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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638화 (629/1,590)

# 638

회귀자 사용설명서 638화

일주일(3)

현 시각 가장 당황한 사람은 나도 아니고 김현성도 아니고 조혜진도 아닌 엘룬일 것이다.

잠깐 그런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이제는 이쪽과 상관없는 이야기.

저쪽의 문제는 저쪽이 알아서, 이쪽의 문제는 이쪽이 알아서 해결하는 것이 옳다.

망원경이 유출됐다는 게 밝혀져 밑으로 꺼지는 상황이 오는 것은 아닌가 걱정되기는 했지만, 엘룬 쓰레기를 희생양으로 내몬다면 원금 정도는 회수할 수 있지 않을까.

베니고어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이제는 같은 배를 탄 것 같은 느낌.

무능함의 끝을 달리고 있었던 베니고어 역시 ‘올바른 판단’이라는 걸 하게 됐다는 생각에 괜스레 뿌듯해지기 시작했다.

‘아니지. 이럴 게 아니라 상황부터 살펴보자.’

바깥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궁금해 미칠 것 같았으니까.

급하게 특성을 발동시키자 시야가 확 변한 것 같은 느낌이다. 제법 생소한 감각이었다.

‘효과 한번 좋네.’

마치 한 모니터에 2가지의 영상을 동시에 켜놓은 것 같은 느낌이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하리라.

왼쪽 눈에 보이는 것과 오른쪽 눈에 보이는 게 다르다.

잠깐 두통이 와서 핑 도는 머리를 붙잡기는 했지만 금방 익숙해졌다. 하지만 눈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은 그대로.

본래부터 마음의 눈을 가지고 있던 내가 이 정도라면… 일반인들이 사용하라고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다.

평범한 인간은 이 능력의 출력을 감당할 수 없다.

카메라를 이동시키는 것 같은 느낌으로 머리를 굴리자, 시야에 펼쳐진 것은 평소와 다름없는 린델.

가장 걱정하던 최악의 상황은 넘겼다는 생각에 속을 쓸어 넘길 수밖에 없었다.

린델은 평화롭다. 조혜진이 여기저기 떠벌리지 않은 것이다.

여전히 활기가 넘쳤고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는 린델 주민들의 모습은 괜스레 웃음이 나오게 할 정도였다.

‘내가 믿었다, 혜진아. 조용히 처리해 줄 거라고 믿었다구.’

앞서 말했던 그대로 가장 최악은 넘겼다. 수도 쪽도 마찬가지고, 현장 쪽도 마찬가지.

그저 ‘이번 던전행은 꽤 오래 걸리는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근데 얘는 어딨어. 얘, 무사한 거 맞지? 혹시 아직 도착 못 한 건 아닐 거고….’

던전에서 린델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아직 도착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는 것이 옳다.

조혜진이 아무리 괴물의 반열에 오른 강자라지만, 이 엄청난 거리를 잠시도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간에 한 번 정도는 마력과 체력을 보충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던 것도 잠시,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조혜진이 신경 쓰여 이곳저곳을 살펴봤지만, 아직도 보이지 않는 것이 문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린델 주변을 살펴봤지만, 여전히 그녀의 종적을 찾을 수 없는 상황.

파란 길드 내에도 보이지 않는다.

엘레나와 유아영은 잠깐 외출 중인 것 같았고, 선희영 역시 평소와 다르지 않게 업무에 집중하고 있다.

눈에 띄는 것은 행정업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을 내린 박기리 삼남매 정도밖에 없다.

한가하게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모습은 너무나도 평화롭게 느껴진다.

-느낌이 이상한데… 아무래도 형님한테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왜 그러십니까?

-아무래도 형님이 도움을 청하는 것 같은, 그런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가끔 이렇게 있을 때면 불쑥불쑥 형님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느껴진다니까.

-멍청한 소리.

-멍청한 소리라니, 형님이랑 나는 몸이 떨어져 있어도 마음이 연결되어 있다고 몇 번이나….

-말도 안 돼.

-하하하하, 덕구 씨가 조금 피곤하신가 봅니다.

-거, 정말이라니까. 갑자기 이런 느낌이 드는 걸 보니 형님이 뭔가 위험에 빠진 게 확실하다니까. 던전에서 너무 오래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지금도 구해달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요.

‘이 새끼 뭐야, 그러지 마.’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저 돼지를 쳐다보고 있다가는 본전도 건지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애초 녀석이 이 사건에 대해 듣지 못했다는 걸 확인한 것만으로도 커다란 성과다.

물론 조혜진이 어디 있는지 제대로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마음이 편안해진다.

‘적어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지는 않을 테니까….’

본격적으로 조혜진을 찾아봤지만, 고개를 돌린 곳은 정하얀과 한소라가 거주하고 있는 5현장이다.

