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7
회귀자 사용설명서 627화
대륙의 진짜 어둠(3)
아마 조혜진의 마지막 말이 결정적이지 않았을까.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세요. 그게 그에게 보탬이 되는 일입니다.
본인 나름대로 결론을 찾은 것이다.
바쁜 벌꿀은 슬퍼할 시간도 없다고 예전 높으신 분께서 발언하지 않았던가.
딱 그 짝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자신의 몸이 부셔져라 훈련하고 성장하는 것만이 나에게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모습을 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아!!!
-…….
-제길… 제길….
-…….
-으아아아아!
‘어우, 너무 살벌하게 싸우는 것 같은데.’
어느 정도 깨달았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쪽의 생각보다 더 많은 걸 깨달았나 보다.
저 모습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누가 봐도 과거의 선택에 대한 후회였고, 속죄였다.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러 대는 꼴은 가관이다. 배운다기보다는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것만 같다.
거의 사흘간 저런 상태였다는 걸 생각하면 다른 말이 필요 없다.
그래서 이렇게 린델까지 직접 찾아오지 않았던가.
‘저래서 수업이 되려나 몰라.’
검에 대해 무지한 내가 이렇게 느끼는데 녀석과 마주한 김현성은 오죽할까.
예상했던 것처럼 표정을 찡그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어떻게 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
하지만….
‘생각 외로 잘 봐주고 있는데?’
성실하게 녀석과 마주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최대한 라파엘과 비슷한 수준의 신체 능력으로 상대해 준다는 느낌이기도 했고….
애초에 김현성이 조금이라도 힘을 내보자고 생각했다면 이미 녀석은 어디 한 군데가 부러져 땅바닥을 나뒹굴고 있지 않았을까.
심지어 회색빛을 있는 그대로 끌어다 쓰고 있는 라파엘과는 다르게 김현성은 마력조차 사용하고 있지 않다.
어디까지나 순수한 검술. 기본기에 바탕을 둔 동작으로만 녀석을 상대하고 있다.
‘대단하기는 하네.’
여기서 보면 뭘 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작은 생채기라도 내보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녀석에게 김현성은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검을 부딪쳐 줄 뿐이었다.
심지어 움직임이 제한된 작은 원 안에서 말이다.
결국에는 제풀에 지쳐 녹초가 되어버린 라파엘의 모습.
누가 봐도 탈진한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검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마음 다잡은 게 맞네.’
그렇지 않다면 저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리가 없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하아… 하아….
-굳이 코멘트를 할 가치도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습니다. 그동안 배운 건 잃어버리고 오신 겁니까?
-…….
-그렇게….
-으아아아아아!!
-…….
김현성이 막말을 잇는 도중에 라파엘이 몸을 날려왔지만, 곧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맞은 곳을 부여잡고 끙끙거리는 라파엘이 시야에 비친다.
-근성이 좋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수업은 여기서 끝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더 이상 진행한다고 해도 별다른 진전이 없을 것 같으니… 마무리 훈련은 개인적으로 진행하시고 식사할 준비나 하세요.
-하아… 하아….
‘역시 우리 현성이 세다.’
심지어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은 것 같다.
물론 그 대상이 라파엘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비슷한 조건으로 임했음에도 저런 결과가 나온 것을 보면, 역시 김현성은 김현성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침 훈련을 끝내고 빠른 걸음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녀석의 모습이 여신의 손거울에 비쳤다.
곧바로 이곳으로 달려오지 않을까 싶어 거울을 품에 넣자 타이밍 좋게 똑똑똑 소리가 들려왔다.
“기영 씨.”
“네, 들어오셔도 됩니다.”
김현성이 천천히 방문으로 들어오는 것이 눈에 보인다.
“와 계신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길드에는 오랜만이군요.”
‘너도 여기에서 지내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잖아, 야.’
“아무래도 눈치를 안 볼 수는 없으니까요. 대륙 보호 관리 위원장으로서 특정 길드를 너무 편애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 물론 제가 파란 길드를 완전히 놓아버리지 못했다는 건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세간의 시선이 신경 쓰이기는 합니다.”
