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9
회귀자 사용설명서 649화
둠현성(5)
물불 안 가리고 달려오는 모습이 그다지 무섭게 보이지는 않는다.
센 척할 여유가 사라진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내게는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보쌈해서 루시퍼 동네로 데려가는 것은 포기한 것인지 궁금했지만, 지금 녀석에게 그런 생각을 할 여유는 없어 보였다.
혹시나 몸에 이상은 없는지, 다른 부작용을 떠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는 것이 최우선이 아닐까.
나 역시 내 몸에 이상이 있나 싶어 한차례 점검을 마쳤지만, 딱히 다른 부작용이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시간이 걸린 거겠지.’
쏟아져 내리던 광휘는 아마 내 몸이 신성을 받아들이게 하는 과정이었을 거다.
루시퍼가 김현성에게 힘을 내린 것처럼 내게 힘을 내렸다면 몸이 뻥 하고 터져 나가지 않았을까.
아마 베니고어를 비롯한 윗분들 역시 최대한 다른 부작용이 없게끔 조치해 줬음이 분명하다.
만약 부작용을 얻을 시 둠현성이 8톤 트럭을 끌고 청와대로 돌진하는 상황을 그리고 있지 않았을까.
아니, 중간에 이빨을 털지 않았다면 지옥에서 힘을 키운 전술 김현성이 위쪽으로 떨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조금 안타까운 것은 이런 조심스러운 과정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양에 한계가 있었다는 것.
둠현성도 날개 10장을 받았으니, 내게도 10장을 내리고 싶었겠지만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듯했다.
슬쩍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뛰어오는 김현성이 눈에 보였던 탓이다.
“아, 아아….”
‘아이고, 우리 회귀자 좀 보세요….’
그 난리를 쳤으니 당연히 몸은 상처투성이, 신성력에 의해 그을린 흔적들이 여기저기에 비쳤다.
뭐라고 말을 내뱉고 싶은 것 같았지만, 목이 메는지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모습은 양심의 표면에 스크래치를 남길 정도였다.
언어 기능에 문제가 생겼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아, 으….”
김현성에게 현재의 내가 어떻게 비칠지 궁금하기도 했다. 내가 생각해도 현재의 내 모습이 익숙하지 않았으니까.
순백색의 날개를 넘어 빛으로 이루어진 날개는, 그 어떤 수식어도 어울리지 않는다.
깃털 한 장, 한 장이 찬란한 광휘로 이루어져 있었으니까.
전체적으로 후광이 비치고 있었고, 강림한 베니고어와 비교해도 지지 않을 정도로 신성해 보이기도 했다.
이전에 빛 폭탄 물약을 먹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찬란한 비치 어두운 장내를 가득 채우고 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상 모든 더러운 것들을 정화할 수 있을 것 같은 모양새.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내가 밟은 곳을 중심으로 빛이 짧게 퍼져 나가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신세계의 신! 빛, 빛, 빛, 그 자체.’
내 모습이기는 하지만 오금이 저린다. 아마 김현성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내 모습을 보더라도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다.
이 자는 결코 더럽힐 수 없는 순결한 빛을 지니고 있다고 말이다.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간 것은 당연했다.
‘루시퍼 누나, 시바, 보고 있어?’
아직까지 그녀가 노리는 게 뭔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모습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복수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누나는 선을 넘은 거야, 알겠어?’
만약 어둠 쪽으로 넘어가더라도 내가 그녀의 밑에서 일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애초에 설계 자체가 잘못됐다. 나와 김현성의 관계가 사소한 사건으로 인해 깨질 리 있겠는가. 대가리가 깨져도 김현성은 이기영을 선택할 거라 장담할 수 있다.
실실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참아내는 것도 잠시, 일단은 살며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이제 아무 문제 없는 거 맞지? 그렇지?’
물론 녀석이 완벽하게 되돌아온 것은 아니다. 여전히 땅에 끌리고 있는 칠흑의 날개가 눈에 거슬렸으니까.
하지만 대충은 예상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김현성이라고 한들, 몸 안에 눌러앉아 있는 초월자의 힘을 내보내는 게 쉬울 리가 없다. 힘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거겠지.’