온 김에 한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곧바로 지하로 들어가자,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하나의 인영이 시야에 비쳤다.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놀리고 있는 것은 당연히 한소라.

당연하지만 어째서 그녀가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안다.

근처에서 여신의 손거울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정하얀의 모습이 비쳤으니까.

-늦, 늦, 늦네….

-특… 정 던전은… 특정 던전은 마력 전파가… 닿지 않는 곳도 있으니까요. 분명히… 분명히 부길드마스터도 정하얀 님을 신경 쓰고 계실 거예요, 분명히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연락을 주시지 못하고 있을 뿐이겠죠….

-역시… 그, 그, 그럴까….

-네….

-같이, 같이 간… 사제, 라파엘 파티의… 예쁘던데….

-아아, 그 기적의 사제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요? 예쁘기는요. 그냥 평범하던데요? 그리고 절대로 부길드마스터 취향은 아니에요, 절대로. 저번에도 작업 중에… 자기 이상형은 정하얀 님이라고 말씀하셨는걸요. 부끄럽다고 말씀드리지 말라고 했는데….

-정, 정말?

당연하지만 저런 말을 한 기억은 없다. 말 그대로 생과 사를 오가는 것 같은 처세술.

어떻게든 정하얀을 진정시키려는 한소라의 모습이 짠하기는 했지만, 그 모습을 보니 그녀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야말로 살아 움직이는 분노 측정기가 아닌가. 심지어 정하얀의 분노까지 컨트롤해 주고 있다.

평소였다면 대노로 돌입할 상황이었지만 현재의 정하얀은 많이 쳐줘야 중노로 진입한 상태.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 것 말고는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기분 좋은 소식에 살포시 미소를 머금고 있지 않은가.

평화로운 린델만큼 이곳 역시 평화롭다.

갑작스럽게 내 방 문을 열고 들어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지만, 굳이 뭘 하러 들어갔는지 확인하고 싶지는 않다.

한소라도 최대한 못 본 척하는 표정이었고.

일단 정하얀이 아직 터지지 않았다는 걸 알았으니, 안심할 수 있었다. 당연하지만 이 납치극을 아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혜진이 얘, 오기는 한 건가?’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도착했다고 생각해도 되는 거지?’

요란하게 떠들 생각이 아니라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

눈에 띄지 않는 게 더 편할 거라고 판단한 것이 아닐까.

파란 길드에도 알리지 않을 생각이라면 길드와 연관된 장소에 없는 게 당연하다.

아마 김현성이 조혜진을 따로 챙기지 않았을까.

여기까지 뛰어왔다고 가정한다면 체력이고 마력이고 전부 다 바닥났을 테니까.

“그렇게까지 나쁜 상황은 아니야.”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잘 수습된 상태다. 김현성이 정하얀에게 따로 연락하지 않은 것만 봐도 안심할 수 있는 상황.

정말로 흥분한 상황이었다면 텔레포트를 이용해 던전 앞까지 왔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정하얀과 한소라는 평소와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다.

둠기영 사태처럼 무작정 리무르아의 둥지로 텔레포트 하는 선택지를 고르지는 않은 것이다.

어딘가에서 이번 협상을 준비하고 있다고 판단되었다.

그래야만 했다.

‘뭐, 어디 비밀장소에서 김미영 팀장이랑 같이 회의라도 하고 있는 거야?’

애써 행복 회로를 돌리고 있었지만 김현성 역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

있을 곳을 전부 다 뒤져봤지만, 녀석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야외 훈련장이나 개인 훈련실에도 없고, 식당이나 집무실, 침실에도 식당에도 없다.

‘혜진이랑 같이 있어? 회의라도 하고 있는 거야? 뭐야 너희, 나 몰래 비밀 회의실 같은 거 만든 건 아니지? 그렇지?’

점점 더 초조해지는 게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이런 마음을 대변하듯 머릿속으로는 계속해서 하기 싫은 상상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진짜로 화난 거야? 이성 잃고 그런 건… 아니겠지.’

정하얀에게 연락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못 한 거면 어떻게 해?’

텔레포트조차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화가 나 있다고 가정한다면 어떨까.

아예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할 정도로 화가 나 있다고 가정한다면….

던전 앞으로 쉽게 이동할 방법마저 생각지 못할 정도로 이성을 잃었다면 어떨까.

‘시발….’

솔직히 기쁘기는 하다. 그만큼 나를 걱정한다는 말이었으니까.

마치 마왕성에 갇힌 공주를 구하러 오는 싸구려 클리셰 같지 않은가.

하지만 녀석이 상대해야 하는 게 마왕이 아닌 용사라는 걸 생각해 보면 썩 달갑게 느껴지지 않는다.

잠시 여유를 찾은 시점이었지만 점점 똥줄이 탄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야를 위로 올리자 린델과 던전을 잇는 길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달리고 있는 인영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

‘개씨발….’

