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6
회귀자 사용설명서 636화
일주일(1)
‘이거 일부러 늦게 오고 있는 건 아니겠지.’
“미치겠네, 정말. 안 그래도 바쁜데, 자기만 꿀 빨고 있겠다? 하, 참….”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자 산처럼 쌓인 서류 더미와 피로 회복제들이 시야에 비쳤다.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는 것도 이상한 상황은 아니다.
아무리 유능한 행정 요원들이 즐비해 있다고 해도, 보안을 유지해 처리해야 할 사안이 많은 만큼, 그 인간의 공백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5현장 쪽으로 출발해야 하는 촉매들과 재료들을 보내는 것부터가 문제, 보안유지를 위해 유통과정을 숨기다 보니 처리할 사안이 한둘이 아니었다.
어디 그것뿐이랴. 기존에 이기영이 맡고 있던 업무를 처리하는 것까지, 과장 하나 보태지 않고 일이 두 배로 늘어난 것만 같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2.5배 정도 늘어난 것 같다.
‘오늘도 밤새야 되겠네.’
“제기랄, 두고 봐. 이건 보상받을 거야. 무조건 보상받을 거라고.”
뭘 요구해야 적절할지 리스트를 적고 싶은 심정.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조차 없다.
이번에는 길어질 거라고 듣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더 길어지고 있었으니까.
여신의 손거울이 갑작스럽게 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언니, 잠깐 와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최대한 빨리요. 급한 일이에요.]
“뭐야, 연수?”
[정말로 급한 일이에요. 좌표 보내놨으니까. 그리폰 타고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빨리, 아무한테도 알리지 말고요. 장난치는 게 아니에요. 아마 오시면 저한테 감사하게 될 걸요.]
[뭔데?]
[직접 와서 보셔야 할 것 같아요.]
검은 백조에서 일하던 시절부터 무척 가깝게 지냈던 동생, 하연수.
요즘도 매일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기에 메시지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점점 찝찝해지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는 비상연락망이 울렸다는 것이 바로 그 원인이라 할 수 있으리라.
이 연락망이 울렸다는 건 사건이 터졌다는 것과 진배없다. 안 그래도 바쁜 상황에 또 하나의 일이 터진 것이다.
손거울에 찍힌 좌표는 린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숲.
[지금 바로 오셔야 해요. 정말로 급한 일이니까.]
“알았다고, 알았어. 제기랄.”
[린델에서 만나면 되겠네.]
[아니요. 린델로는 못 들어가요. 메시지로 연락드리기도 조금 찝찝한 사안이고요.]
“…….”
‘얘가 혹시 나 담그려고 설계 치고 있는 거 아니야?’
의심이 생기기는 한다. 이미 내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본래 인간관계라는 게 별것 아닌 이익 앞에서도 쉽게 무너지는 법 아니겠는가.
‘아니야,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지.’
조금 고민하기는 했지만 가능성 자체는 완전히 아웃, 자신이 가지는 파급력을 알 텐데 그런 무모할 짓거리를 할 리가 없다.
성격상 의심이 많다 보니 호위는 평소보다 많이 데려가겠지만….
‘언니는 너를 믿어, 연수야. 그렇지? 우리 사이 여기서 끝낼 정도는 아니었잖아.’
곧바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문을 박차고 나가자. 익숙한 얼굴들이 시야에 비쳤다.
“언니, 나가시려고요?”
“응, 그리폰 대기시켜 놔. 지금 나갈 테니까.”
“어디로 가세요? 혹시 위원장님 마중 나가시는 거면, 평소대로 준비할까요?”
“아냐, 그런 거 아니니까. 걸칠 것 하나만 마련해 주면 돼. 따로 준비 안 해도 되고. 애들 지금 쉬는 중이지?”
“네.”
“쓸 만한 애들 3명, 입 무거운 얘들로.”
“네.”
“아, 그리고 비밀리에 나가는 거니까. 투명 마법 사용 가능한 마법사도 하나.”
“네, 준비해 놓을게요.”
이륙장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중에도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복잡한 생각이 일었다.
물론 대단한 생각은 아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터진 건지, 오늘은 밤새는 게 완전히 확정됐구나.’ 하는 수준의 생각.
하지만 하연수가 찍은 좌표에 실제로 도달한 순간, 저도 모르게 쌍욕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시야에 비친 것은 최근에 자주 마주쳤던 얼굴이었다.
자신과 잘 맞지 않은 것 같아 크게 왕래가 없었지만, 최근에 어쩔 수 없이 자주 마주쳤던 인물.
그 인간쓰레기가 기억상실 기믹을 밀어붙이면서 얼굴을 익혔던 여자였다.
명실상부 파란의 삼인자이자, 길드마스터 김현성의 신임을 받고 있는 실력자.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평소에 단정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머리는 풀어 헤쳐져 있었고, 길바닥에서 한바탕 뒹군 것 같은 모습이 눈에 띈다.
