렇게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운명의 장난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상황이 아닌가.

갑작스레 찾아온 현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이다.

앞에 놓인 책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을 때였다.

맞은 편에서 재촉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짜증을 담은 목소리가 아니다.

눈앞에 있는 대상 역시 무척 초조해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맞다.

평소와는 다르게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조혜진.

명실상부 파란 길드의 3인자.

길드 비서실장의 자리에 앉아 있는 인물이었고 파란에서 가장 신뢰받고 있는 파티원이기도 했다.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이었고 원리원칙을 그 누구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항상 침착함을 유지하는 성격이라고 판단했던 그녀 역시, 걱정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확히 어떤 상태였습니까. 부길드마스터가 쓰러지게 된 경위에 대해서….”

“…….”

“라파엘 님?”

“…….”

“라파엘 님.”

“멍하니… 멍하게 다른 곳을 바라보시다가 머리를 부여잡으셨어요. 평소처럼 대화하시다… 오늘 일정은 다음으로 미루는 게 좋겠다고 하시고는… 반대쪽으로 계속해서 뛰어가셔서…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것 같아서…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대로… 쓰러져 버릴 것 같아서….”

“그다음에는 어떻게….”

“잘 모르겠어요. 그냥… 뒤를 따라 가보니 형이 쓰러져 있어서… 그다음은 알고 계신 그대로예요. 박리안 님이… 제 앞을 가로막았고… 저는 형이 잘못되는 줄 알고… 형은 괜찮으신 건가요?”

“…….”

“말해주세요. 괜찮으신 거 맞죠?”

“네, 현재 안정을 취하는 중입니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는 못하셨지만, 곧 일어나실 겁니다.”

“어째서 사제를 부르지 않은 건가요?”

“라파엘 님께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는 일입니다.”

“어째서 사제를 부르지 않은 거냐고 물었잖아요! 뭔가 조치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사제들을 불러 해결될 일이었다면 이미 훨씬 전에 해결됐을 겁니다. 다른 건 묻지 말아주세요. 그저 이것만 기억하고 계시면 됩니다. 라파엘 님께서는 오늘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겁니다.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겁니다. 오늘 일어난 일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해주세요. 꼭 부탁드립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부길드마스터께서 원하시는 일입니다.”

“…….”

“형을 직접 봐야겠어요.”

“…….”

“비밀을 지키는 걸 원하시는 거라면 저도 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협박하거나 거래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형이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알아야겠어요. 제 눈으로….”

“…….”

“비밀은 지킬 겁니다. 제 검에 맹세코, 반드시.”

“후우….”

“저도… 대충은 알고 있어요. 그저… 확신이 필요할 뿐이에요.”

결심했다는 표정, 어쩔 수 없겠다는 눈빛,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조혜진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등을 돌릴 뿐이었지만 저 행동이 긍정의 표현이라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뒤를 따라나서자 눈앞에 보이는 것은 커다란 문.

이윽고 문이 열렸고 침대 위에 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비현실적이다. 왠지 모르게… 왠지 모르게 비현실적이다.

아까 본 모습과 다르지 않다.

표정이 한결 편해 보이기는 했지만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가느다란 손목과 초췌해 보이는 얼굴, 정말로 죽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모습이었다.

손이 떨려온다. 괜스레 입술을 꽉 깨물게 된다.

‘그럴 리가 없어….’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된다.

저런 사람이… 저런 사람이 세상을 집어삼키려고 하는 악마일 리가 없다.

저렇게 약하고 여린 사람이 모두를 속이고 있는 사기꾼일 리가 없다.

마치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지 않은가.

저런 모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잘못 생각한 거야. 뭔가… 뭔가 오해가 있었던 거야.’

단장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단장님이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에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다.

자신이 놓치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 결정적으로 놓치고 있는 한 개의 퍼즐 조각이… 분명히 놓여 있다.

“부길드마스터는….”

“네.”

“기억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게… 그게 무슨….”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

“물론… 하하하, 물론 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닙니다. 점차 나아지고 있고, 생각하시는 것처럼… 네, 생각하고 계시는 것처럼 위험한 상황도 아닙니다. 그렇게 위험한 상황은 아닐 거예요. 지금은…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못하시는 정도니까. 그러니까, 큰일은 아닙니다. 예전에 있었던 일들은 전부… 기억하고, 기억하고 계시니까요. 아직… 아무것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울음을 참고 억지로 말을 잇는 듯한 목소리.

‘거짓말이 아니야.’

저 조혜진이라는 여자가 슬퍼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그 목소리는 너무나도 처연하게 들려와, 나 자신도 슬퍼지게 만들 정도였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침대에 걸터앉은 그녀는, 형의 손을 꽉 잡고 그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댄 이후, 말을 이었다.

“머리를 붙잡고 두통을 호소하거나 혼이 나간 것 같은 모습을 보이는 증상을 보이신 이후에는 대개 이렇게 잠에 빠져들고는 하십니다. 심한 경우에는… 사흘이 넘게 잠에 빠져 계실 때도 있고요….”

“어쩌다가… 이렇게 되신 겁니까.”

“27군단 소환사태.”

“…….”

“아마 라파엘 님도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러니까 부길드마스터께서… 악마에 의해… 네, 그 이후에 얻은 후유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

“자세한 것은 저도 모릅니다.”

