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3
회귀자 사용설명서 653화
대륙을 구하고 있는 영웅(2)
그만큼 장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한소라가 최대한 별것 아니라고, 빌드업을 하며 입을 털어놨지만 신경을 안 쓸 수가 있겠는가.
만약 내가 정하얀과 같은 입장에 있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불편할 만한 상황이었다.
이를테면 김현성이 비밀리에 군사나 행정원들, 혹은 연금술사를 키우고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심지어 그 연금술사가 이기영에 비견될 정도로 천재라고 불리고 있단다.
어느 날부터 김현성이 나를 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시점에 갑작스럽게 도착한 문자 하나가 같은 내용이었다면 어땠을까?
[진청 씨, 이번 연구… 무척 기대하고 있습니다. 진청 씨가 대륙 연금술 발전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거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네?]
[아, 죄송합니다, 기영 씨. 손거울이 해킹당한 것 같… 담아두지 마세요. 정말로 해킹당한 것 같습니다.]
[뭐야? 시바, 뭐예요? 너, 지금 나랑 장난쳐?]
단언컨대 나였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새끼를 악마소환사로 만들어 버리지 않았을까.
나에게 목매는 정하얀이라면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는 않을 것이다.
박미진이라는 가상의 마법사에게 분노를 보내는 것은 기본이고, 제거하지 않고서는 성이 안 풀릴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어쩌면 대륙 내에 있는 모든 미진이들이 목숨이 위협받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쪽이 관리하고 있는 인재풀을 그녀가 제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다.
나였다면 그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아직 성장판이 닫히지 않은 정하얀에게는 한 가지 선택지가 더 있다.
‘실력.’
실력으로 찍어 누르고 누가 위인지 직접 증명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만약 본인의 실력에 자신이 없다면 전자의 선택지로 기울만도 하지만, 정하얀은 나와는 다르다.
조금 나태해지기는 했지만, 그녀의 본질은 천재 마법사였고 대륙 세계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의 성장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압도적으로 1순위지.’
이를테면 대규모 범위 마법이라든가….
김현성으로서는 불가능한 부분을 정하얀은 맡아줄 수 있다.
마무리는 김현성의 역할이지만 성장한 정하얀이 없다면 그곳까지 닿을 수 없다는 게 학계의 정설.
아마 한소라도 내가 지금 생각한 것들을 이해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기왕이면 정확한 미션을 전해주고 싶지만, 현재 그녀가 메시지를 볼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
입술을 꽉 깨물며 정하얀이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 기다리고 있었다.
-…….
-물… 론 헛소리 일 거예요. 정하얀 님에게 비교할 수 있을 리가….
-…….
-없지만요….
-끄으윽, 싫어. 진짜 싫어… 박미진, 진짜, 진짜 짜증 나. 그, 그, 그렇지? 박미진, 짜증 나지?
-네, 저도… 네, 짜증 나죠….
‘조금 더 자세히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일단은 저질렀지만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의 한소라를 보고 떠오른 것은….
‘아, 나 이제 가능할지도 모르네.’
내게도 베니고어가 했던 것과 비슷한 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것.
‘나 이제 날개 달렸잖아. 신성도 얻었고.’
사념을 전달하거나 퀘스트를 내리는 게 가능해지지 않았을까.
안에 있는 신성을 조금 떼어낸다는 느낌으로 천천히 운용하며 한소라에게 보내자 확실히 뭔가 전달되는 느낌이 든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담자 꽤나 그럴듯해진 듯한 느낌이다.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북서쪽을 박미진이 담당하게 됐다고 이야기해 주기. (0/1)]
[한소라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어 한소라는 보상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뭐야, 진짜 되잖아.’
정말로 이게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진짜 됐어, 시바.’
신화급의 격을 받은 거나 다름없으니 반신이라고 칭해도 괜찮지 않을까.
망원경으로 보이는 한소라 역시 무척 깜짝 놀라는 모양새, 하지만 내가 무슨 수를 썼다는 걸 깨달았는지 공포를 딛고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 아, 아마도 박미진 그… 사람이 북서쪽 지역을 담당하게 될 것 같아요. 그….
-원래는….
-네, 그… 정하얀 님이 모두… 그러니까 담당하시기로 했지만… 여러모로 신경 쓸 사안이 많으니까요. 아마 부길드마스터가 정하얀 님의 건강을 신경 쓰고 계신 거 아닐까요? 마력의 소모가 많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걸지도 모르죠. 아무래도 혼자 모든 곳을 케어하기에는 체력적으로 힘들 수 있으니까요.
