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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642화 (633/1,590)

# 642

회귀자 사용설명서 642화

미친 까마귀(1)

엘룬이 선물한 망원경에 보인 것은 동료를 잃을 위기에 표정을 굳힌 용사와 녀석을 둘러싼 타천의 무리.

루시퍼가 내려준 성검, 아니, 마검을 손에 들고 김현성을 위협하는 녀석들의 모습에는 저도 모르게 고개가 저어졌다.

다수에게 둘러싸인 회귀자가 이 위기를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차갑게 굳은 얼굴은 현재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말해주는 것 같았다.

‘더러운 루시퍼의 졸개들이….’

평화로운 대륙을 위협하려는 악마들의 모습에 오금이 저린다.

여러모로 불리한 점이 많다. 개인의 스펙은 김현성이 높다지만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이다.

여기까지 오느라 소모한 마력과 체력을 생각해 본다면 불리한 싸움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나 역시 김현성과 함께 저 악마 무리를 향해 빛의 심판을 내리고 싶은 심정, 이곳에 갇히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게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열려.’

거대한 문을 쿵쿵 두드려 봤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다.

‘믿는 수밖에 없어, 아니, 나는 현성이를 믿어.’

“할 수 있을 거야.”

그동안 수많은 위기를 헤쳐온 그 김현성이지 않은가. 이번 위기 역시 충분히 감당해 낼 거라고 여겼다. 녀석은 그런 놈이었으니까.

소중한 친우가 세뇌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각성한 용사 때문인지 루시퍼의 졸개들은 스멀스멀 뒷걸음질 치기 시작.

본인들이 인지한 행동이 아닐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아마 갑작스럽게 뻗어 나오는 노을빛 기운에 어둠의 마기가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닐까.

“힘내라, 힘내. 지지 마라, 현성아.”

내 목소리라도 닿는다면… 닿는다면, 아주 작은 힘이나마 닿을 수 있다면, 녀석에게는 정말로 커다란 힘이 될 텐데….

-다, 다음에는 어떻게 해요, 형?

“…….”

-다음에는… 어떻게….

“…….”

타천의 힘에 의해 잠시 안에 남아 있던 어둠이 반응하기는 했지만, 언제나 손절은 냉혹한 법.

-대답해 주세요, 형. 지시를… 지시를 내려주세요.

“…….”

-형, 괜찮으신 거 맞죠? 괜찮으신 거… 맞는 거죠? 쓰러지신 건 아니죠?

그 와중에 라파엘이 점점 더 초조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안 그래도 슬슬 머리가 지끈거리는 타이밍, 아까와는 별개로 손가락을 툭툭 허벅지로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이후의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머리를 굴려야 했던 탓이다.

‘세뇌당했다고 하면 되려나.’

김현성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테니 딱 적당한 변명이 되지 않을까.

벌써부터 노을빛에 영향을 받은 녀석들을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에 도착할 것 같다.

슬쩍 거울을 바라보자 현재의 모습이 그리 좋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두통 때문에 일그러진 얼굴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제대로 먹지 못해 마른 모습은 누가 봐도 건강이 좋지 않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자해한 흔적이라도 있으면 좋지 않을까 싶었지만, 드라마틱한 전개를 위해 스스로를 상처 입히고 싶지는 않다.

아무리 나라고는 해도 쓸데없이 아픈 건 싫었으니까.

굳이 온몸에 멍이 든 흔적을 만들지 않아도 김현성이라면 내가 겪었을 고통을 모두 알아주지 않을까.

‘아니지, 그래도 조금은 있는 게 나으려나.’

조금 정도는 있어야 개연성이 맞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팔과 다리가 잘린 녀석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는 중이었다.

이미 전투 불능이라고 판단한 것인지는 몰라도 김현성이 녀석을 지나쳐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대로 천천히 죽어가는 걸 지켜보려는 건지, 아니면 살아 있는 게 후회될 만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냉정한 빛의 심판이 녀석을 기다리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입술을 꽉 깨문 라파엘의 얼굴을 보자 미안한 감정이 살짝 올라오기는 했지만 이미 밸런스는 무너졌다.

아무리 여기서 쌩 발악을 한다고 해도 이 무너진 균형을 되찾는 것은 불가능.

무엇보다….

‘아, 무서워.’

김현성의 얼굴이 굉장히 무섭다.

-형, 형! 형!

녀석의 형 하는 소리가 채 닿기도 전에 콰직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시야에 비친 것은 벽에 얼굴이 처박힌 라파엘, 순간 날개를 펼쳐 몸을 뒤로 빼기는 했지만, 대미지가 없을 리가 없다.

사실 육체적인 대미지보다는 정신적인 대미지가 더 커 보인다. 갑작스럽게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은 이유를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다.

아니면….

‘수신기에서 내 목소리를 들었나?’

‘현성아, 지지 마’라는 대사를 들었다면 멘탈이 나갈 만도 했다.

귀신같은 타이밍에 손절 당한 것은 아닌지 고려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거다.

아주 약간의 걱정거리가 대뇌의 전두엽을 스치고 지나가기는 했지만, 이내 들려온 목소리에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입술을 꽉 깨물고 있던 녀석의 외침은 가관.

-무슨 짓을 한 거야! 형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고! 형한테….

-…….

-그럴 리가 없어. 이럴 리가….

‘진짜 미안해, 진짜로. 나도 이러기는 싫었는데, 상황이 좀 그래. 다들 손절하는 타이밍이기도 하고… 나만 붙들고 있기는 조금 그렇잖아.’

-나를… 버릴 리가 없는데… 나를… 분명히 뭔가가 잘못된 거야. 그래, 분명히 네가…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니야, 충분히 그럴 수 있어. 믿지 않으면 배신당할 일도 없는데….’