마력은 완전히 바닥나 있는 상태였고, 체력마저 바닥나 있다.
정신을 잃은 모습을 보니 문제가 생기긴 한 모양, 괜스레 이마를 턱하고 짚을 수밖에 없었다.
가장 최악이라고 생각한 것 중 하나가 현실이 됐다. 던전에서 무언가 일이 터진 것이다.
입술을 꽉 깨물어 봤지만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는 변함이 없다.
약하게 한숨을 내뱉었을 때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말이 맞죠? 저한테 감사할 거라고 했잖아요.”
“어떻게 된 거야? 아니, 언제 발견한 거야. 흔적 읽어봤어?”
“네, 안 그래도 물어보실 것 같아서, 대충… 아직 정확하지는 않지만 던전에서부터 계속해서 뛰어온 거라고 결론을 내렸어요.”
“여왕의 무덤이지? 거리가 꽤 될 텐데, 뛰어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잖아.”
“그러니까 이 정도 되는 모험가가 체력이고 나발이고 싹 다 털렸죠. 연락책도 없고, 창도, 가방도 가지고 있지 않았네요. 도망친 것 같지는 않고. 목적지가 린델인 걸 보면 뭔가 알리려고 했을 가능성이 커요. 던전 공략 실패는 아닌 것 같고, 안에서 문제가 있었다고 추측돼요. 아, 참고로 이렇게 정신을 잃은 원인은 체력과 마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저기 보이는 곳에서 굴러떨어진 거고요. 차라리 그게 이 여자한테는 잘된 일일 수도 있겠네요.”
“왜.”
“왜긴 왜겠어요. 이 상태로 린델까지 뛰어갔으면 죽었을지도 몰라요. 심지어 기어가려다가 정신을 잃은 것 같은데… 행운이었죠, 뭐.”
“너희가 최초 목격자야?”
“아니요.”
“최초 목격자들은… 그냥 린델로 들어가게 내버려 뒀어?”
“일단 입은 막아뒀어요.”
“걔네 확실하게 처리하고, 얘 좀 깨워봐.”
“언니는… 수고했다는 말도 안 해줘요?”
“그럴 리가 있나. 이리 와봐, 연수야. 꽉 껴안아 줄 테니까. 정말로 큰일 한 거야. 네가 린델을 구한 거라고.”
“저한테 빚 하나 진 거예요. 잊지 마세요.”
“이자까지 쳐줄 테니까 걱정 안 해도 돼. 피로 회복 포션 먹이고, 나머지는 전부 나가 있어. 연수, 너… 아니다. 너는 남아 있어도 되겠네.”
“네, 아, 슬슬 일어날 거예요.”
천천히 다가가 봤지만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생각보다 고운 얼굴이라고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뺨을 툭툭 건드린 순간, 번쩍 눈을 뜨는 모습이 보였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몸의 균형이 무너진 뒤, 왼손으로는 자신의 소매를 잡아당기고 오른손으로는 나뭇가지를 쥐고 있다.
당연하지만 몸은 반응하지 못한다.
자신의 목을 향해 내리 꽂혀오는 날카로운 나뭇가지를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옆에 있던 하연수가 그녀의 팔목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 죽을 뻔했네.”
“위험했네요, 언니.”
“뭐야, 아직 깨어난 거 아니야?”
“슬슬 일어날 거예요. 방금 전은 몸이 기억하고 있는 반사적인 행동 같아 보이는데, 소문 그대로네요. 나중에 식사나 같이하자고 해봐야지.”
“아, 으….”
“저기요, 저 기억나요?”
“누구… 여기는….”
“저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이지혜예요. 당신에 부길드마스터랑 그렇고 그런 사이. 우리 얼굴 본 적 있죠? 같이 일도 몇 번 했었고. 연수야, 물 좀 뿌려봐.”
“…….”
“저 알아볼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그만 좀 잡아당겨요. 소매 다 뜯어지겠네.”
“부… 길드마스터… 납치, 라파엘….”
‘엿 됐네.’
3가지의 키워드가 귓가에 들어온 순간 일이 어떻게 됐는지 곧바로 이해된다.
대충 비슷한 상황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왜 걔가 오빠를 납치해?’
의문이 생겨났다.
“일주일… 후에… 길드마스터… 던전으로… 혼자… 전해 드려야….”
“네?”
“전해 드려야….”
‘아니, 미친… 이게 무슨 정신 나간 인질극이야.’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혹시 하는 생각에 잠깐이나마 심장이 덜컹거렸지만, 이상하게도 걱정이 되지 않는다.
그 둠기영 사태 역시 거짓부렁이었으니 오죽할까.
잠시 찝찝한 생각이 머릿속에 감돌았지만, 적어도 목숨이 위험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만약 정말로 그런 상황이었다면 대륙을 버리는 선택을 해서라도 그 상황에서 빠져나갔으리라.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평온한 대륙이 이기영이 안전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문제는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냐는 것이다.