긴가민가했지만 시야에 비치는 인물은 틀림없이 김현성이다.

최소한 그리폰을 타고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럴 겨를마저 없었던 것 같다.

태풍이나 자연재해라도 오는 것처럼 주변에 있는 야생동물들과 몬스터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죄 없는 새들은 자신의 보금자리를 떠나 다른 곳으로 대피한다.

과장 하나 보태지 않고 신화 등급의 레이드 몬스터라도 나타난 것 같은 모양새.

보고 있을 뿐인 나조차도 몸이 덜덜덜 떨려올 정도의 살기를 뿌리며 달리고 있으니, 직접 영향을 받고 있는 녀석들이야 오죽할까.

저런 표정은 처음이다 싶을 정도로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단언컨대 둠기영 사태 때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가 필사적으로 구해내겠다는 의지를 담은 얼굴이었다면, 지금 보이는 표정에는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들어차 있다.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얼굴이 생소해 보일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아, 이거. 시발, 망했다. 망했다.’

성검 용사 파티를 살릴 수 없겠다는 걸 깨달은 것은 순식간, 애초에 협상과 대화 따위는 없다.

이번 챕터의 엔딩에는 파국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도 모르게 기댈 곳을 찾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현시점 가장 믿을 수 있는 인물, 이런 사고가 터졌을 시 상처를 봉합해 줄 수 있는 유일무이한 인물.

‘지혜 누나, 지혜 누나밖에 없어.’

지혜 누나, 눈치 빠르잖아. 김현성이 던전으로 향했다는 거, 누나 정보망에는 걸렸을 거 아니야.

‘누나도 그리던 그림이 망가지는 건 싫잖아. 우리 성검 용사 파티 떡상시키기로 하면서 와인, 짠 했던 거 기억하지? 현성이 나간 거 보고 상황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치챘지? 뭐 준비된 거 있지? 지금 수습하려고 머리 굴리고 있는 거 맞지?’

역시나 기댈 곳은 영혼의 파트너밖에 없지 않겠는가.

‘아니, 시발, 아니….’

하지만, 이쪽이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아니….’

내 생각보다 그녀의 눈치가 훨씬 더 빨랐다는 것.

‘뭐야, 조혜진이 왜 여기에 있어?’

쥐 죽은 듯이 이지혜의 침대에 누워 있는 조혜진.

‘하연수? 쟤, 하연수 맞지?’

이지혜와 가까운 사이로 알고 있던 하연수가 이지혜와 함께 다리를 쭉 뻗고 팩을 바르고 있다.

심지어 기절한 듯 잠든 조혜진의 얼굴에 팩을 올려주는 모습은 가관, 일과를 끝내고 얻은 꿀 같은 휴식 시간이겠지만….

-얘는 피부 관리도 안 하는 것 같던데, 참 피부가 좋다니까.

-원래 이런 타입이 그래요, 언니. 마력 자체도 정순하고…. 그게 다 외관으로 드러나는 거죠. 언니도 마력 좀 올리면 지금보다 더 좋아질 걸요. 아, 물론 지금도 좋지만요.

-그거야 당연한 거지. 이게 얼마짜린데.

타이밍이 좋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책상에 붙어 있는 메시지 때문이리라.

[혹시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메시지 남겨요. 지금도 보고 있을 수 있겠네. 보고 있는 거 맞죠? 아, 일단 미안하다는 말부터 해야겠네.]

‘안 돼. 죄송하면 안 되지…. 죄송하면 안 된다고….’

[저도 최대한 수습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능력 밖의 일이 터진 것 같아서 그냥 손 놓기로 했어요. 오늘 하루에만 두 번 죽을 뻔했다고요. 파란 길드마스터는 말릴 수도 없었고요. 너무 섭섭해하지 마요. 변명거리가 있다니까. 이야기 듣자마자 미친 듯이 뛰어가는 양반을 제가 무슨 수로 막아요? 아마 대책 마련 어쩌고 지껄였으면 제 목도 날아갔을걸요? 진짜 도와주고 싶은데, 이번 거는 어쩔 수 없었네요. 저는 이 주식 팔았어요. 완전히 손 털었으니까. 뒷일은 오빠한테 맡길게요.

p.s 오빠도 빨리 털어요. 아, 그리고 외부로 알려지면 안 되니까. 조혜진은 당분간 여기 둘게요. 저도 최소한의 도리는 한 거예요. 너무 원망하지 마요.]

‘누나, 시바… 혼자만 팔면 어떻게 해….’

상장 폐지하기 직전 칼같이 손절한 투자자의 현명함이 돋보이기는 했지만….

‘남겨진 사람은 어떻게 하냐고….’

아직까지 이걸 붙들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청천벽력처럼 들려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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