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643화 (634/1,590)

# 643

회귀자 사용설명서 643화

미친 까마귀(2)

‘목적이 뭐야.’

“…….”

‘듣고 있어? 목적이 뭐야?’

당연하지만 루시퍼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애초에 이쪽에 알릴 생각이었다면 이렇게 갑작스럽게 일을 진행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생각해 보면….

‘갑작스러운 게 아닐 수도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게 설계일 가능성을 떠올려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현시점에서 그녀가 뭘 노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계획된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떠올려 보면 이상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성검이 라파엘을 선택했다는 것부터, 현재 상황에 이르기까지 의심이 되는 정황은 많다.

물론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지만, 루시퍼가 이런 멍청한 곳에, 아무런 목적 없이 투자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 망해가는 주식에 투자해?’

베니고어 사단이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도 그다지 이상하지 않겠지만, 루시퍼는 다르다.

조금이라도 살아날 기미가 보인다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그것도 아니고….’

심지어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소규모 투자로 간을 보고 있는 상황도 아니다.

누가 봐도 규격 외의 회색빛을 퍼주고 있는 모습에는 내 입이 다 벌어질 정도였으니까.

혼자 힘으로 싸우고 있는 김현성이 걱정될 정도였으니, 무슨 표현이 더 필요할까.

‘어이없네, 진짜.’

그런 말이 절로 튀어나오는 상황.

곧바로 몸을 날린 김현성이 라파엘에게 쇄도해 들어가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아까처럼 검을 휘두르기는 했지만 검에 깃든 마력이 다르다.

정말로 죽이겠다는 생각으로 휘두른 검을 라파엘은 회색빛으로 받아낸다.

그 와중에 피슉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한쪽 날개가 잘려 나가기는 했지만….

‘곧바로 회복.’

회색빛에 휩싸여 원래대로 되돌아가는 날개 역시 루시퍼가 자신의 힘을 밀어 넣었다는 거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아무리 신화 등급의 검이라고 한들, 저런 규격 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누가 봐도 누군가의 지원을 등에 업고 싸우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 힘이라면… 지킬 수 있어.

‘그거 네 힘 아니야.’

어떻게 보면 벨리알이 내게 마력을 쏟아부었을 때와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으리라.

단언해서 말하건대 그때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 하진 않았다.

당시 나는 정말로 마력만 받았을 뿐이었고, 녀석은 성검이라는 신화 등급의 아이템에, 벨리알보다 서열이 높은 악마에게 힘을 빌리고 있다.

그 출력을 나보다 더 잘 활용할 수 있다는 것도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

애초에 내 비루한 신체는 벨리알이 넣어준 마력을 전부 소화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녀석은 다르다. 라파엘은 틀림없이 재능이 있는 편에 속하는 인재다.

아니, 어떤 부분에서는 천재라고 불릴 정도로 가능성이 있었고, 실제로 본인의 힘으로 이 위치에 올라왔다.

루시퍼와 궁합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 부작용이 있는지 없는지, 자기 몸을 갉아먹고 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보이는 모습만큼은 완벽에 가깝다.

그 라파엘이 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콰아아아앙!’ 하는 소리가 들려오며 사방이 부서져 나간다.

애초 고급 마력 운용 지식에 올인해 마력 컨트롤 부분에 많은 투자를 했던 것이 이렇게 돌아온 것이다.

비교적 약한 내구도, 체력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 녀석은 완전히 회색빛에 둘러싸여 있는 상태였으니까.

이쯤 되면 루시퍼가 원하는 게 김현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야. 그건 아니지… 그건 아닐 거야.’

김현성을 열렬히 원했던 게 바로 그녀가 아니었던가.

아직 김현성은 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고, 어떤 진영을 선택할지도 정해진 바가 없다.

운이 좋으면 김현성이라는 인재를 영입할 수 있는 루시퍼의 입장에서는 그런 무리수를 던질 이유는 하나도 없다.

결정적으로….