‘라파엘… 라파엘.’
“언니, 이거 난리 나는 거 아니에요?”
“호들갑 떨 필요 없어. 최대한 조용하게 해결할 거야. 조용하게.”
“왜요, 혼, 혼란스러워질까 봐 그런 거예요? 확실히 위원장님이 납치됐다는 소리가 나오면….”
‘아냐, 그것 때문이 아니야.’
물론 그것 역시 걱정되기는 한다.
언론에서는 앞다투어 위원장의 납치 소식을 전할 것이고 또 한 번 대륙은 통탄에 빠져 기도회를 드리지 않을까.
바젤 추기경은 당장 신성 기사단을 파견하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교국의 지도자 오스칼 역시 국가적 위기를 선포할 것이 분명하리라.
역병 드래곤은 또 한 번 크롸롸롸 하며 울부짖겠지.
원활하게 잘 돌아가던 시스템이 정전이 난 것처럼 일순간 멈추는 것도 이미 정해진 이야기.
굳이 보지 않아도 예상이 간다. 지금까지 그래 왔으니까.
하지만 가장 걱정되는 것은 역시나 파란 길드의 반응이다. 그중에서도 항상 미친 짓을 해왔던 미친년이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정하얀… 걔가 알면 안 돼, 절대로.’
만약 오빠가 납치됐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일반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미친 짓을 저지를지도 모른다.
그 누구보다 이기영이 그런 상황을 바라지 않으리라.
지금까지 해온 화려한 전적만 둘러봐도 대충 각이 나오지 않는가.
“지금 곧바로 파란 길드로 향할 거야. 이 여자한테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물어보고, 문자 보내놔.”
“어, 어떻게 하시게요.”
“뭘 어떻게 해. 김현성한테 알려야지.”
“괜찮을까요?”
“아마도. 무조건 설득해야지. 생각보다 이성적인 사람이야. 일단 그놈들이 원하는 건 김현성이니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파란 길드마스터에게 알리기는 해야 돼. 이후의 대응책은 같이 생각해 보면 돼. 필요할 경우 협상할 수도 있고. 원하는 게 있는 모양인데… 이야기를 한번 해줘야지.”
오늘 참 많이도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자, 얼마 지나지 않아 파란 길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중간에 연수가 보낸 문자를 통해 정확히 어떤 일이 터진 건지 자세히 확인하고, 마치 프레젠테이션에 들어가기 직전처럼 김현성을 구슬릴 말들을 생각해 놓는다.
조금 불안한 감도 있었지만, 자신감은 있다. 정하얀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얘는 말이 통하기는 하니까.
문을 두드리고 곧바로 안쪽으로 들어가자 여전히 차가워 보이는 얼굴이 눈에 비친다.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조금은 저기압인 것 같은 느낌.
마침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찾아왔다며 한숨을 내쉬고, 대뜸 본론부터 입을 열었을 때였다.
“오랜만이네요, 파란 길드마스터.”
“용건이 뭡니까.”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본론부터 말씀드릴게요. 아무래도 기영 씨가 납치당한 것 같아요.”
“…….”
“검은 백조에서, 던전에서 나와 린델로 향하던 조혜진 씨를 확보했어요. 던전 안에서 기영 씨가 라파엘 파티에게 납치… 를 그리고… 원하는 건 아마… 일주일 후에….”
“…….”
“오지 않는다면… 오, 오빠를… 죽이겠다고… 그러니까, 일주일 후에… 파란 길드마스터가… 던전으로….”
“…….”
‘뭐야….’
자신이 멍청해진 것이 아니다. 저도 모르게 턱이 덜덜 떨려오고, 다리가 풀려온다.
풀썩 주저앉고 싶은 심정을 최대한 억누르고 있는 상황.
정신은 멀쩡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온몸에서는 소름이 돋아나고 숨을 쉬기가 쉽지가 않다.
‘미친, 시발… 미친, 뭐야. 이게 뭐야.’
최대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데도 저 모양, 일반인에 가까운 자신이 바라보기에도 살의가 몸을 삐져나오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
“…….”
‘아, 이거 큰일 났다. 망했다, 망했네.’
애초에 협상에 여지는 없었다.
딱딱하게 굳은 것으로 모자라 김현성의 얼굴을 목도한 순간 그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방문을 나가는 모습은 뭐라고 형용하기 힘들 정도다.
팔이라도 붙잡고 대책을 논의해야 하지 않겠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건 이미 내 손을 떠난 일이다.
“일이나 하러 가자… 지들 일이니 지들끼리 알아서 해결하겠지.”
하루에 두 번이나 죽을 뻔한 것도 흔치 않은 일 아니던가.
일진이 좋지 않으니, 방으로 들어가 끝마치지 못한 일이나 하고 있는 게 좋지 않을까.
어차피 지금쯤 이기영도….
‘고기나 뜯고 있겠지, 뭐.’
100% 확신할 수 있었다.
* * *
“입에서 살살 녹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