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4
회귀자 사용설명서 654화
화해하길 바라(1)
[희귀 등급의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36일 뒤에 대륙을 지키고, 베니고어의 사과 받아주기. (0/1)]
[보상-여신이 만든 사랑의 디너]
‘안 먹어, 시바.’
얘가 어째서 파산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굳이 일반 등급으로 전해도 되는 퀘스트를 어째서 희귀 등급으로 보내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지경.
얼마가 들어왔으면 얼마를 써야 하는 개념이 잡히지 않은 것은 아닐까.
베니고어의 씀씀이에 대해 잠시 고민해 봤지만, 그녀의 낭비벽보다는 그녀의 말이 더욱더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36일… 36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아니, 절대로 긴 시간이 아니다. 단언하건대 촉박하다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정하얀 각성 프로젝트를 무사히 떠넘기기는 했지만 한소라가 너무 몸을 사리면서 해결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겨우 36일, 겨우 36일 동안 2회차 정하얀이 1회차 정하얀을 앞지를 수 있을까?
조금 더 빡세게… 차라리 한소라라까지 떼어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
“…….”
‘아니야. 미친 생각이야.’
그거야말로 정하얀을 폭발시키는 방법이라 단언할 수 있다.
지금까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미친 짓을 벌여온 만큼 억제기까지 사라진 정하얀이 어떻게 반응할지 예상하기가 너무 어렵다.
‘한소라는 무조건 있어야 돼.’
정하얀 억제기는 무조건 현재의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어야 했다.
빠르게 머리를 굴려봤지만 역시나 5일에서 10일 정도는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만약 터뜨릴 거라면 하루나 이틀 전에 터뜨리는 게 효과적이다.
그래야 그 울분을 비둘기들에게 풀 수 있을 테니까.
섣부르게 터뜨렸다간 비둘기들보다 정하얀을 먼저 상대하게 될 수도 있다.
[이기영 신도… 나 버리지 않을 거지? 그렇지? (0/1)]
‘시바, 말 좀 그만 걸어주세요, 베니고어 님. 머리 굴리고 있잖아요.’
그것 말고도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병력의 배치 문제.
이지혜가 가이드라인을 짜주기는 했지만 민감한 주제일 수밖에 없는 만큼, 여러 집단과 언성을 높일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이기영은 독재자처럼 보이지만 독재자는 아니다.
각 무력집단의 이해관계를 생각하며 벨런스를 맞추는 편이었고, 간혹 강압적일 때가 있기는 했지만 그나마 여러 가지 의견을 들어주는 편이었다.
‘이렇게 해. 저렇게 해’라고 말하는 독재자의 말로는 죽음뿐이지 않은가.
‘하나하나 의견 조율해 주고 씨름 하는 것만 해도 일주일은 넘게 걸릴 텐데….’
라파엘이 36일 안에 일어나 주면 좋겠지만, 이 새끼가 제대로 싸워 줄 수는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리 회복력이 빠른 편이라고는 하지만, 반병신이 되어서 깨어나는 게 기적이었으니까.
만약 정말로 정체불명의 천재 마법사 박미진이 있다면 그녀를 데려와 북서 지역을 틀어막고 싶은 심정, 천사는 지금 몇 기나 만들어졌는지 모르겠다.
네임드기 위주로 신성을 부여해 줄 수 있다는 건 기쁜 소식이기는 했지만, 물량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
퀄리티가 떨어지더라도 개수를 채우는 게 나은지 아니면 집중적으로 퀄리티를 뽑아야 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정 안 되면… 진짜 손절해야겠는데.’
한 달 정도는 더 시간이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정말로 한 달 정도 남았다는 확언을 들으니 똥줄이 탈 수밖에 없다.
심지어 조혜진과 김현성의 문제는 또 어떻게 해결해 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별것 아닌 갈등처럼 비칠 수 있지만, 조혜진은 김현성을 보좌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전위 중 한 명이 아니었던가.
아주 약간의 변수조차 용납하기 싫은 내 입장에서는 김현성이 조 씨를 밀어내려고 하는 게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물론 우선 순위로 분류하자면 하위권에 분류할 수 있으니….
‘이건 나중에 시간 날 때 자리 한번 만들어보는 거로 퉁 치는 게 좋지 않을까? 일 다 끝내고… 응,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제3자가 자꾸만 남의 연애사나 관계에 끼는 것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고, 무엇보다 지금은 한시가 급한 상황이 아닌가.