“네… 그건 알고 있지만.”
“그나저나 아직 방이 그대로라서 깜짝 놀랐습니다.”
“희영 씨가 그대로 관리해 주신 것 같더군요. 떠나기 전 모습 그대로 말입니다. 기영 씨가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는 김미영 팀장님께서 정리하시기도 했고요.”
주변을 둘러보자 확실히 이전에 있던 내 방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가방 진열대도 그대로였고, 으리으리하게 꾸며진 내부도 그대로다.
심지어 창문이 없는 것까지 그대로이지 않은가.
괜스레 벽 쪽을 바라보자 아직도 그날의 추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딱 한 가지 달라진 것은 진열대 안에 새로운 녀석들이 들어서 있었다는 것.
이쪽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모르는지, 김현성은 차분한 미소를 보내기에 여념이 없다.
방금 라파엘에게 보여줬던 표정과 온도 차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나에게는 이런 모습이 평소의 김현성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내가 길드를 찾아와 기쁜 모양이었다.
‘나쁘지는 않네.’
나 역시 한번 다시 오고 싶었다.
린델은 그나마 내가 고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으니 말이다.
도시 복구 계획에 한 손 걸치고 있었던 만큼 린델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대충 알고 있었지만, 확실히 실제로 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자리 잡은 모습은 생기가 흘러넘친다고 할 만했고, 멋지게 발전한 모습은 시간이 그만큼 흘렀다는 걸 이야기해 주는 것 같았다.
폐허가 된 그 옛날과 비교하면 두 눈을 의심하게 된다.
그리폰을 타고 위에서 바라본 린델의 모습에 얼마나 깜짝 놀랐던가.
‘와보길 잘했네.’
라파엘의 때문에 들렀을 뿐이었지만, 확실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김현성이 괜찮은 반응을 보여주고 있으니, 한꺼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기분이었다.
“와보길 잘한 것 같습니다. 이번이 아니면 당분간 오기 힘들었을 텐데….”
“네, 워낙 바쁘시니… 혜진 씨한테 최근에 피곤해하신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조금 편하게 쉬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조혜진, 얘는 뭐 이렇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
“하하… 괜찮습니다. 체력관리는 하고 있으니까요. 어제도 일을 쉬기도 했고… 지금도 쉬는 거나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그나저나 조금 어떻습니까?”
“네?”
“라파엘 말입니다.”
“…….”
“…….”
“글쎄요.”
“…….”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재능이 크게 뛰어나지는 않지만… 강해지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라… 보통 이런 이들은 성장기대치가 높습니다. 물론 한계가 정해져 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만….”
“…….”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라파엘은 강해질 겁니다. 하지만… 기영 씨가 원하시는 수준까지 성장할지는 회의적입니다.”
“아….”
“당연히 아쉬우시겠지만….”
‘전술 라파엘은 접을 수밖에 없는 건가.’
물론 이건 김현성의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다.
하지만 나 역시 지금의 녀석을 전술로 사용하는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는다.
빠르고 강한 것 이전에 녀석이 내가 요구하는 미션을 완벽하게 수행할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경험이 부족해.”
“네! 그 말씀이 맞습니다.”
커다란 틀을 잡아주는 것은 이쪽이지만, 세세한 미션을 수행하는 건 김현성이다.
내가 A라는 목적지에 도달하라는 지령을 내렸다면 그것을 수행하는 것은 온전히 녀석의 책임이라는 거다.
물론 최대한 세부적인 전장의 상황을 전달해 주기도 하고,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때려박아 주기는 하지만, 언제 어디서 변수가 생길지 모르는 상황.
신체 능력이나 스텟 이전의 이야기라는 거다.
1회 차라는 지옥에서 구르고 구른 김현성 정도가 아니라면, 아마 이쪽의 미션을 수행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너무 빨리 희망을 버리는 건 안 좋기는 한데….’
