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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646화 (637/1,590)

# 646

회귀자 사용설명서 646화

둠현성(2)

곧바로 녀석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 표정을 완곡한 거절의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조금 충격받은 표정을 보니 내 생각이 맞는 모양이다. 곧이어 연타를 날리는 게 조금 미안했지만, 머리를 붙잡으며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당신 누구야.”

“…….”

순간 눈동자가 죽어버린 것 같은 느낌, 순간적이지만 소름이 돋아 급하게 입을 열게 된다.

어떻게 생각해도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발언이었으니까.

“아니, 저는 지금 당신이 누군지 묻고 있는 겁니다.”

급하게 말을 내뱉었지만 여전히 어두운 얼굴이 눈에 띈다. 그래도 이전보다는 조금 나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정말로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 게 아닌지 고민한 것이 아닐까.

말을 듣고 나서야 내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내뱉었는지 이해한 것처럼 보인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절대로 입에 담지 않을 대사를 내뱉었으니, 이기영이 오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그냥 기억상실 기믹을 쭉 밀고 나가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지금 당장은 써먹을 수가 없다는 게 아쉬울 지경이었다.

아니, 더 이상 기억상실 기믹은 써먹을 수조차 없다.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 수는 없었으니까.

“…….”

“저는….”

“…….”

“저는 기영 씨가 알고 있는 김현성 그대로입니다. 조금… 네, 당황하시는 것도 이해는 합니다. 제 모습이… 네, 익숙하지 않으시겠죠. 보기 불편하신 모습이라는 것도… 혐오스러운 모습이라는 것도 이해합니다.”

‘익숙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진짜 싸이코처럼 보여. 근데 혐오스러운 모습은 아니고….’

온몸이 피로 물들어 있잖아. 눈도 벌겋고. 그리고 무엇보다 때가 좀 많이 묻었어.

“하지만 제 말을 듣는다면 분명히… 애초에 짐을 들 필요가 없었던 거예요. 그들은 적입니다.”

‘그들이 누군데.’

“저를 회귀시킨 이들, 그리고 기영 씨가 따르고 있는 이들은 불필요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습니다. 그저 책임을 강요하고, 달콤한 말로 사람을 속일 뿐이에요. 물론 기영 씨의 신앙에 반하는 말이기는 합니다만, 굳이 저희가 그들을 위해서 싸울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을 뿐입니다.”

‘내가 아는 김현성은 그런 말을 내뱉지 않을 거야.’

그런 싸구려 대사를 내뱉고 싶었지만 뭔가 약한 듯한 느낌이다.

‘악마에게 너 자신을 팔아먹었어?’

직접 묻는 것 역시 좋은 선택지처럼 보이지 않았다.

애매할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 다시 한번 녀석의 날개를 밀쳐내 봤지만, 여전히 밀리지 않는 강경한 모습이었다.

‘왜 그래, 너. 시바.’

“그들은 기영 씨를 좀먹고 있습니다. 자신들 멋대로 평범한 사람들을 대륙으로 끌어들여 시험하고,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저 라파엘 역시 기영 씨를 꼬드기려는 수단에 불과해요. 신에게 선택받았다는 감언이설로 사람을 꼬드기고 쓸데없는 책임감을 주고 짓누릅니다.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지만, 그들은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요. 기영 씨는 대륙을 위해 일할 필요가 없어요. 자기 자신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애초에 나누는 게 아니었는데. 애초부터 짐을… 나누는 게 아니었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기대는 게 아니었어.”

‘그건 아니지.’

“무리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아플 일도 없었고, 기억을… 기억을 잃어가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어떻게….”

“자신들이 선택한 이조차 제대로 책임지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그저 끝없이 벼랑 끝으로 내몰기만 하는 이들을 기영 씨가 도울 필요는 없어요. 빛이 우리를 배신한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그들은 우리 편조차 아니었던 겁니다.”

“그래서 선택한 게….”

‘그 꼴이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

‘미친 까마귀 년, 넌 진짜 언제 한 번 뒤통수 크게 맞을 준비해라.’

솔직히 김현성의 말에 반박하기가 힘들다.

‘게네, 미친놈들 맞긴 해. 솔직히 어이없는 놈들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아.’

우리가 이곳에 자리 잡은 게 자신들의 의지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김현성을 벼랑 끝으로 내던졌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들기 싫은 짐을 떠넘기고, 본인들은 간섭할 수 없다는 변명거리 하나로 모든 책임을 인간들에게 맡긴다.

물론 이해는 할 수 있다.

