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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639화 (630/1,590)

# 639

회귀자 사용설명서 639화

지지 마(1)

‘이지혜… 이지혜, 시바.’

한날한시에 함께 매도하고, 함께 매수 하자던 우리의 맹세가 나가리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야말로 놀라 자지러질 정도의 손절 타이밍이었다.

개미들 등골 빼먹는 작전 세력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지구에 있을 때 관련 업종에 종사했다고 해도 고개를 끄덕일 귀신 같은 타이밍.

쪽지가 고맙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원망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혜진이… 혜진이, 너는 왜 쓰러져 있어.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얘 자기 몸 생각 안 하고 무작정 뛰어가다가 퍼진 거 아니지? 그걸 검은 백조에서 발견한 거야? 그래서 셋이 같이 있는 거야?’

몸이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뛰어준 조혜진에게는 감사한 마음과 걱정스러운 마음이 교차했지만, 일단은 이 감정을 저 멀리 던져 버릴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일이 어떻게 진행된 건지를 파악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지혜가 남긴 쪽지에 대충이나마 상황이 정리되어 있었지만 아무래도 생략된 부분이 많다.

몇 가지 확인할 수 있었던 것 중 하나는 그녀가 직접 김현성에게 보고했다는 것.

정말로 이지혜가 직접 김현성에게 보고했다면 내가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던 그림이 확실할 것 같았다.

조혜진이 이지혜에게 바통을 넘겼고 이지혜가 직접 김현성에게 상황을 전달한 것이다.

혼란을 최소화시켜야겠다고 판단한 것 역시 그녀의 선택일 터다.

훌륭한 판단에 박수를 보내주고 싶었지만, 속 안에서 올라오는 씁쓸함을 감출 수는 없었다.

이미 손절한 사람만 보여줄 수 있는 내면의 평화, 그 내면의 평화를 즐기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자꾸만 시야에 들어왔던 탓이다.

-손은 울퉁불퉁하네.

-얼마나 단련했겠어요? 그 조혜진이라고요. 이 사람은 안 그래도 훈련광으로 유명해요.

-흐음, 할 것도 없는데 네일이나 좀 해줄까?

-그래도 돼요?

-어차피 자고 있는데, 뭐. 당분간은 못 일어날 거라며? 파란색으로 칠해주는 게 좋겠네.

초조함으로 가득 차 있는 이쪽과는 거리가 먼 모습에 질투가 난다.

지금이라도 빠르게 손절하고 평화를 얻고 싶었지만, 이지혜보다 넣어놓은 원금이 많은 이쪽은 쉽사리 몸을 뺄 수가 없다.

기절한 상태로 관리받고 있는 조혜진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이지혜가 최소한의 도리를 해줬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내 마음속에서 삐져나오는 초조함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다시 한번 시선을 김현성으로 돌려봤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녀석은 여전히 입술을 꽉 깨물고 광란의 질주를 계속하고 있다.

심지어 방해되는 나무며 몬스터를 가리지 않고 베면서 나아가고 있다.

‘아, 엿 됐다. 이거 진짜 엿 됐다.’

몇 시간 후 여왕의 무덤 안에서 펼쳐질 살육 파티가 걱정되는 것이 당연했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은 2회 차의 김현성이 아니다. 독기로 가득 차 있었던 1회 차 시절의 김현성이라고 판단해야 한다.

성검 용사 파티가 녀석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린 것이리라.

‘곧바로 올 것 같지? 그렇지?’

일주일 후고 나발이고 기다리지 않을 것 같다. 곧장 던전으로 직행할 것은 너무나도 뻔한 이야기.

죽음의 사신이 스멀스멀 손을 뻗고 있다는 걸 아는지, 성검 용사 파티는 아직도 내부 정리에 한창이다.

‘몇 시간 남았지? 여기에 오기까지 몇 시간 남은 거지?’

정확히는 계산할 수는 없다. 하지만 3시간이 채 남지 않았으리라. 무조건 3시간 이내로 김현성이 여왕의 무덤으로 들이닥친다.