‘잘하고 있어. 엄청 잘하고 있다고.’
폭발할 듯싶을 때 곧바로 약을 처방하는 현묘한 솜씨는 내가 보기에도 놀랍다.
정하얀이라는 폭주 기관차를 능수능란하게 운용하고 있는 걸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심지어 무대가 절벽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감히 신들린 드리블이라고 표현해도 어색하지 않으리라. 일종의 존에 들어간 것만 같은 무아지경의 경지.
저건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생존 회로가 저절로 내뱉고 있는 대사들이었다.
-그런… 가?
-네, 그렇지만….
-으응, 끄윽….
-조금은 주의하실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물론… 부길드마스터에게 다른 의미는 없겠지만… 미진이라는 분이 부길드마스터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지 모르니까요. 평범한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고… 그리고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니까, 아무래도 부길드마스터도 신경이 많이 쓰이진 않을까 싶기도 해요. 부길드마스터는 인재들을 많이 아끼잖아요? 그 박미진이라는 마법사가 우연히 눈에 띈 걸지도 모르죠.
-죽, 죽, 죽, 죽이는 게 좋을까? 찾아내서… 찾아내서 죽이면, 아, 아직 나보다는 약할 거야. 그렇지? 충분히 제거할 수 있어.
‘안 돼, 죽이면 안 돼.’
있지도 않은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저건 말려야 돼. (0/1)]
[한소라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어 한소라는 보상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죽, 죽이자. 그래, 죽이는 거야. 그럼 깔끔하겠지? 그런 거지?
-죽… 이면 안 돼요. 죽이면… 그… 부길드마스터가 분명히 알아채실 테니까… 그러니까, 네, 제발 죽이면 안 돼요. 죽이면… 제발, 그런 생각은 하시면 안 돼요.
‘힘내, 소라야. 굳세어라, 한소라.’
-그냥… 그냥 알려주면 되는 거예요, 부길드마스터에게. 네, 알려주면 되겠죠. 직접 증명하는 거예요.
-예, 예전에 순수를 증명했던 것처럼?
-아니요! 순수 증명 말고요! 순수 증명은 안 돼요! 순수 증명 아니라… 제가 말을 잘못했네요. 다른 마법사는 필요 없다는 걸 증명하는 거죠. 더 이상의 인재는 필요 없다고 확실하게 목을… 아니, 못을 박아두는 거예요.
-아….
-박미진도 필요없고 다른 이들의 도움이 필요 없을 정도로, 정하얀 님이 강해졌다는 걸 증명한다면 아마 다시 돌아와 주지 않으실까요? 물론 지금 상태로는 조금 힘들 수도 있겠지만… 네, 정하얀 님이라면 여기서 더 강해지실 수 있으시잖아요. 그렇죠? 그렇겠죠?
-으… 응.
-자존감을 조금 더 높이셔도 돼요. 정하얀 님은 충분히 귀엽고, 아름다우시고 능력 있으시니까. 부길드마스터도 푹 빠져 계시잖아요. 이렇게 따로 메시지를 여러 개 보내주실 정도니까. 으응, 그렇죠. 바쁜 와중에도 항상 정하얀 님을 생각해 주고 계시니까.
-그, 그래도 미진이도… 강해지면 어떻게 하지?
-지, 지가 강해져 봤자… 뭐 얼마나 더 강해질 수 있겠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을 걸요. 정하얀 님은 천재니까. 특별하니까요.
-그, 그, 그런가?
-네, 네, 그래요. 그런 거예요.
크게 숨을 몰아쉬는 한소라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몇 번이나 정통으로 살기를 맞았으니 저런 표정을 지을 만도 했다.
나 역시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의 승부, 폭발하려는 자와 도화선을 끊으려는 자의 대결은 저절로 입을 벌리게 했다.
일단은 한소라의 판정승이 선언된 것 같았지만 이대로 방심할 수 없다는 건 그녀가 잘 알고 있지 않을까.
겨우 첫 번째 위기를 넘긴 것뿐이다. 이후 공부하며 폭발할 정하얀을 말리는 것이 진짜 게임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터.
나 역시 불안하기는 했지만 저렇게 단호한 얼굴을 보니, 그녀를 믿어도 될 것처럼 느껴졌다.
숨쉬기 힘들어하는 와중에도 정하얀을 챙기는 모습은 그야말로 진정한 영웅의 모습.
