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9
회귀자 사용설명서 629화
대륙의 진짜 어둠(5)
여러 가지로 할 말이 많았지만, 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김현성이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 자체가 익숙하지 않다.
파란 길드가 개발도상국 상태에 있을 때, 여러 권력자에게 녀석을 소개한 적이야 있었지만, 그것과는 경우가 다르지 않은가.
적당히 술자리 좀 가져주고 비위 맞춰주며 한번 만나보라고 이야기했던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 조금 더 함축적인 느낌의 질문이었다.
라파엘이 지금 묻는 것은 인간 김현성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것이다. 잠깐 고민했지만 나쁘게 대답한 것 같지는 않았다.
1회 차의 영향이 없는 건 아닌지, 간혹 차가운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정이 많고 따뜻함이 내재해 있다.
김현성에게 들었던 1회 차 스토리만 들어봐도 녀석이 어떤 성격인지 금방 답이 나온다.
22살 김현성이 진짜 녀석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나이를 먹고 여러 가지 사건을 겪으며 많이 변하기는 했지만, 인간의 진짜 본질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
강해졌음에도 여전히 겁이 많고,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기며, 주어진 일에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멍청할 정도로 요령이 없고, 자신이 믿는 걸 향해 발걸음을 내딛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만나서 다행이라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 것 역시 두말할 필요도 없는 진심, 내가 말하면서도 훈훈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이고, 우리 현성이. 너 없었으면 진짜 어떻게 할 뻔했니….’
튜토리얼 던전 때 녀석을 만나지 못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진다. 장담하건대, 절대로 지금 같은 상황을 만들지는 못했으리라.
대륙에 온 이래로 가장 잘한 일이 있다면 김현성을 발견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눈앞에 놓인 호화로운 만찬을 보자, 그동안 옥이야 금이야 생각하며 키워온 관계에 대한 보답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라파엘에게 눈치가 보이긴 했지만,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꾸만 피식피식 미소가 튀어나오는 상황, 솔직히 표정을 숨기기가 어려웠다.
‘내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너는 모를 거다, 진짜….’
온몸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뒤통수를 맞은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얼어붙은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 별별 짓까지 다 했던 과거.
의심을 사라지게 하고 고백 한 번을 받기 위해 쏟았던 그 노력과 세월, 열과 성을 다했던 내조가 드디어 보답받은 것이다.
만약 중간에 한 번 삐끗하기라도 했다면, 지금 같은 관계를 구축하지 못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라파엘 님께서도 이해할 수 있으실 겁니다. 네, 분명히요.”
‘쟤가 좀 낯을 가려. 그래도 네가 좀 사근사근히 다가가면 분명히 알 수 있을 거야. 솔직히 나 정도로 가까워지는 건 무리기는 한데. 아니, 아예 불가능하기는 한데, 그래도 기왕이면 친하게 지내야지. 그게 너한테도 더 도움이 될 거라니까. 얘가 원래 막 그렇게 먼저 다가오는 타입은 아니에요. 조금만 적극적으로 달라붙으면 그래도 달라지기는 달라져. 본전은 찾을 수 있을걸.’
“저는….”
“네?”
“저는 잘 모르겠어요. 파란 길드 마스터가… 어떤 사람인지. 정말로 제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맞는지.”
‘네가 많이 시달리기는 시달렸나 보네.’
“훈련할 때는 조금 예민해지기도 해서, 종종 너무 차가운 사람으로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물론 제게도 그런 적이 있었고요. 하지만 전부 라파엘 님을 위해서 그런 거랍니다. 아마 그 누구보다도 현성 씨가 라파엘 님이 강해지는 걸 원하고 있을 거예요.”
네가 강해지면 강해질 질수록 1회차의 숙원을 푸는 데 도움이 되거든.
불안한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해. 나도 처음에는 그랬지. 오죽했으면 김현성한테 목이 댕강 잘려 나갈까 걱정까지 했겠어.
“어쩌면….”
“네?”
“어쩌면 김현성은 혀, 형이… 생각하는 그런….”
“…….”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이제 몸은, 괜찮으신 거죠?”
“네, 물론입니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잠깐 피곤해서 쓰러졌을 뿐입니다.”
“피곤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건 조혜진 님에게 이미 들었어요.”
“하하….”
“정말 괜찮으신 거겠죠?”
“종종 일어나는 일이니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뭔가 엄청난 일에 휘말린 것도 아니고, 생각하시는 것만큼 상태가 심각한 것도 아닙니다. 가끔 깜빡깜빡할 뿐이니, 그 정도로만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저는 정말로 형이 그런 상황에 놓여 있는 줄은 꿈에도 몰라서….”
‘이 이야기는 지금 하기 싫은데….’
아무리 김현성이 바깥에 있다고 한들, 말이 어떻게 새어 나갈지 누가 알겠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질 때부터 마력을 사용해 음성이 빠져나가는 걸 막기는 했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의심할 수 있다.
“증상이 조금 더 심해진다면 걱정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현재로서는 심각하게 생각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너무 죄송하더군요. 너무 깜짝 놀라게 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정말로 당황하셨다는 이야기를 박리안 님에게 전해 들어서….”
“아니요, 그건….”
“덕분에 예약되어 있던 일정도 전부 취소됐고, 약속도 엉망이 된 것 같아서 계속 마음이 쓰였었습니다. 괜한 심려를 끼쳐드리기도 했고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는….”
“정말로 별일 아닙니다. 저는 건강해요. 저보다는 라파엘 님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데, 어떻게… 걱정하시던 일은 전부 극복하셨습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통 집중을 못하시는 것 같았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더군요. 지나치듯 본 것뿐이었지만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 물어본 것이다.