아니, 어쩌면 1시간 안에 들이닥칠 수도 있다.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던 시간이 예상보다 훨씬 짧아져 버린 상황에 입술을 깨물어 봤지만, 여전히 다른 선택지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아직 ‘사랑했다, 라파엘’을 시전하지 않은 내게 이미 다른 선택지는 의미가 없다.

‘설득해야 돼.’

지금 당장.

하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더 이상 고민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해 서둘러 몸을 일으킨 순간, 머리가 핑 돌더니 몸이 균형을 잃고 무너져 내렸다.

‘뭐야, 뭐야. 나 왜 이래? 나 왜 이래, 시바.’

“아… 이, 시바.”

물론 의심되는 것은 있다.

아마 엘룬의 망원경을 너무 오랫동안 사용한 부작용일 것이다.

잠시 두통이 밀려들어 와 머리를 꽉 부여잡자,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형, 형! 형!!”

화들짝 놀란 라파엘이 다시 내 몸을 침대 위로 올려놓기는 했지만, 그런다고 두통이 멈출 리 만무했다.

차라리 아픈 척이었으면 좋겠지만 진짜로 아프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정말로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느낌을 경험했다.

계속해서 지끈거리는 고통이 전두엽을 강타한다. 진짜로 아프다고, 나 좀 살려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허억, 허억….”

“괜찮으세요? 괜찮….”

‘아니, 안 괜찮아. 진짜로 아파서 뒈지는 줄 알았어. 나 진짜 아파. 나 진짜 아프다고, 시바.’

혹시나 엘룬의 저주가 깃든 것은 아닌지, 합리적 의심을 해볼 만한 고통이었다.

당장에라도 김현성이 들이닥칠 가능성이 큰 만큼 일단은 바깥의 상황을 전하는 게 급하다고 생각해 입을 열려고 했지만, 내 마음대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도망… 쳐.”

‘도망쳐, 이 새끼야. 김현성이 오고 있어. 일단은 시바, 목숨이라도 건져야지. 수습은 나중에 하더라도 살아야지. 살아야 돼.’

“네? 그게 무슨… 무슨 말씀이세요.”

“도망, 도망… 쳐야 돼.”

‘지금 빨리 튀어. 일단은 그래야 해. 무조건 그렇게 해야 해.’

“형…? 형? 제 모습 보이세요? 제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어요?”

“김현성이… 오고 있….”

“형?”

“나는… 내버려 두고… 그냥… 도망….”

‘내가 현성이한테 잘 말해줄게. 그러니까 그냥 시바, 도망치라고. 시바, 시간 없어. 시간 없다구.’

이 새끼가 내 말을 알아들었으면 좋겠다.

조금 다르게 들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됐지만, 일단 내가 하고 싶은 말 자체는 완벽히 전했다.

‘김현성이 오고 있으니까, 도망쳐.’

“죽을….”

‘너 죽을 거야. 분명히 죽어.’

“자식….”

‘뭐?’

“김현성 개자식…, 개자식!”

“뭐…?”

분통을 터뜨리며 땅바닥을 내려치는 녀석의 모습은 가관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지금 이 새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에 보인다.

‘아니야. 나 세뇌당한 거 아니야. 지금 제2의 인격이랑 싸우고 있는 그런 상황 아니야.’

입술을 꽉 깨문 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모습은 어떻게 봐도 답이 없어 보인다.

단언컨대 현재 이 새끼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기 직전에 있다.

‘님아, 제발 그 강을 건너지 마오.’

“곧 편해질 수 있을 거예요. 곧, 곧 형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그 개자식을… 형은 제가 지킬 거예요, 제가.”

“지키….”

‘지키지 마, 지키지 마, 시바.’

한 손으로 눈물을 쓱쓱 닦으며 발길을 돌리는 녀석의 뒷모습은 멋있다기보다는 불 속으로 전력질주하는 불나방처럼 보인다.

가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애처롭게 손을 뻗었지만, 녀석의 시선은 나를 보고 있지 않다.

누가 봐도 전쟁터로 나가기 직전의 병사처럼 보인다.

‘아, 머리 아파, 시바. 이 개새끼가, 형이 아파 뒤지겠는데 어디를 가려고 그래. 가지 마.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지 마.’

하지만 녀석은 뒤를 한 번 돌아본 후 커다란 문을 굳게 닫아버렸다.