한소라가 대륙을 구하는 중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정말로 모든 일이 다 끝나고 나면 그녀에게 공로상을 챙겨주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그 정도로 지금 보이는 모습은 마치 자기희생적인 영웅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
‘네가 영웅이야. 조금만 더 힘내. 네가 영웅이라고.’
-오늘부터… 공부 시작하는 게 좋겠네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만큼 잘 도와드리고… 부길드마스터에게도 여러 가지로… 네, 좋은 말씀 많이 전해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끄윽, 고마워. 고마워, 소라야.
-고맙긴요. 저야말로 항상 감사하죠….
남과 신체접촉을 잘 하지 않는 정하얀이 한소라를 살짝 껴안는 것으로 마무리된 훈훈한 장내.
물론 깜짝 놀란 한소라는 뱀에게 묶인 개구리 꼴이 되기는 했지만, 무척 기뻐 보이는 얼굴이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감사의 인사라도 드리고 있는 듯한 모양새, 본인이 무사하다는 것에 기도를 드리고 있지 않을까.
나 역시 박수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아직 조금 불안한 면이 있기는 했지만 일단 정하얀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얻었다는 게 중요하지 않은가. 무척이나 안정적으로.
일어난 이후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일 중 하나를 대충이나마 정리한 것 같은 기분에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할 게 많으니까. 최대한 빨리, 효율적으로 해결해야지.’
내부도 정리해야 하고, 외부도 정리해야 한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고 했으니, 파란 길드를 케어하면서 대륙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 알아보는 게 맞겠지, 뭐. 이대로 계속 하얀이를 예의주시하면서 정확히 며칠이 남았는지 알아보는 게 먼저.’
대충이나마 정리를 마친 이후에 방문을 열었던 순간이었다.
[희귀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이, 이기영 신도! 아니, 이기영 후배님! 일어났구나! (0/1)]
‘…….’
[갑자기 퀘스트가 생성돼서 깜짝 놀랐네. 역시 우리 이기영 후배님은 적응이 빠르다니까. 아, 그러니까… 내가 우리 이기영 신도 사랑하는 거 알지? (0/1)]
‘…….’
[이기영 후배가 적응이 너무 빨라서 진짜 놀랍더라고… 곧바로 이렇게 퀘스트를 생성해서 자기 신성을 사용할 줄은 누가 알았겠어. 아마 이기영 신도의 바람에 시스템이 응답한 것 같네. 이렇게 곧바로 시스템과 파장을 맞추기가 쉽지는 않은데… 이기영 신도가 대륙을 위하는 마음 때문에 현재의 시스템도 이기영 신도를 환영하는 게 아닐까 싶어… 지금 당장은 퀘스트를 내리는 것 정도가 전부지만 아마 여기 오면 더 많은 걸 할 수 있을걸. (0/1)]
‘…….’
[속마음을 읽을 수도 있고… 그것 외에도 여러 가지. 윗분들이 이번 결과에 대해 아주 만족하고 있어…. 우리 계속 가는 거 맞지? 이기영 신도? 함께 가는 거지? 같은 주식 탄 거 맞지? 한날한시에… 함께 매도하고 매수하는 거… 그거… 나도 하고 싶, 싶은데. (0/1)]
‘각설하고…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만 말해. 시바, 이거 진짜로 너네 때문 맞아?’
[…… (0/1)]
‘진짜로 너네 때문 아니지?’
[…… (0/1)]
‘진짜로 너네 때문 아닌지 묻고 있잖아요, 베니고어 님.’
[그러니까, 완전히… 그때의 사건이 영향이 없지는 않은데… 일, 일단은… 그 균열이 열려서, 잠깐만… 아직 이쪽에서도 조사 중이라… 그러니까 위쪽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상황이니까. 나도 최대한 여기저기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해서 여러 가지로 뛰어다니고 있거든. 아, 아무튼 위가 원인은 아니야. 어쨌든 일어나야 하는 일이었고… 그, 아무리 우리라고 하더라도 이미 정해진 일에는 저항할 수 없는 법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원망하지 말고… (0/1)]
‘며칠 남았어, 이거?’
[희귀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36일…. (0/1)]
‘시바….’
[희귀 등급의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이기영 신도… 할 수 있지? 힘도 받았으니까. 할 수 있는 거지? 나 버리는 거 아니지? 버리는 거 아니잖아. (0/1)]
[전설 등급의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36일 후에 베니고어와 함께 대륙을 지켜주세요. 제발… 함께 지켜주세요. (0/1)]
[보상-여신의 사랑]
‘자꾸 신성 소비하지 마, 시바… 전설 등급 퀘스트 같은 거 뿌리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