안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오른다.

“어째서….”

“…….”

“어째서… 이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 어째서 형을… 형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 건가요.”

‘내 잘못이야.’

“이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이 사람을 전쟁터로 내몰 수가 있어.”

‘나 때문이야….’

“어떻게… 이 사람한테 이 모든 책임을 강요할 수가 있냐고!”

악마의 기운에 노출되어 부작용을 얻은 것이라면, 결사단과의 마찰 역시 그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으리라.

어쩌면 그날 일어났던 사건이 그에게 치명적인 독이 됐을지도 모른다.

“어째서 이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은 거냐고!”

오히려 내버려 두지 않은 것은 자신들이다.

대륙을 위해 희생하고 빛을 위해 살아가는 이를 멋대로 오해한 것은 자신들 쪽이다.

그에게 다시 한번 고통을 안기고 그를 궁지로 몰아넣은 것은 내 잘 못이다.

안 그래도 한계에 다다른 사람에게 끊임없는 고통을 선사한 것이 바로 나 자신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당신들… 생각만 할 수가 있냐고… 제기랄!”

나 자신에게 외치는 목소리였다.

끝까지 그를 믿지 않은 내게 외치는… 처절한 절규였다.

“그게 당신들의 방식이야! 그게… 그게 당신들의 방식이냐고… 자기들 멋대로 한 사람을 내몰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게… 그게… 흐윽… 당신들의….”

‘내 잘못이야.’

“흐으으윽….”

‘내가… 내가 형을 이렇게 만든 거야.’

내가… 내가 형을 이렇게 만든 거라고….

“어리광부리지 마세요.”

“뭐?”

“어리광부리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당신 멋대로 그를 판단하지 마세요. 부길드마스터 스스로가 결정한 일입니다. 대륙에 남길 것이 있다고… 기억이 전부 사라지기 전에… 저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시겠다고 결정하신 일입니다. 모든 게 그의 선택이에요.”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너.”

마치 목을 조이는 것만 같은 느낌.

“…….”

“내 친구를 병신 취급하지 마.”

“그런 게….”

“그가 스스로 결정한 일이야. 네가 뭘 안다고 그렇게 떠들어. 함께 지낸 지 고작 몇 달도 되지 않은 네가 뭘 안다고 내 앞에서… 그렇게 모든 걸 안다는 듯이… 지껄여. 네 어쭙잖은 소견으로….”

“…….”

“그의 긍지를 더럽히지 마.”

“흐윽… 흐으으윽… 끄으윽….”

“…….”

“형… 흐으윽… 혀엉….”

“나가주세요.”

“흐으으윽…….”

“나가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안정이 필요해요. 논쟁이 필요하다면… 이후에 시간을 만들겠습니다. 약속은 지키리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세요. 그게… 그에게 보탬이 되는 일입니다.”

눈앞이 흐려진다. 어마어마한 책임감이 전신을 짓누른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당장에라도 쓰러지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누구보다 울고 싶은 것은 저 여자일 것이다. 펑펑 울고 책임감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은 저 여자일 것이다.

조혜진의 말이 맞다.

자신은 이기영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떠들 권리가 없다.

오히려 용서를 구함이 옳다. 미안하다고 잘못 했다고… 무릎을 꿇고 빌어야 한다.

힘겹게 발걸음을 옮긴다. 도저히 가슴에 품을 수 없는 감정을 품고 그렇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발걸음을 옮긴다.

감정은 계속해서 요동치고 있다.

하지만 꿋꿋이 자리에 버티고 있는 조혜진의 모습을 바라본 이성은 필사적으로 그녀의 말을 되새긴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세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돼.’

잘못을 바로잡는 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이 수수께끼 같은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끼워 맞추는 일.

아직도 형을 의심하고 있냐고?

그게 아니다.

이건 바로잡음, 그래, 바로잡음에 관한 이야기다.

‘이제… 알겠어요, 형….’

“…….”

‘이제 알 것 같아요, 단장님. 저희가… 저희가 놓치고 있었던 게 뭔지…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단장이 조사한 모든 게 잘못되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직접 눈으로 확인했던 그 자료들은 모두 타당해 보였고, 실제 증거로도 효력이 있을 만큼 치밀했으니까.

결사단이 조사한 자료들에 거짓은 없다.

과장과 악의가 있을지언정, 결사단은 진실을 향해 달려가고자 했다.

단장과 단원들이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이기영이라는 인물 외에 다른 이들을 상정하지 못했다는 것.

언론통제와 독재를 주도하는, 권력을 지닌 인물은 따로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일을 만들고 그를 고통스럽게 한 이는 분명히 그와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다.

그의 가장 가까이에서 그를 속이며 그를 병들게 하고 그를 결사단의 앞으로 내몬 벌레 같은 인간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누구야.’

그와 가장 가까운 이.

‘누구지?’

그와 비슷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

‘생각해.’

이 대륙 내에서 유일하게 이기영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가능성을 떠올리던 중, 가장 먼저 진실에 도달한 것은 무의식중에 흘러나온 목소리였다.

“김….”

그가 바로 대륙을, 형을 컨트롤하고 있는 진짜 악마였다.

“김현성….”

퍼즐이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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