‘나 역시 적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만약 김현성을 치우고 그 자리에 라파엘을 세울 생각이라면 그 생각이 틀렸다고 딱 꼬집어 말해줄 수 있다.

루시퍼의 지원과 성검을 등에 업은 녀석이라고 한들, 절대로 녀석은 김현성을 대체할 수 없다.

괜스레 쫄리기 시작해 문을 쾅쾅 두드려 봤지만, 박리안에게서 다른 피드백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 와중에 김현성과 라파엘은 전투에 여념이 없다. 꽤나 넓은 동공이 순식간에 폐허가 되어버리는 데는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거대한 회색빛은 계속해서 김현성을 노리고, 김현성은 여전히 차가운 눈빛으로 놈을 응시하며 검을 휘두른다.

날개가 잘려 나가고 상처가 쌓이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회복하며 김현성과 맞서는 놈의 모습은 정말로 타락한 천사의 모양새.

“이 지랄이 났는데, 위쪽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다고? 저게 루시퍼가 직접 힘을 준 게 아니라고?”

저런 출력이라면 루시퍼가 이 대륙에 발을 들여놨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이기영 신도… 이, 이기영 신도! (0/1)]

‘역시 루시퍼일 줄 알았어. 그래, 시바… 이걸 눈치 못 챌 정도로 무능하지는 않겠지.’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지, 지금 감찰단… 감찰단이 오는 중이래. 어떻게 해? 어, 어떡해? 아직 재판 준비 다 끝난 거 아니지? 일단 망원경부터… 망원경. (0/1)]

‘…….’

[큰일 났어, 이기영 신도… 망원경 빨리… (0/1)]

‘너한테 기대를 한 내가 병신이지, 시바. 걔네가 지금 재판이랑 감찰 때문에 오는 것 같아? 지금 상황 안 보여?’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아, 아! 뭐, 뭐야! 뭐야! (0/1)]

‘눈치 못 챘어? 시바?’

[잠, 잠깐 기다려. 지금 수, 수습을… 수습해 볼 테니까. 잠깐만… (0/1)]

[알 수 없는 이유로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취소됩니다.]

“제대로 각을 잡으셨네요, 아주. 시바.”

베니고어 쪽을 차단한 것 역시 루시퍼.

위쪽이 멍청하다고 비난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바라는 게 없기도 했거니와 그만큼 루시퍼의 계획이 은밀했다는 거니까.

베니고어 위쪽에서도 대응이 한 발자국 늦었을 정도라면 그녀가 그 정도로 철저하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설계하고 있었다, 이 말이지. 시바….’

의자에 앉아 이 상황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루시퍼의 얼굴이 괜스레 스쳐 지나간다.

‘위에서 설계하고 있었다… 하.’

이죽거리고, 비웃고 있는 것은 아닐지 떠올리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그녀의 노림수가 뭔지는 모르겠다만, 잘못하면 악마 진영에 적대감을 가지게 될 수 있다고는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다.

아니면 그것까지 전부 다 포용할 정도로 이번 투자에 자신이 있었던가.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백만 년 동안 나를 위쪽과 격리할 수는 없을 터, 베니고어 사단뿐이라면 더 오래 개입할 여지가 있었겠지만, 곧 베니고어 측에서도 윗분이 등장하는 게 예정된 상황이다.

이번이 루시퍼의 2번째 방문인 만큼, 위쪽에서도 철저히 준비하고 달려올 것이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퀘스트의 생성을 막고 있는 알 수 없는 이유가 사라질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이야기.

문제는 그 시기가 언제냐는 것과 골든타임에 맞출 수 있냐는 것이었다. 나라도 뭔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와 꽂혔다.

‘초조해지게… 박리안 얘는 진짜 뭐 하고 있어?’

그런 생각을 머리에 담는 순간, 거대한 문이 쾅 하는 소리를 내며 열리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바깥에 보인 것은 땀으로 흠뻑 젖은 박리안의 얼굴, 칭찬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겨를조차 없다.

김현성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는 게 계속해서 시야에 들어왔으니까.

