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4
회귀자 사용설명서 644화
미친 까마귀(3)
커다란 충격을 받은 듯 김현성의 얼굴에 수심이 드리우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전히 검을 맞대고는 있었지만, 집중력이 흐트러진 게 눈에 보일 정도, 누가 봐도 정신을 다른 곳에 놓고 온 것 같은 표정이지 않은가.
당연하지만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예상이 간다. 방금 들은 충격적인 소식을 되새김질하고 있지 않을까.
집중해야 한다고,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주면 좋겠지만 멍한 얼굴은 여전했다.
단언컨대 이전에 봤던 이상한 행동들을 천천히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머리를 부여잡는다든지, 잠깐 다른 세상에라도 다녀온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짓는다든지,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잦아진다든지 하는 종류의 사건들 말이다.
애초에 조혜진에게 내 상태를 확인해 달라고 한 것도, 내 머리에 이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모두 김현성의 머리에서 나온 추측이 아니었던가.
그 누구보다 녀석이 먼저 의심했었고, 녀석이 먼저 눈치챘었다.
‘시바… 시바….’
어쩌면 그런 결론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조혜진이 자신에게 거짓 보고를 했거나, 내가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이 일을 숨기고 있을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이다.
녀석의 얼굴이 구겨지기까지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절망, 말 그대로 끝이 보일 것 같지 않은 절망이었다.
‘이 새끼, 왜 이렇게 눈이 죽었어.’
-…….
‘현성아, 정신 차려. 형 멀쩡해. 정신 차려야지. ‘이제 됐어, 이제는 지쳤어.’ 한 번 더 시전하려는 거 아니지? 지치면 안 되는 거 알지?’
-형을 구할 거야. 네 더러운 손아귀에서 그 사람을 구해낼 거야.
‘넌 좀 닥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주제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주제에!
‘좀 닥치라고.’
무너진 멘탈이 전투에 영향을 주는 것은 역시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애초 김현성은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듯 보인다.
어찌어찌 몸을 움직이고 있지만, 평소처럼 공격에 대응하지는 못하고 있다.
좀 과하게 충격 먹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조혜진 조차 울고불고 난리를 쳤었던 기억상실 기믹이 아니었던가.
김현성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소중한 친우, 짐을 함께 들어주는 동료, 1회 차와 2회 차, 본인의 인생을 통틀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형제.
안락하고 따뜻한 회귀자의 품에서 온갖 꿀을 받아먹기 위해 내가 저지른 사소한 사건들만큼이나 김현성은 나를 의지하고, 따르고 있다.
무의식 세계에서의 만남 이후에는 특히나 말이다.
여러모로 걱정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럴 리가….
‘맞아, 그럴 리가 없어. 그 생각이 맞아, 현성아.’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그래,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걔, 순전히 거짓말쟁이야. 상태도 조금 이상한 것 같은데 무슨 그런 쓸데없는 말을 믿고 그래.’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어.
‘그래, 일어날 리가 없지. 잘 알면서 왜 그래. 그리고 쟤 지금 루시퍼한테 조종당하고 있는 것 같다니까. 그런 애가 하는 소리에 무슨 귀를 기울여 주고 그래? 저거 전부 다 거짓말인 거 알지?’
-거짓말… 이야.
‘그래, 거짓말이야.’
하지만 정말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가 않다는 게 문제였다.
쾅!
아니나 다를까 큰 소리를 내면서 벽에 부딪히는 등 밀리는 형국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떻게든 승리를 가져가고야 말겠다는 라파엘의 의지에 괜스레 우리 회귀자가 다칠까 걱정되기는 했지만, 아마 김현성의 몸 자체에는 커다란 이상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루시퍼가 노린 것이 둠현성이 맞다면 녀석이 상처 입는 걸 바라보고만 있지 않을 테니까.
신체보다 더욱더 걱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바로 멘탈.
자꾸만 현실을 부정하는 모습에 어쩌면 다시 한번 무의식 세계에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볼 정도였다.
