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7
회귀자 사용설명서 647화
둠현성(3)
그 말 그대로였다. 흑화한 척하지만, 김현성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혼란스러워하는 눈에 눈물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놈은 지금 답답해하고 있고, 무서워하고 있다.
심지어 본인의 모습을 혐오하고 있기까지 하지 않은가.
이런 분위기로 흘러가면 안 된다는 걸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다른 조치를 못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맞다.
마음 같아서는 한 대 쥐어박아 준 이후에 함께 지옥으로 손을 잡고 룰루랄라 하고 싶을 터.
하지만 김현성이 내 몸에 손을 댄다는 선택지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새끼가… 어디서 센 척이야?’
녀석이 내게 의지한다는 것은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이 정도였을 은 누가 알았을까. 그렇기에 되돌릴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한번 생각해도 둠현성은 아까웠지만….
‘아, 시바. 진짜 너무 아까운데.’
사춘기에 접어든 김현성을 빠르게 끌고 와야만 했다. 얘, 정신 건강도 정신 건강이고 전투에서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곤란했으니까.
“죽이지 못할 거라면 제게서 떨어지세요.”
‘이 더러운 악마야! 이렇게 소리치면 너무 상처받겠지. 조금 돌려서 까야 하나? 그래도 너무 상처받지는 마, 현성아. 형도 어쩔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아무 데서나 흑화하래.’
“…….”
“실망… 실망했습니다.”
일단은 이 정도로 괜찮지 않을까.
“실망했어요.”
이 정도라도 충격받을 게 분명하다.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이 간다.
슬쩍 녀석을 바라보자 확실히 눈이 흔들리는 게 시야에 비쳤다.
입술을 꽉 깨물고 있기도 했고, 정신 공격을 받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어.’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
곧바로 고개를 돌리며 3연벙을 시도해 보는 게 확실할 것 같았다.
“정말로… 현성 씨한테 실망했어요.”
‘그 힘이 뭔지 알아? 그거 네 힘도 아니잖아. 아무리 절박해도 그렇지 어떻게 악마랑 계약해? 네가 악마랑 계약하면 내 입장이 뭐가 돼? 그리고 시바, 루시퍼? 루시이퍼어?’
“……위해서였습니다.”
“비겁한 변명이에요.”
“변명이 아닙니다. 이 방법밖에는 없어요.”
“분명히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쉽게 찾아지는 게 아니에요. 기영 씨는 겪어보지 않아서 몰라요. 아니, 만약에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일이 잘 풀린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분명히 기영 씨는….”
‘기억을 잃을 거라고? 아니면 후유증을 앓게 되거나 망가질 거라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하는 ‘그 단어’를 고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 것은 당연했다.
사실 김현성에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1회 차를 직접 겪어본 김현성만이 우리가 얼마나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지금까지 착실히 준비하고는 있었지만, 카스가노 유노와 함께 봤던 미래처럼 일이 잘 풀리지 않을 가능성도 크지 않은가.
다시 한번 대륙 멸망 축제가 벌어지거나 김현성이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이들이 깡그리 죽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물론 무의식 세계에서 일어났던 뜨거운 대화를 통해, 책임지는 것에 대한 공포를 극복한 것 같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완전히 주박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짐을 함께 들고 있는 포지션이 되어버렸을 뿐이었으니까.
그것만 해도 녀석에게는 충분히 환영할 만한 상황이겠지만 덕분에 김현성은 새로운 난제를 하나 더 떠안게 됐다.
‘만약.’
“…….”
‘만약 대륙의 승리로 모든 일이 끝난다면… 이기영은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의문.’
수많은 전투와 수많은 죽음, 수많은 고통을 이겨내 결국에 승리를 쟁취한다고 해도, 자신의 친우는 고통받을 것이라는 확신 아닌 확신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몸이 쇠약해지는 것은 물론 커다란 상처를 떠안게 될 것이다.
혹시 모를 동료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고, 고통스러워하며 자기 자신을 자책할 것이다.