철컥 하는 소리가 들린 것을 보니 바깥쪽에서 문을 잠근 듯했다.

허억 허억 거리는 와중에 주변을 둘러보자, 라파엘이 떨어뜨린 것 같은 여신의 손거울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손거울을 들어 올렸지만, 주어진 게 너무 적다.

둠기화를 해서라도 이 방을 벗어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김현성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칠지 누가 알겠는가.

‘아이, 시바. 이거 큰일 났다. 진짜 큰일 났다. ‘사랑했다, 라파엘. 사랑했다, 라파엘’ 해야 하나?’

이쯤 되면 1회 차 영웅 파티를 소개해 준 것도 후회가 된다.

마음의 눈을 발동시켜 바깥 상황을 살펴봤지만, 눈에 보이는 건 똘똘 뭉쳐서 현 상황에 대비하고 있는 성검 용사 파티뿐이었다.

조용히 전투를 준비하는 사냥개 이주혁. 기도를 드리고 있는 기적의 사제 마리엔,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는 생매장 듀오를 비롯한 파티원들은 라파엘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어쩌면 김현성이 녀석들을 살리는 선택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라파엘은 모르겠지만, 1회 차의 영웅들은 아깝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니, 아깝다는 생각 이전에 이 인물들은 모두 김현성과 접점이 있던 인물들이 아니었던가.

나처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녀석들은 분명히 김현성의 동료였었다.

‘일단 얘네들이라도 건지자. 라파엘은 이미 내 손을 떠났어. 얘네들이라도 살려야 해.’

다시 한번 눈을 돌려 김현성을 바라보자, 언제 들어왔는지 벌써 던전 안을 달리고 있었다.

‘뭐야, 이 새끼…. 이거 왜 그렇게 빨리 왔어. 왜 벌써 던전에 들어오고 그래.’

앞뒤 가리지 않고 달리는 모습에 녀석의 체력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녀석은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아 보인다.

살의 이외에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얼굴이 불안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사냥개 이주혁을 괜찮은 녀석이라고 말하며 미소를 보이던 녀석을 믿을 수밖에 없다.

김현성이 1회 차의 소중한 동료들을 저버릴 리가 없다.

김현성이 던전 내부로 침입했다는 사실을 눈치채기는 했는지, 성검 용사 파티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본 무대로 향하는 중.

-이길 수 있습니다. 이길 수 있을 거예요.

-일이 끝난 후에는 맥주라도 한잔하지.

-아, 저는 선약이 있어서….

-…….

-돌아간 후에 곧바로 여자친구에게 청혼할 생각입니다.

‘무슨 청혼이야…. 이상한 사망 플래그 꽂지 마, 시바.’

-다들 죄송합니다.

-죄송해할 필요 없어요. 저희 모두 동의한 일이니까요. 확률이 낮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저기, 만약 제가 죽는다면… 제 친구들에게….

‘그런 소리도 하지 마. 너희 왜 그래, 자꾸….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분명히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그런 말을 내뱉는 놈한테 꼭 무슨 일이 생기더라니까.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자신들이 사망 플래그를 내뱉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전형적인 대사를 툭툭 내뱉으며 길을 걷는 놈들의 모습은 어딘가 불안해 보이기까지 한다.

-곧 올 거다. 전투 준비.

작은 소리가 울려 퍼진다. 김현성은 입술을 꽉 깨물며 발에 마력을 가득 담기 시작했다.

서로를 확인할 수 있는 거리까지 들어왔다.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고 있는 가운데 김현성이 응시하고 있는 것은 가장 앞쪽에 자리 잡은 사냥개 이주혁.

‘죽일 생각인데…. 저거 죽일 생각인 것 같은데. 진짜로 죽일 생각일 것 같은데….’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이곳에 있는 놈들을 모조리 죽일 거라고, 그렇게 다짐했다는 걸 깨닫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저도 모르게 손거울을 들고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이주혁은 페이크. 마리엔… 마리엔 조심, 마리엔 조심해. 조심하라고, 시바! 고개 숙여! 고개 숙여요. 고개 숙여!”

‘사제부터 노릴 거라고 했잖아, 이 새끼들아.’

목소리가 닿았는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는 마리엔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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