만약 정말로 루시퍼가 김현성을 노린 게 맞다면 지금 이 장면이 루시퍼가 머릿속에 그렸던 장면이 아니었을까.
완전히 난장판이 된 장내, 계속해서 입을 열며 몰아붙이는 라파엘과 마치 혼이 나간 것만 같은 김현성.
김현성의 표정이 어두워지면 어두워질수록 더욱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비열한 까마귀 년…. 제기랄, 제기랄.’
현시점에서 내 말을 뒷받침해 줄 만한 증거는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
당장은 정신력 자체를 마모시키는 것이 첫 번째 과제라고 생각하고 있을 터, 그리고 그 계획은 충분히 들어맞고 있다.
애초에 김현성이라는 인간의 성향은 빛에 더 가깝다.
정확히 말하면 본인만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지만, 진영 자체는 왼편에 있다는 거다.
선의의 중재자라는 녀석의 성향이 설명해 주듯, 지금까지 김현성의 정신은 악마들이 침투할 수 있는 빈틈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타락 플래그를 세울 수 있게 그 단단한 정신의 벽을 허무는 첫 번째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 깨끗했던 영혼에 때를 묻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혼란스러워하는 김현성의 표정과 녀석의 몸 주변에서 삐죽삐죽 튀어나오는 오오라가 내 말이 맞았다는 것을 아주 잘 증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그 이후가 바로 유혹, 새로운 힘을 받아들이라는 유혹이다. 더러운 악마 놈들이 순진한 인간을 꾀어낼 때 사용하는 전형적인 방법. 아마 지금쯤 김현성의 머릿속에 루시퍼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네가 원하는 걸 전부 다 해줄 수 있다고, 힘이 필요하면 힘을 주고, 누군가의 기억을 되찾고 싶다면 그렇게 해주겠다고.
정확히 뭐라고 말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목소리가 일방적으로 전해지고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어쩌면 빛을 부정하는 목소리를 내뱉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이기영 개인이 겪고 있는 부조리한 운명에 대해서, 혹은 신에게 헌신한 그에게 찾아온 불행에 대해서.
자신들은 다를 거라고, 타천사 루시퍼는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루시퍼였다면 베니고어를 부정하는 방법을 써먹었을 거다.
‘하, 시바.’
정말로 어둠의 군주 둠현성이 태어나는 건 어떨까 생각해 봤지만 역시나 논외.
‘불순물이야.’
김현성은 루시퍼의 힘 없어도 더 강해질 수 있다.
‘까마귀는 불순물이라고.’
단기적으로는 좋은 선택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전혀 도움이 되는 선택지가 아니다.
애지중지 소중히 닦아온 보석에 거추장스러운 장식은 필요 없다.
김현성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딘가에서 빌려온 힘은, 당장의 위기를 벗어나는 것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이후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내 말 맞지? 계약 같은 거 안 할 거지? 너, 악마 싫어하잖아.’
루시퍼가 대놓고 악마처럼 등장하지 않을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김현성이 갑작스럽게 등장한 구원자에 손을 아무 의심 없이 잡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계약 같은 거 안 할 거지? 기벽이 바뀌기는 했는데… 그래도 너 선의의 중재자잖아. 뭐, 세상이 무너진 것도 아닌데 정체도 모르는 구원자의 손을 잡으려고 그래.’
김현성이 입술을 꽉 깨문 것은 바로 그때.
‘현성아.’
흔들리는 눈빛에 신념은 없다.
‘미친 까마귀 년, 지금 당장 안 멈추면 계약이고 나발이고.’
[아니, 이건 당신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이기영 군단장.]
‘뭐?’
[물론 개인적인 욕심을 아예 배제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게 당신들을 위한 길이에요.]
‘그딴 건 필요 없어.’
[아니요, 필요할 겁니다. 이기영 군단장은 제게 감사하게 될 겁니다, 분명히. 그리고 결국에는 함께 오시게 되겠네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후에 다른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더 이상 대화할 필요가 없거나, 이쪽의 페이스에 말리지 않겠다는 의도가 엿보지만, 이런 일방적인 소통이 반가울 리 없다.