애초에 이곳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고 우리가 앞으로 책임져야 할 땅이었으니까.

하지만….

‘바깥 신 정도가 메인 빌런이면 이야기가 다르지.’

이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일이 아닌가.

위협을 막아야 한다는 이유로 개인에게 멋대로 힘을 내리고, 선택하며, 그들이 싸우기를 강요하는 일.

대륙을 위해 헌신하다 기억까지 잃어가고 있는 나를 김현성이 어떤 심정으로 바라봤을지는 예상하지 않아도 뻔했다.

불합리하다고, 이건 저주며 주박이라고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번 납치 사건을 저지른 것 역시 신들이 내린 성검이 원인이지 않은가.

아마 지금 말한 것 모두가 김현성이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을까.

책임을 강요하지 말라고 울부짖던 놈의 모습이 다시 머릿속에 떠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동안은….’

김현성이 가지고 있는 윤리관, 선의의 중재자라는 성향이 녀석의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둠현성화로 인해 사고가 틀에 박히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환영할 만했지만, 이건 내가 원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루시퍼 밑으로 들어가라고?’

기분 나쁜 선택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그렇지, 루시퍼한테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느껴지겠지.’

막말로 루시퍼가 관리하는 대륙이 몇 개인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이 조그만 대륙은 그녀가 관리하는 수십 개의 대륙 중 겨우 하나일지도 모른다.

이 대륙보다 나와 김현성의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해 줬다는 것 자체는 고마웠지만, 여기서 이룰 게 있는 내게는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

아마 벨리알에게도 그리 기분 좋은 상황은 아니지 않을까.

뒤에서 루시퍼에게 받을 게 있다고 한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아니, 확신할 수 있다. 벨리알 역시 이 상황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거다.

‘내가 이뤄놓은 게 얼만데… 이걸 두고 전부 떠나자고?’

“…….”

‘개 똥 싸는 소리 하지 마, 시바. 절대로 못 줘. 내가 내 걸 뺏길 것 같아?’

수정 펀치라도 한 번 날리면 정신을 차릴까 싶기도 했지만, 내구에 의해 내 주먹이 부서질까 그렇게는 못 하겠다.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며 입술을 깨물어봤지만,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는다.

베니고어는 언제까지 구석에 처박혀 있을지 모르겠지만, 본인들이 맡긴 회귀자가 이런 상태에 처해 있다는 걸 알고 있는지나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인생입니다.”

“나를 믿고 있는 이들은.”

“그것 역시 그들의 인생입니다. 기영 씨가 책임질 필요 없는 이들입니다.”

‘우리 현성이, 시바… 삐뚤어졌잖아.’

“파란 길드는.”

“그들까지는 구원할 수 있을 겁니다.”

‘그건 마음에 드네.’

괜찮다고 느껴지는 게 한 가지 있었다면 이 모든 게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었다.

김현성이 둠현성으로 변한다고 하더라도….

‘많이 달라지지는 않았어.’

겉모습이나 눈빛에는 변화가 컸지만, 최소한 이기영을 아끼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완전히 흑화한 줄 알고 긴장했던 것도 잠시, 사춘기 소년처럼 삐뚤어진 모양새에 약간은 안심할 수 있었다.

물론 타인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테지만….

내 눈에 둠현성은 질풍노도의 시기에 혼란을 겪고 있는 청년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충분히 흔들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은 당연했다. 김현성이 내게 해를 끼칠 리가 없다.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새끼를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은 충분하고도 차고 넘친다.

평소와 다르게 강경한 태도이기는 했지만, 그래 봤자 김현성은 김현성이지 않은가.

“비켜.”

“…….”

“비켜요.”

“이러실 거라고 생각….”

“비키라고 말했습니다.”

입술을 꽉 깨물기는 했지만, 어두운 눈으로 일단은 몸을 슬쩍 비켜준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안쪽으로 뛰어갔지만, 나를 바라보는 김현성의 모습이 괜스레 신경 쓰인다.

비켜주기 싫었겠지. 본인이 저지른 일들이, 피범벅이 된 장내를 보여주기 싫을 테니까.

하지만 굳이 막지 않는 것을 보니 본인이 이렇게 강경하다는 걸 보여주려는 의도처럼 보이기도 했다.

서둘러 안쪽으로 들어온 후에는 곧바로 라파엘의 상태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손절했지만, 다시 써먹을 수 있다면 써먹는 게 맞았으니까.

‘살아 있어.’