“일단은 어떤 방향으로, 어느 정도 성장하는지를 보고 결정을 내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 벌써 판단을 내리기에는 시간이 조금 촉박했으니. 일단 식사라도 하시죠, 오래 기다리셨을 텐데. 좋은 음식들을 준비해 놨습니다.”
“아, 네. 오랜만에 길드 내에서 식사한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군요. 옛날 생각도 나고요. 물론 새로 지어진 길드 하우스에서는 그리 오래 지내지는 못했지만, 뭔가 그리운 느낌입니다.”
“그럼 조금 머물다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오늘 하루라도 괜찮다면….”
“글쎄요. 저도 정확히는… 스케줄을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도 변한 린델에 조금 더 오래 있고 싶지만, 또 현장에서 어떤 사고가 날지도 모르니….”
“네, 그랬었죠….”
‘현성이 기분 다운됐네.’
하루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오랜만에 김미영 팀장이나 선희영을 만나 할 이야기도 있었고….
특히나 김현성이 저런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김현성 때문이 아니라 라파엘 때문에 생긴 일정이었다.
얼굴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고통을 잊기 위해 노력하는 녀석을 위해서 말이다.
‘내 얼굴을 보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다, 이건데… 죄책감 한 스푼 더 드셔야죠.’
아무리 그래도 3일 동안 미친놈처럼 훈련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똑똑똑 하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
‘라파엘 왔나 보네.’
혹시나 얼굴을 보는 걸 피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직접 찾아온 것을 보면 그건 아니었나 보다.
우물쭈물하는 목소리가 밖에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들어오세요.”
그렇게 말하니 천천히 문을 열린다. 기절 사태 이후로 처음 본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어색해지려고 한다.
‘별거 아니지, 뭐….’
당연하지만 라파엘이 느끼고 있을 감정에 비하면 별 게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다.
애초에 이쪽으로 도망치듯 달려온 이유 역시, 내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서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어떤 얼굴로 나를 마주 봐야 할지, 처음 만났을 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고, 또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음이 분명하리라.
하지만 실제로 본 표정은 이쪽의 예상과는 다르다.
굉장히 다급해 보였고 무엇보다 이쪽을 걱정하는 듯한 느낌이 강했다.
‘뭐, 이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지 때문에 내가 이곳으로 온 줄은 알고 있는 모양이다.
오랜만에 본 내 모습이 생각보다 멀쩡하다고 느꼈는지, 커다랗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나 역시 어떻게 반응하는 게 좋을지 조금 고민하기는 했지만, 이럴 때 가장 알맞은 답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활짝 웃는 게 좋지.’
평소대로.
평소대로 행동하는 게 더 효과적이다.
단언컨대 이 미소는 녀석의 양심을 사정없이 찌르고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저… 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지 않은가.
“저, 저… 그러니까, 그러니까….”
“괜찮습니다, 라파엘 님.”
“네… 네, 형.”
“전부 다… 괜찮습니다.”
“흐윽, 흐으으윽….”
울음을 꽉 참는 듯한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여는 녀석.
말없이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 주자 고개를 땅에 떨군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모습은 가관.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아침 드라마 같은 상황에 김현성이 다소 의아해했지만….
‘나중에 적당히 변명해 주면 되겠지, 뭐.’
그렇게 한참 시간이 지나자, 녀석은 겨우 감정을 추스른 것 같았다.
조금 이상했던 것은 자꾸만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것.
좀 더 주변을 바라볼 여유가 생긴 이후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방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가구들이 비싼 거라서 그래? 방이 조금 넓지? 괜찮아, 형이 다 설명해 줄 수 있어.’
평소였다면 움찔했겠지만 이미 함락된 녀석이지 않은가.
불안한 듯 손으로 내 소매를 꼭 잡아당기는 녀석의 손짓만 봐도 하나하나 일일이 반응할 필요가 없다.
“형, 여, 여긴….”
당당하게 이야기하자. 진열대가 신경 쓰이기는 하는데… 당당해서 나쁠 건 없다.
“제 방이었던 곳입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의 모습.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놈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