김현성은 이미 독을 삼켰다. 베니고어조차 해독할 수 없다고 말해오는 것을 보면, 당장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거다.
괜스레 얼굴이 일그러지려고 했지만, 루시퍼가 계획한 것은 무위로 돌아갔다. 루시퍼가 지금 이 장면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당장 빛에 취한 김현성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
“죄… 송, 죄송… 합니다.”
‘일단 사과부터. 좋아, 좋은 흐름이야. 갑자기 막 화내고 그러지 않을 거지? 그렇지?’
최근 들어 김현성이 우는 장면을 많이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반쯤 엎어져 있는 것 같아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화들짝 놀라며 한 걸음 떨어지려고 했다.
스스로 몸을 일으키지만, 쉽사리 다가오지 않는 걸 보니 차마 옆으로는 다가올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피범벅이 되어 있었고, 본인의 기준으로도 흉측한 날개를 달고 있지 않은가.
신성하다 못해 눈이 멀어질 것만 같은 광휘와 대조된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겠지.
뭐, 시간이 지나면 차차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루시퍼의 힘은 점점 사라질 테니까.
“죄송… 합니다.”
‘그래, 죄송해야지. 진짜 망하는 줄 알았자너.’
“죄송… 죄송합니다.”
‘너, 나 때리려고 그랬잖아. 시바, 그건 진짜 반성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모두, 모두 죄송합니다.”
‘다른 건 다 괜찮아. 형이 이해해 줄 수 있어.’
“흐으으윽, 죄송합니다.”
‘아, 이거 시바,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구나.’
단순히 루시퍼의 힘을 받아들인 걸 사과하는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본인과 연관된 것 자체를 미안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본래대로였다면 평범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었던 이기영이 자신과 연관되어 복잡한 일에 휘말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그럴듯하죠.’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게 했다고, 회귀자였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게 아니었다고, 짐을 떠넘기는 것이 아니었다고 하는 눈물 젖은 사과.
모든 걸 다 자기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나를 원망하는 것보다는 더 나은 선택이겠지만 너무 자책감에 빠지는 것은 정신건강에 이롭지 않다.
아직까지 조금 불안정해 보이는 만큼 슬슬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지 않을까.
드디어 놈이 이야기할 수 있는 상태에 온 것 같았으니까.
‘마침 시간도 시간이니까.’
거대한 빛이 떨어진 곳이 보인다. 던전을 뚫고 들어온 빛으로 인해 새로운 출구가 생겼다는 것은 환영할 만한 부분, 살짝 날개를 펼치자 천천히 몸이 떠오르는 게 느껴졌다.
익숙하지는 않지만 조금은 신기한 감각, 여왕의 무덤의 꼭대기에 살짝 걸터앉자 이윽고 김현성이 나를 따라 올라왔다.
광활한 대륙이 한눈에 보인다. 어둑어둑하기는 했지만, 꺼지지 않는 불빛들 때문에 반짝거리는 야경이 시야에 비쳤다.
“좋은 광경이네요.”
“…….”
“정말로 좋은 풍경입니다.”
‘감정 잡자, 기영아. 방심하지 마. 모든 일에는 마무리가 중요하잖아. 마무리가 반이야. 정신 차리고 집중해야 돼.’
이 광경은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하지만 불쌍하게 보이는 건 최대한 지양하는 것이 옳다.
시원섭섭한 얼굴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내게 주어진 운명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옳다.
‘슬프지 않아.’
이기영을 슬프지 않다. 지금 눈에 담은 광경은 언젠가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지겠지만, 언제든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풍경이니까.
외로워도 슬퍼도 이기영은 무너지지 않는다. 소중한 동료들이 함께 있어 줄 테니까.
이기영은 비극의 히로인이다. 툭하면 부서질 것 같은 몸으로 모든 운명을 그 여린 몸으로 기쁘게 받아들이는… 절대로 대륙을 저버리지 않는 그런 사람이다.
저도 모르게 눈물에 젖은 눈으로 다시금 야경을 눈에 담았다.
흘러내리는 한 방울의 눈물에는 운명에 대한 괴로움이 아닌, 이 아름다운 광경에 대한 감탄이 들어서 있다.