솔직히 재기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숨은 붙어 있다. 신성력을 넣어봤지만, 반응이 있을 리 없다.

온몸이 너덜너덜해져 반 시체 같아 보였으니, 솔직히 숨이 붙어 있는 것만 해도 기적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라파엘뿐만이 아니라 다른 파티원들 역시 미약하게 숨은 쉬고 있다.

그 상태가 문제라면 문제라 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목숨은 붙어 있다.

‘써먹을 수 있을지는 진짜 모르겠다.’

“동료였잖아요.”

“적입니다. 그리고 기영 씨에게 해를 끼치려고 한 이들이기도 했고요. 1회 차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했을 뿐이에요.”

“사소한 오해로 시작된 일이었어요. 이들에게 죄는 없습니다.”

“…….”

슬쩍 고개를 돌리자, 시야에 비친 김현성의 눈에는 살의가 담겨 있었다.

아마 내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당장에라도 놈들의 숨을 끊어놓지 않았을까.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이놈들을 죽이려고 생각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어디까지나 녀석이 움직일 수 없는 이유는 내가 이 자리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신경 쓰지 마세요. 함께 가는 겁니다.”

“가지 않겠습니다.”

조금 무섭기는 했지만, 일단은 땡깡을 부려보는 게 맞다. 지금 같은 기분으로 루시퍼의 곁으로 가는 건 싫었으니까.

“강제로라도 데려가겠습니다.”

‘네가 시바, 강제로 뭘 어쩔 건데.’

주도권을 빼앗기면 안 된다. 쫄아도 안 되고 오히려 당당한 반응을 보여줘야 한다.

어둠에 자신을 팔아먹은 둠현성이라고 한들, 김현성은 김현성.

친구 한 번 못 사귀어본 놈이 영혼의 베프라고 믿고 있는 나를 쳐 낼 리 없다.

인간관계다운 인간관계를 가져보지 못한 녀석이 유일한 끈인 내게 손댈 리 없지 않은가.

애초에 타락한 이유가 이쪽에 있었다면 이 관계의 갑은 나다.

‘네가 어쩔 거야, 시바. 김현성, 네가 어쩔 거냐고.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짓고 뭐 어쩌려고. 너, 그거 시바 연기하는 거 다 알아.’

“강제로….”

‘때릴 거야? 시바, 그럼 때려봐. 아주 기절시키세요. 기절시켜서 아주 반쯤 패 죽여서 데려가 봐, 시바. 누가 손해인가. 때려! 아주 죽이라고! 대신 이거 하나만 알아둬, 시바. 나한테 손대면 거기서 우리 절교야, 절교. 거기서 우리 관계 리셋이라고.’

“조치를….”

‘기절시켜. 쉽잖아, 시바. 때리라고! 오늘 깽값 좀 받자. 빨리 때리라니까.’

“제 말에 따르지 않는다면 강압적으로… 두 번은 경고하지 않겠습니다. 진지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진지합니다.”

‘어? 시바, 너 지금 손 올렸어? 진짜로 손 올린 거야? 진짜로? 나 진짜 때리게? 때려?’

“아무리 기영 씨라고는 해도….”

‘그래, 시바. 여태껏 밥 해주고 돈 벌어주고 다해줬더니 돌아오는 게 이거라, 이거지? 지금 타락해서 뭐 눈에 보이는 거 아무것도 없다, 이거지? 그래, 시바. 때려! 아주 죽여봐! 어디 한 군데 부러뜨려 봐! 둠기영 때도 그렇게 쥐어 패더니만 왜 지금은 못 패?!’

“제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세요.”

‘시험 안 하니까 아주 반 죽여서 데려가시라고요. 지금 손에 마력 넣은 거 아니지? 그렇지?’

“정말로….”

‘그래, 정말로 때리라니까. 반 죽여주세요, 아주. 네?’

“차라리 죽여.”

‘빛은 절대로 어둠에 굴복하지 않으니까.’

시바 멋있었어.

“죽일 리가….”

‘그렇지?’

“죽여요.”

‘나 순교할 거야, 시바. 죽이라고! 순교시켜 달라고.’

김현성이 손을 커다랗게 휘두르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혹시나 이 새끼가 진짜로 때릴까 싶어 몸을 움츠리기는 했지만, 다행히 녀석이 두드린 것은 애꿎은 벽.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벽 한쪽이 무너져 내린다.

“죽일 리가… 없잖아요.”

그럼 그렇지.

“죽일 리가 없잖습니까.”

충분히 되돌릴 수 있어.

그런 생각이 절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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