점점 어둠 속으로 들어가 자괴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가슴 아파하고 종국에는 망가져 버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게 뻔했다.
김현성은 이미 한 번 겪어본 일이 아니었던가. 그 누구보다 녀석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을까.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게 아닌, 온갖 가시밭길로 만들어진 그 길을 어떻게 걸어가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연약한 이기영은 본인처럼 강하지도 않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신체는 이미 죽어가고 있고, 정신도 이미 죽어가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기억을 잃어가는 상황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예전부터 한계를 느끼고 있었고, 더 이상 짐을 공유하는 게 이로운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아 버렸다.
애써 부정하고 있던 걸 라파엘을 통해 깨달아 버린 것이다.
이기든 지든 간에 이 싸움을 계속하는 건 자신한테 유리하지 않다고. 그렇게 판단해 버렸다.
저주받은 빛의 주박에 묶인 이 남자는 그 긴 싸움을 견뎌낼 수 없고, 만약에 견뎌낸다고 해도 헌신짝처럼 버려질 거라는 걸 김현성은 그간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새끼, 참 겁 많네. 형 상처 안 받아, 시바. 기억도 안 잃는다고. 몸은 조금 쇠약해질 수 있겠지. 근데 그것뿐이야. 형 수명 6,000년이라고. 안 뒈져. 절대로 안 죽어.’
그렇게 솔직하게 고백하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지금에 와서 ‘아… 그거 새빨간 거짓말이었어. 은근히 잘 먹히고… 아프다고 하면 사람들이 챙겨주고 응원해주고 그렇더라고 그래서 뻥카 친 거야. 그래도 이해해 줄 수 있지? 우리 여전히 친구지?’라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만약 말하더라도 녀석이 믿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일단은 말은 꺼내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괜찮다고, 걱정할 필요 없다고.
“저는 괜찮습니다. 제 걱정을 하실 필요 없어요.”
“…….”
“기억을 잃는 것 역시 생각하시는 것처럼 큰일이 아니에요. 그냥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현성 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위험한 상황은 아니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거짓말.”
‘아니야, 거짓말 아니야.’
“거짓말이 아닙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너, 왜 그래. 눈 왜 그래. 한 대 치겠다, 야.’
“정말로….”
“거짓말하지 말라고! 매일 그런 식이었어. 매번 자기는 괜찮다고, 멀쩡하다고. 믿을 것 같아?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당신이 희생할 필요 없어. 생판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자신을 희생할 필요 없다고!”
‘야, 무서워. 시바, 신경질 내지 마.’
“그렇게 숨기지 마! 제길,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둠현성, 시바. 다혈질, 시바.’
조금 무섭기는 했지만, 이럴 때는 정공법으로 움직이는 것이 옳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
“정말로 괜찮아요. 저는 받아들일 수 있어요.”
눈을 똑바로 뜨고 말해야 한다. 나는 견뎌낼 수 있다고, 이겨낼 수 있다고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옳은 선택이지 않겠는가.
정의를 향하고 있는 흔들리지 않는 눈빛을 느꼈는지 녀석 역시 입술을 꽉 깨물기 시작했다. 끝이 보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조그만 변수가 생긴 것은 바로 그때.
[희귀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0/1)]
[이기영 신도! 해, 해결했어! 해결했다고!]
‘그래, 시바, 해결해서 참 좋겠네. 이미 일은 다 끝났는데. 여기 망한 건 안 보이지? 시바.’
[희귀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0/1)]
[미, 미안해.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그, 그게, 그… 그 루시퍼가 너무 복잡하게 결계를 쳐둬서 윗분들도 무척 고생했단 말이야. 그, 그리고 지금 상황에 대해서 무척 유감을 표현하고 계시기도 하고. (0/1)]
‘김현성 되돌릴 수 있어?’
[글… 쎄. 일단은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아. 알아봐야 할 것도 많고.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 이기영 신도. (0/1)]
‘…….’