-형이 나를 버릴 리가… 아아아악!!

콰앙!!

파티의 중심을 자처하던 라파엘이 스스로 무너지고 있는 상황, 안 그래도 김현성에게 대응하기 힘들던 파티가 무너지는 것 역시 시간문제였다.

그나마 눈빛이 살아 있는 것은 사냥개뿐. 입술을 꽉 깨문 녀석이 김현성을 향해 돌진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곧바로 목이 잘려 나갈 거라고 생각했지만, 놈은 의외로 괜찮은 모습을 보여줬다.

남은 파티원들과 함께 최후의 힘을 짜내듯, 아까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직접적인 지시는 없었지만, 본인들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는 기억하고 있는 모양.

-그대로 주저앉아 있을 생각이냐.

손발이 오그라드는 대사를 치는 사냥개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다. 말 그대로 온몸이 너덜너덜해지고 있다.

-겨우 이 정도로 주저앉고 끝낼 생각이었던 거냐.

‘그만해, 얘들아….’

-일어서. 일어서라, 라파엘.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너를 믿고 여기까지 따라와 준 나를, 우리를 실망시키지 마.

그들의 감성이 이해가 되기는 했지만, 한 발자국 뒤에서 저 말을 듣기에는 확실히 무리가 있다.

-네 손으로 시작한 일이다. 끝까지 매듭을 지어. 지키고 싶은 사람을 위해, 대륙을 위해, 자신이 저지른 죗값을 치르기 위해 싸우고 싶었던 게 아니었었나. 나는 기억하고 있다, 라파엘. 네 눈을 보고 난 따라온 거야.

-…….

-흔들리지 마라. 너는 분명히 해낼 수 있다. 분명히….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싸이월드 감성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사냥개의 의외의 모습에 엉덩이가 들썩였지만, 누군가는 착실히 반응하고 있다.

가슴에 검이 튀어나온 채 저런 말을 지껄였으니, 오히려 반응하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을까.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사실 김현성이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아무리 상황이 꼬였다고는 하더라도 1회차의 동료들을 본인의 손으로 보내는 것은 조금 너무하지 않은가.

게다가 그 동료가 라파엘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할지도 의문이 남는 부분이고….

-너 자신을 위해서 싸워. 지지 마라, 라파엘…. 지지… 마….

녀석은 결국 입에서 피를 흘리며 툭 하고 쓰러져 내렸다.

미약하게 숨을 쉬는 걸 보면 살아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아, 안 돼, 안 돼!

중얼거리는 라파엘의 모습을 보며, 기적의 사제 마리엔이 신성력을 내뿜는다.

-지지 마요. 지지 마세요. 주저앉지 마세요.

-아, 아아….

-기억하세요?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셨잖아요. 처음 만났을 때 분명히 그렇게 말씀해 주셨잖아요. 할 수 있을 거예요, 라파엘 님은 분명히….

-마리엔, 마리엔!

믿었던 기적의 사제마저 신성력을 전부 사용한 이후에 탈진.

사방을 둘러보는 라파엘의 모습이 보인다.

지금 눈에 보이는 광경은 거짓말이라는 듯이 두리번거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함께 싸우는 동료들은 이제 없다.

-힘을… 힘을 줘.

-…….

-당신이 날 선택한 이유가 있다면 힘을 줘!

-넌 애초에 선택된 적도 없었어.

-형이 말해줬어. 분명히 날 선택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힘을, 힘을 주란 말이야. 동료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줘. 형을 지킬 수 있는 힘을, 힘을 줘! 이 머저리 같은 고철 덩어리! 제발… 부탁해. 제발… 원하는 건 뭐든 할 테니, 내게.

뭔가 스멀스멀 느낌이 오는 타이밍이기는 하다. 정의의 용사가 성검으로부터 인정받아 힘을 얻는 클리셰이기는 하지만, 녀석은 용사가 아니지 않은가.

괜스레 혀를 차고 있었던 바로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아.

굉음과 함께 회색빛이 녀석의 몸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

‘뭐야, 이러면 안 되는데.’

“뭐야, 이러면 안 돼. 왜 이러는 건데….”

제대로 가늠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빛나는 회색빛은 과장 하나 보태지 않고 찬란하게 느껴진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던 라파엘의 몸이 천천히 회복된다.

아니, 회복이라기보다는 재생이라는 표현이 떠 어울리는 상황, 그동안의 대미지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회복되고 있다.

당연하지만 회색빛은 쓰러진 녀석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약한 숨을 헐떡거리고 있던 사냥개의 숨이 점차 안정적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탈진한 마리엔의 창백한 안색 역시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뭐야….’

손절했는데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디 있어.

‘아직 추가 매수할 수 있는 상황인 거 맞지?’

김현성의 표정 역시 한층 더 굳기 시작한다.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보이는 출력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수준.’

그 말 그대로이지 않은가.

아무리 마검, 아니, 성검에게 선택받았다고 한들, 평범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힘이 아니다.

내뿜고 있는 회색빛의 양이 이미 김현성을 상회하는 상황.

물론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녀석에게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지금 라파엘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지극히 비상식적이었다.

물론 라파엘이 어디서 저런 힘을 받고 있는지는 대충 이해가 간다.

“루시퍼.”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거라고 생각하는 게 맞다. 최소한 가계약 정도는….

‘하.’

괜스레 입술을 꽉 깨물며, 여러 가지 고민을 해볼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도대체 왜.”

‘왜 산 거야?’

모두가 이 주식을 손절한 상황에 어째서 그녀가 여기에 투자했는지, 도대체 뭐 볼 게 있다고 다시 이 주식에 발을 들였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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