대륙에 살아가는 이들의 생동감과 자연이 빗어낸 위대한 풍경을 향한 순수한 영혼의 울림이다.
‘와, 시바. 내 눈물 빛난다.’
신화 등급으로 진화한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떨어진 눈물은 계속해서 반짝였다.
놀라움을 표현한 것도 잠시, 김현성이 조심스럽게 이쪽을 바라봤다.
“정말로….”
“네.”
“정말로 괜찮….”
“네.”
“정말로 괜찮을까요?”
“네, 괜찮을 겁니다.”
“…….”
“분명히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혹시나 일 꼬이면 네가 애들 데리고 튀어줄 거잖아. 그럼 아무 문제 없는 거지, 뭐.
“정말로… 견딜 수 있으시겠습니까.”
“네, 혼자라면 불가능하겠지만, 모두가 함께해 준다면.”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겁니까.”
“했던 말 또 하게 만들지 마세요.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기억을 잃으면 버리실 거….”
“아니요, 절대….”
“그럼 홀대하실….”
“아니요.”
“그럼 아무 문제 없습니다. 물론 아쉽지 않은 건 아니지만….”
“…….”
“물론 지금까지 쌓아왔던 추억들을 잊어버린다는 건… 조금 가슴 아프기는 합니다.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요.”
“…….”
“하지만 이전의 시간보다는 함께할 시간이 더 많지 않겠습니까. 하얀이도, 덕구도 그리고 다른 길드원들 모두 말이에요. 어쩌면 이전보다 더 즐거운 일이 많이 생길지도 모르죠. 웃을 일이 더 많을 겁니다. 지금 보이는 풍경처럼 말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 안 될 거야.’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이 풍경을 잊을 날이 올 겁니다. 하지만, 하지만… 언제든지 같은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을 거예요. 이 풍경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으니 말입니다.”
‘아직도 이해 안 되겠지.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대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건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어요.”
‘기다려, 현성아. 곧 이해할 수 있게 될 거니까.’
슬슬 타이밍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변함없는 하늘이 괜스레 원망스럽다.
아무 말 없이 하늘을 바라보며 오랜 시간 대기하는 게 괜스레 민망해질 때 즈음 드넓은 하늘에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준비하고 있던 마지막 이벤트는 당연히 이기영과 함께 감상하는 노을 쇼. 나를 바라보던 김현성이 고개를 돌린 것도 바로 그때였다.
사실 나와 함께 감상하는 노을 쇼에 김현성이 얼마나 반응할까 싶기도 했지만, 예상한 것보다 더 반응이 좋은 것 같다. 실시간으로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정확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알 수는 없었겠지만 아마 이해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멋진 풍경이네요.”
대외적으로 나는 노을에 대해 기억하고 있지 못하고, 사실 실제로 일어난 일도 아니었지만, 느끼고 있는 바는 같다.
이전에 있었던 일을 잊는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를 새로운 추억이 메울 수 있다.
말로 이것저것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김현성은 충분히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깨가 부르르 떨리고 있는 모습.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솔직히 여기서부터는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다만 부정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 이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있지 않을까.
“만약에.”
“…….”
“만약에 제가 지금 보는 광경을 잊는다면….”
“네.”
“다시 함께 보러 와주세요.”
“흐, 으윽… 네.”
“그거면 됩니다. 이걸 다시 볼 수 있다는 거.”
“…….”
“그거 하나만으로도 충분해요.”
“흐으윽… 흐윽… 네… 네.”
눈물샘이 터진 김현성의 얼굴을 보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잘 돌렸어.’
잘 받아넘겼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현성이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추억을 지키고 싶다.’
라거나.
‘이 장소를 지키고 싶다.’
와 같은 생각 말이다.
김현성이 저 먼 곳을 바라봤다. 한 단락이 종결됐고, 회귀자는 다시 일어서야 하는, 대륙을 위해 싸워야만 하는 이유를, 다시 한번 가슴속에 새기게 됐다.
그리고.
그 날 오후.
북부의 저편에서.
거대한 빛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인류가 보지 못했던, 이질적인 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