[위쪽에서 이기영 신도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내리기로 결정햇어. 최, 최대한 빨리하라고 해서. 설명은 나중에 할게. (0/1)]
‘뭐야, 시바. 지금 타이밍 별로 안 좋은데. 아니, 시바, 애초에….’
라고 말을 잇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어디에선가 빛이 떨어져 내린다.
콰아아아아아아!!
엄청난 소리와 함께 황금색 광휘가 온몸을 뒤덮는다.
‘와, 이 새끼들 진짜….’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왔다.
‘뭐, 시바? 지원을 못 해?’
어째서 갑작스럽게 거대한 빛이 쏟아져 내렸는지, 그동안의 요청에 대답 한 번 없던 지원이 어째서 갑작스럽게 승인이 떨어졌는지 대해 눈치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와, 진짜 이 새끼들도….’
눈 앞에서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김현성이 그 이유였다.
루시퍼가 둠현성을 채가자 급해져 부랴부랴 이쪽에 비슷한 힘을 내린 것이 분명했다.
굳이 보지 않아도 위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에 보인다.
김현성은 이미 완전히 등을 돌린 것 같고… 심지어 루시퍼한테 커다란 힘까지 받았으니 위쪽에서 가만히 있을 수가 있었겠는가.
이대로 가면 이기영과 김현성 모두 루시퍼행 급행열차를 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놈들을 휘감았을 터.
당연하지만 위쪽의 신들이 가장 상상하기 싫은 상황이라고 할 만했다.
이미 루시퍼에게 커다란 힘을 받고 방문을 걸어 잠근 김현성 쪽에 무언가 액션을 취할 수 있을 리 만무.
그래서….
‘부랴부랴 포섭하시겠다.’
지지부진하게 움직이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보였던 위쪽의 과감한 결단은 당황스러울 정도, 특히나 현재 상황을 살펴보자면 더욱더 그랬다.
“제길! 제길!!”
창백해진 김현성의 얼굴이 자꾸만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에게는 나쁘지 않다.
‘이야, 공짜다! 공짜 레벨업이다!’
혹시나 루시퍼가 여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는지 떠올리며 훈훈하게 원 따봉을 날리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김현성에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성스러운 현상이 반갑게 보일 리 없다.
‘형 레벨업한다! 나도 신화 등급 코인 탄다!’
아마 녀석의 눈에는 안 그래도 죽어가고 있는 이기영에게 저주받을 주박을, 무거운 운명을 씌우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최소한 지금 얼굴을 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제길! 하지 마! 하지 마! 이 개새끼들아! 하지 마! 내버려 둬. 내버려 두라고!”
‘아니야, 해야 돼. 더 해줘! 빛 줘! 빛 줘엇!’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더 이상 짐을 들게 하지 마!! 더 이상!! 기영 씨! 거기서 나와요! 거기서 나오라고요!”
‘아니야, 이게 내 운명인가 봐. 아무래도 빛과 함께하는 게 내 운명인가 봐. 그리고 어떻게 나가, 빛이 나를 가두고 있는데. 못 나가.’
최대한 검을 휘두르며 손을 뻗고 있었지만, 김현성의 신성한 빛에 가로막혀 전진하지 못했다.
팔에서 치이이익 소리가 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빛 안으로 기어들어 오는 꼴은 조금 감동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하지 마…. 흐으윽, 하지 말라고. 더 이상 뭘 어쩌려고… 더 이상 뭘 어떻게 하라고….”
“괜찮습니다, 현성 씨. 제가 선택한 길이에요.”
자신의 모든 걸 걸고 대륙을 위해 싸우는 희생의 정석, 성자 그 자체의 모습.
종국에는 망가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운명을 받아들이는 광휘의 빛기영.
솔직히 내가 의도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아, 김현성 이 새끼 이거 어떻게 해.’
이 멋있는 설정을 즐길 수도 없을 정도로 절박한 얼굴을 보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