조혜진에게는 조금 고통스러운 시간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일단 김현성 조혜진 프로젝트는 후일담으로 미루는 게 현명하게 느껴졌다.
문제가 있다면 저 멀리서부터 그녀의 얼굴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했다는 것.
아까보다 더 빨라진 발걸음으로 몸을 옮기자, 아니나 다를까 측은한 표정을 하고 있는 조혜진과 그런 그녀를 위로하고 있는 이지혜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빨리도 오셨네요.”
‘누나, 너무 타박하지 마. 일하고 온 거야. 나도 나름대로 힘들다고.’
“부길드마스터.”
“아! 혜진 씨.”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혜진 씨는…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습니다. 하하, 괜찮아요.”
당연하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전혀 괜찮은 것 같지 않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나보다도 더 머리 아파 보이는 표정, 마치 세상 근심을 모두 가진 것만 같은 외관이라 할 만했다.
왠지 모르게 양심이 쿡쿡 찔려오는 기분. 나답지 않게 조혜진의 얼굴을 똑바로 보기 미안해진다.
아마 몸에 가득 들어차 있는 신성이 남아 있는 한 줌의 동정심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솔직히 내 잘못이 아니기는 했지만 그래도 불쌍해 보이기는 했으니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전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감정이 아닌가.
최대한 괜찮은 척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흘러나오는 분위기 자체가 너무 어두워 보인다.
‘미안해, 혜진아. 내가 진짜 수습해 주려고 했는데… 시간이 너무 부족한 것 같아서… 이해해 줄 수 있지? 우리 친구잖아. 36일밖에 안 남았다고 하는데… 다른 일부터 해결하는 게 먼저잖아… 오늘 회의도 제법 시간이 걸릴 것 같고… 여러 가지로 할 일이 많아.’
“저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길드마스터. 튼튼한 몸 정도밖에 자랑할 게 없으니까요. 그 정도가 끝이죠, 하하….”
“무슨 말을 그렇게 하고 그래요, 혜진 씨. 키도 크시고, 피부도 이렇게 좋으신데. 행정 일은 처리하는 건 또 얼마나 잘해요? 파란 길드가 혜진 씨 없으면 어디 돌아가나요? 체스도 잘 두고… 어제 저도 엄청 고생했잖아요.”
‘뭐야, 누나 어제 얘랑 체스 뒀어? 혜진아 니가 어떻게 날 두고… 누나랑 체스를 둬.’
“하, 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빈 말이 아니라니까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나한테 물어보지 마, 누나. 지금 조혜진 얼굴 쳐다보기가 조금 그래. 근데 얘 피부 좋은 건 맞아. 인정해.’
이지혜의 질문에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리자 눈에 보이는 조혜진의 동공이 신경 쓰인다.
‘죽어 있어….’
사실 조혜진의 입장에서만 생각해 보면 극한 상황이라는 말이 부족하지 않다.
친구가 기억상실에 걸리는 것으로 모자라 납치극에 휘말리며 죽어가고 있었고, 친구의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건만 결과적으로는 그 비밀이 드러나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그 비밀을 지켜주는 댓가로 좋아하는 이의 적대심을 얻었으니 멘탈이 남아날 리 있겠는가.
이렇게 풀어 정리해도 복잡하게 보이는 상황에서 그녀가 얼마나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다.
아마 김현성이 둠현성으로 변한 줄 모르는 그녀였으니 더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걔, 지금 좀 사춘기 같은 거야. 네가 이해해 줘야 돼’
그렇게 말을 내뱉고 싶은 심정. 하지만 먼저 입을 연 것은 조혜진이었다.
“죄송합니다, 부길드마스터.”
‘…….’
“결과적으로… 그… 비밀을 지키지 못하게 돼서… 죄송합니다.”
‘아니, 혜진아. 너 진짜… 왜 그래. 죄송할 게 뭐가 있어. 자꾸 미안해지게 그러지 마. 네가 말한 것도 아니잖아. 근데 왜 네가 책임을 지려고 그래?’
“아니요, 혜진 씨 잘 못이 아닌데….”
“아니요, 제 잘못이 맞습니다. 애초에 라파엘에게 말한 것도… 저였고, 이 모든 일을 만든 것도 저였습니다.”