“하아… 하아… 늦어서… 늦어서 죄송합니다. 부, 부길드마스터… 몸은, 몸은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안색이, 안색이 좋지 않으신데….”

“저 좀 부축해 주세요.”

“지금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요. 갈 곳이 있습니다. 그 전에… 아….”

‘내 눈… 시발, 내 머리.’

“부길드마스터, 일단은 휴식을 취하시는 게….”

“아니, 좀 가요. 급하니까.”

“하지만….”

“빨리 갑시다, 좀!”

“네.”

한 발자국 내딛자마자 아까와 같은 통증이 덮친다.

솔직히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싶을 정도의 고통이었지만, 지금 당장은 참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문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기가 힘에 부쳤지만, 옆에서 내 몸의 균형을 맞춰주고 있는 박리안 때문에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전방을 바라보자 여전히 전투 중인 장내가 보인다.

본래부터 차갑게 느껴졌던 김현성의 얼굴이 점점 더 차가워진다.

꽉 깨문 입술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흘러나오고, 검을 잡은 손아귀에서도 핏물이 흘러내린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라파엘의 몸에 상처가 생기며 신체 일부분이 잘려 나가기는 하지만 회색빛과 함께 금세 회복된다.

아직은 무리가 없어 보이기는 했지만, 정말로 김현성의 체력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너만은 절대로 용서 못 해, 절대로!

‘개소리 좀 그만해, 이 미친놈아.’

-…….

-절대로!!

싸움은 길고, 거칠다. 김현성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지만, 확실히 어떤 종류의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얼굴에는 초조함과 분노가 드리우고 있었고, 조금씩 호흡도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지금 김현성이 싸우고 있는 대상은 라파엘이 아니라 루시퍼의 일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루시퍼의 퍼주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한계가 있기는 한 건가? 끝은 있어?’

그녀가 한 재력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퍼줘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

라파엘은 상처 입고, 회복하는 과정을 반복하고,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내기 위해 회색빛을 쏟는다.

김현성은 여전히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검을 휘두르기에 여념이 없다.

자원이 계속해서 충전되는 라파엘과는 다르게 김현성은 충전되지 않을 자원을 계속해서 소모하는 쪽.

뭐라고 도움이 되고 싶었지만, 솔직히 내가 가서 어떻게 도움을 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전술 김현성을 가동해도 의미가 없다. 애초에 형국 자체는 현성이가 밀어붙이고 있는 형국이었으니까.

일단은 싸움을 말리는 게 먼저가 아닐까. 곧바로 손거울에 대고 입을 여는 게 올바른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해요, 라파엘 님. 지금 조종당하고 있는 겁니다. 싸움을 멈추세요. 뭔가 서로 오해가….”

하지만 그게 잘못된 선택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아니요, 형이 조종당하고 있는 거예요. 보고 계세요. 제가 이 새끼 해치우고 형을 정상으로 만들 거예요. 더 이상 형을 힘들게 하지 않을 거예요. 더 이상… 머리 아픈 일도….

‘어?’

-기억을….

‘하지 마, 미친놈아. 말 안 한다며.’

-기억을….

‘야, 이 시바… 하지 마! 하지 마!’

-잃는 일도 없을 거라고요.

‘개….’

-뭐?

‘…….’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느낌.

나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아니었는지, 일순간 정지된 전투 현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자신이 뭔가 잘못 들었다는 듯, 지금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인상을 구기고 있는 김현성의 표정은 가관.

-방금 뭐라고 했지.

-기억을 잃는 일도 없을 거라고. 몰랐다고 말하지는 마, 김현성, 이 쓰레기 같은 개자식.

-뭐라고… 방금, 뭐라고….

-네가 그렇게 만든 거야. 네가 그렇게 만든 거라고!!!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얼굴.

루시퍼가 정말로 원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어째서 라파엘에게 투자한 건지, 김현성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타락.’

“…….”

“…….”

“루시퍼….”

미친 까마귀가 노린 것은 둠현성일지도 모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