녀석이 더 이상 두려워하는 것은 없다.
빛기영이 지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운명에 맞서리라 결심하고 다짐했다.
당연히 긍정적인 대답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에 나온 대사는 가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렇게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몸을 움직이고 있을 뿐이지만….”
“…….”
“도망치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네?”
“조금 뜬금없지만,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이 위기가 지나가는 걸 기다리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러니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건 어떠신가요?”
‘너, 이 새끼. 뭔 소리 하는 거야. 내가 이걸 버리고 왜 도망쳐. 아직도 정신 못 차린 건 아니지?’
딱 잘라서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 선택지는 없습니다.”
당연히 그런 선택지는 없다.
물론 전황이 밀리고 대륙 전체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기 직전이라면 내 사람들 모두 챙겨 빤스런을 하겠지만, 저항할 수 있는 만큼은 저항하는 것이 옳다.
혹시 뭐 다른 생각을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는 했지만, 조혜진처럼 내 기억상실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는 모양이다.
혹시나 더 무리하다가 상태가 심각해지지는 않을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 얼굴은 겁먹은 얼굴이 아니다. 오히려 저항하고자 하는 사람의 얼굴이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혼란스러운 게 당연하고, 두려운 게 당연합니다. 저 역시 그랬으니까요. 무서웠고, 두려웠습니다. 평범하게 지내고 계셨던 라파엘 님께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셨을지, 또 얼마나 고민했을지 전부 알 수 있습니다. 여러 문제로 혼란스러워 하시는 것까지요.”
“…….”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라파엘 님께서 생각하시는 일은 죽어도 벌어지지 않을 거고, 대륙은 이 위기를 무사히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요, 분명히요.”
“그럼 형은요? 형은 어떻게 되는 건데요.”
“저 역시 마찬가지겠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이곳으로 돌아와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겁니다.”
“…….”
“불안하실 겁니다. 정말로 자신이 잘할 수 있을지, 주어진 사명을 다 할 수 있을지, 예상치 못한 사고에 대해 고민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좀 더 자신을 믿으셔도 돼요.”
“…….”
“라파엘 님은 강한 사람입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고, 회색빛의 성검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게 분명해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저 성검이 라파엘 님을 선택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성검이 나를… 선택한 이유….”
“네, 베니고어 님께서 라파엘 님을 바라보고 계시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겁니다, 분명히요.”
혹시 근심이나 걱정을 안고 있다면 전부 털어버리고 일어나라는 의도로 말하자,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이 눈에 보였다.
“고마워요, 형.”
“천만입니다.”
“제가 너무 어린애 같이 굴었죠.”
“아니요. 누구나 한 번쯤은 할 수 있는 생각입니다.”
“이제 다른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래? 벌써 그 정도야?’
“제가 반드시….”
“…….”
“반드시, 형을 지킬 거예요, 반드시.”
‘정신 제대로 차렸네.’
지켜야 할 대상이 대륙이 아니라 이쪽이 된 게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문제는 없다.
나를 지키는 것이 곧 대륙을 지키는 게 아니었던가.
최소한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다. 심지어 이상할 정도로 기이한 열망이 들어가 있다.
약발이 좋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이 정도로 효과가 극적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게 사실이다.
자신도 모르게 포근한 미소가 발사되는 게 당연했다.
“네, 믿고 있겠습니다, 라파엘 님.”
‘이 새끼는 끝났어.’
확실히 끝났다고 장담할 수 있다. 이제는 조금 더 천사 쪽에 전념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해볼 정도였다.
물론 아예 끝을 놓는 건 지양해야겠지만, 예전처럼 보물 다루듯 다룰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며칠에 한 번 정도만 들러서 컨디션 조절을 해주거나 무너지지 않게 멘탈을 잡아주는 정도로 끝내는 게 가장 좋지 않을까.
물론 플레이어로서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 역시 가장 필요한 부분 중에 하나다.
‘전술 라파엘….’
차마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그 이름, 전술 라파엘.
솔직히 회의적이었지만, 단 몇 시간이라도 운용할 수 있다면 커다란 이득을 가져올 수 있다.
김현성에게 주어지는 부담도 줄이고, 김현성이 쉴 수 있는 시간까지 벌어다 줄 수 있다.
어쨌든 녀석이 강해질 것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지금까지의 성장 속도는 아쉬웠지만, 이 사흘간의 성장 속도를 생각해 보면 비정상적으로 빠르다는 말로도 부족하지 않은가.
이미 일반적인 모험가의 영역을 벗어났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부족한 것은 경험.
바로 경험이다.
‘이 경험치라는 게 꼭 전술 라파엘을 위해서 필요한 게 아니기도 하고….’
하지만 녀석에게 필요한 게 경험치라는 건 어떻게 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이후 녀석을 어떻게 사용하든 간에 실전 경험은 반드시 채워줘야 할 부분이었다.
적당히 판단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인 것은 순식간.
“이럴 게 아니라, 슬슬 던전에 가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던전 말이에요?”
“네, 던전. 지금까지도 잘하고 계시지만 아무래도 경험적인 측면에서 부족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어서… 물론 라파엘 님께서는 잘해주고 계시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장담하건대 분명히 라파엘 님께 도움이 될 겁니다.”
“형도 함께 가시는 건가요?”
“글쎄요, 시간이 없기는 하지만….”
‘몇 번 다녀오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사실 내가 함께 가는 게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전술적인 부분에서 지시해 주면 경험치가 더 빨리 쌓일 테니까.
녀석의 표정이 조금 좋아지는 것을 보니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글쎄요. 매번 따라가지는 못하겠지만….”
“그럼 갈게요, 가고 싶어요.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해보고 싶어요.”
일단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지금보다 조금 더 강해진 이후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