여러 제한이 걸려 있다는 것 자체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녀가 정말로 숨기고 있는 게 뭔지, 알고 있는 게 뭔지, 알 턱이 없는 이쪽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의아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읽지 못한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에는 이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이 머리 꼭대기 위에서 이쪽을 조종하고 있는데 기분 나쁘지 않을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내가 하기에는 좀 그런 생각이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나는 끌고 다니는 쪽이지 끌려다니는 쪽이 아니다.
루시퍼가 원하는 게 정말로 내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한들, 나는 그녀가 우리를 휘두르는 걸 원하지 않는다.
‘그래, 한번 네 마음대로 해봐.’
박리안에게 반쯤 업힌 느낌으로 커다란 던전을 이동한 지 어느덧 몇십 분이 지나가고 있는 상황.
그녀 역시 지쳐 보이기는 했지만, 천천히 가달라고 말하지를 못하겠다.
‘조금 더 빨리.’
“힘들 거라는 건 알지만….”
“허억, 네. 허억….”
“감사합니다.”
“…….”
‘이번 일 끝나면 내가 사례할게, 진짜로.’
점점 더 심각해지는 안쪽의 상황 때문에 그녀를 재촉할 수밖에 없다.
‘베니고어는 아직이야?’
당연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다. 솔직히 벌써 수습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시바, 진짜.’
다시금 눈을 돌려 시선을 김현성에게 돌리자 점점 더 막장으로 치닫는 듯한 느낌이 든다.
갑작스럽게 뻗어 나오기 시작한 이해할 수 없는 기운에 당황하는 라파엘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기 때문이다.
침을 꿀꺽 삼키는 녀석의 목이 괜스레 클로즈업된다.
열심히 입을 털던 녀석이 일순간 벙어리가 될 정도로 현재 김현성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심상치 않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느니, 어쨌느니 지껄이고 있었지만,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으아아아악!
소리를 내며 검을 휘둘렀지만 보이지 않은 장막에 회색빛이 모조리 비껴 나가는 모습, 아니, 마치 회색빛이 스스로 김현성에게 닿는 걸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
김현성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것이 딱 이즈음, 아까보다 더 어두워진 얼굴이 눈에 띈다.
자기 혐오에 가까운 두 눈은 다른 무엇보다도 녀석의 심정을 잘 설명해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휘몰아치는 칠흑의 어둠이 놈의 몸을 감싸 안았고, 그 마력의 파동이 내가 있는 곳까지 닿는다.
손발이 부르르 떨려오는 것은 물론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만 같은 느낌.
‘시바, 하지 마! 하지 말라고.’
“하지 말라고! 시발!”
김현성의 등 뒤에서 거대한 칠흑색의 날개 한 쌍이 뻗어 나오는 게 눈에 비친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다시 또 한 쌍.
“…….”
다시 또 한 쌍.
“개시바….”
다시 또 한 쌍.
10장의 날개 비쥬얼은 괜찮기는 했지만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듯한 느낌, 김현성이 고개를 돌리는 게 눈에 보인다.
아마 내가 달려오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는 게 분명하겠지만 얼굴에 반가움이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처참할 정도로 망가진 이쪽의 모습에 걱정하는 듯한 표정이 얼굴에 맴돌았지만, 이내 본인이 어떤 상태인지를 깨닫고는 입술을 꽉 깨무는 모양새.
악마와 계약한 자신을 내가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하는 모습이라 할 만했다.
‘이거 원래대로 되돌릴 수는 있는 거지? 희망은 있지?’
하지만 마음의 눈이 보여주는 정보는, 그 일말의 희망조차 부숴 버리고 있다.
[김현성의 고유 기벽을 확인합니다.]
[역겨운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노을]
‘조심해야 했어.’
나 스스로도 반성할 수밖에 없는 부분.
괜찮을 거라고, 별거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저 역겨운 어둠이 루시퍼를 뜻하는 것일지 그 누가 알았을까.
‘제길.’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