“아니, 뭐 친구끼리 그렇게 사과하고 그래요. 엄밀히 말하면 현성 씨를 포함해서 몇몇밖에 알고 있는 사람이 없으니 이전과 별 차이 없습니다. 그렇게 자책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리고 당시에 혜진 씨가 따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아니, 너 진짜 왜 그래. 사람 미안해지게… 제발 내 양심을 건드리지마. 어차피 움직이지 않으니까.’
“몸은 조금 괜찮으십니까?”
‘괜찮기는 한데… 네가 나를 걱정해 주면 내가 지금 좀 그래.’
“다른 부작용이 없으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네가 너무 내 양심을 찔러.’
이렇게까지 양심이 찔려오는 것은 확실히 오랜만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조금은 원망하거나 틱틱거리는 소리를 내뱉어도 상관없으련만, 진심을 다해 이쪽을 걱정하고 있는 모습은 괜스레 심장을 울린다.
‘아, 이거 하루 정도만 빼볼까?’
어차피 하루 정도는 시간이 있을 것 같기도 했으니까.
개인 시간을 조금 모으고 모은다면 조혜진의 일을 수습할 시간을 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중간 중간 휴식시간을 취하면 되고, 앞서 말한 것처럼 얘가 계속 이런 상태면 곤란한 건 이쪽이지 않은가.
‘아, 자꾸 합리화하면 안 되는데… 정말 시간 없는데.’
“정말, 얼마나 놀랐는지. 그래도 이렇게 건강하게 계신 모습을 보니 확실히 안심됩니다. 정말로 당시에는 너무 놀라서… 다른 생각은 할 여유도 없었는데… 생각해 보니 또 사과드릴 일이 있네요.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고개 숙이지 마, 야….’
“아니, 무슨 고개까지 숙이고 그래요. 뭐 다 좋게좋게 해결됐으니까. 이제 전부 다 잊고 깨끗이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면 되지. 그렇게 걱정해주신다고 하니 제가 다 민망합니다. 하하하….”
“그래도 꼭 사과드리고 싶어서… 여러 가지 사과드릴 일이 참 많은 것 같아서….”
“울어요?”
“아닙니다.”
‘혜진아, 울지 마, 진짜.’
‘얘는 진짜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1회차 가면쓰레기가 그녀를 싫어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은 느낌.
이런 걸 떠올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괜스레 던전 안에서의 조혜진의 모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무기를 버린 채 인질은 자신이 될 테니 부길드마스터를 풀어달라는 모습은 압권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이기영의 감성을 한차례 휘저어 버렸다.
박덕구의 모습이 떠오를 정도였으니 무슨 표현이 더 필요하겠는가.
지금 조혜진의 눈에 고인 눈물은 악어의 눈물이 아니라, 정말로 내게 미안함을 표현하는 눈물이다.
업진살이나 뜯으며 편하게 지냈던 걸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온갖 고초를 겪은 줄 아는 것 같았다.
‘시바, 더 미안해지게.’
결국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루만 빼자.’
어차피 언젠가는 처리해야 할 사안이기도 했으니까.
“저 혜진 씨… 그보다 현성 씨에게 이번에 조금 안 좋은 소리를 들었다고….”
“아니요, 부길드마스터가 신경 쓰실 정도는 아닙니다. 길드마스터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서….”
“그 부분에 관련해서 말씀드리는 데 조금 혜진 씨가 오해하시는 게 있으신 것 같아서… 사실 현성 씨가 조금 날이 서 있는 상태인 것 같더라고요. 여러 가지 일로 성격이 살짝 변했다는 느낌이라… 정확히 무슨 소리를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서 말한 건 아닐 겁니다.”
‘걔, 지금 좀 흑화된 상태거든.’
“제가 단언하건대, 혜진 씨에게 했던 말들이 진심이 아닐 거예요.”
사실 이기영 오피셜이라는 게 그리 신뢰가 가는 말은 아니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근슬쩍 밝아질 조짐을 보이는 조혜진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이를테면 어두운 방 안에서 촛불 하나가 딱 켜진 정도, 당연하지만 조혜진이 그 촛불을 붙잡고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자세한 건 이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분이 화해할 수 있도록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요, 바쁘신데 그렇게까지는… 지금은 시국도 시국이니만큼 괜히 쓸데없는 일에 힘쓰실 필요 없어요, 부길드마스터. 저는 괜찮습니다.”
말은 저렇게 내뱉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혹시나 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
‘혜진아, 너는 내가 김현성 엔딩 보게 해줄게, 진짜.’
정확히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얘만큼은 진지하게 밀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