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7
회귀자 사용설명서 657화
회의(3)
편안한 분위기에서 무난하게 회의가 진행됐으면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이 정도로까지 무난하게 진행될 줄은 몰랐다.
아니, 무난하다는 표현조차 부족하다.
‘앞으로 전 대륙민들은 화장실을 갈 때마다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 보고하고 가야 한다.’
이런 의제를 내밀어도 만장일치로 가결되지 않을까.
조금 과장된 표현이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모두가 하나가 되어 있었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달려간다는 것은 무척 만족스러운 일이지만….
‘시바….’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이건 너무한 것 같은데.’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누구 하나라도 반대해야 되는 거 아니야?’
“아, 이번 의제는… 기권이 한 표….”
‘그래, 그거야. 기권도 하고 그러라고.’
“제가, 제가, 잘못 눌렀습니다. 죄송… 합니다. 찬성! 찬성입니다! 무조건 찬성합니다.”
‘아니, 그걸 굳이 왜 말하고 그래.’
“아, 네, 그렇다면… 네, 다시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음을 선언하겠습니다.”
‘시비라도 좀 걸어봐. 진짜로 뭐라고 안 할 거라구.’
“네, 이번 의제 역시…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분위기가 점점 더 기묘해졌다. 초반에 박수 세례를 즐겼던 이지혜 역시 당황한 반응이었다.
다소 강압적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 그녀였지만, 이렇게까지 순조롭게 풀릴지는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마냥 기뻐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해하고 있지 않을까.
안 그래도 여러 가지 부작용을 걱정하는 상황에, 지금 이 문제가 어떤 부작용을 야기할지 걱정될 게 뻔했으니까.
사실 몸이 편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찍어 누르는 게 편하다는 사실을 왜 모르겠는가.
힘으로 눌러 버리고 찍 소리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데 다른 걱정거리가 필요할 리가 없다.
하지만 그동안 배우고 봐온 것이 자꾸만 브레이크를 걸고 있다.
뭐가 어찌 됐든 간에 이런 방식은 끝이 안 좋을 수밖에 없다는 것에는 그 누구도 이견을 제시할 수 없으리라.
‘내가 너무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건가?’
이미 세계관 최강자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이가 이쪽과 연줄이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배드 엔딩은 피할 수 있다고 느껴졌지만, 녀석과 나만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지 않은가.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대중의 시선도 아예 무시할 수는 없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고, 나 역시 인간이었으니까.
괜히 독재자 이기영이라는 그림을 경계하는 것이 아니다.
이기영 국방위원장은 빛에 휩싸인 이기영 명예추기경과는 어울리지 않은 단어였고, 무엇보다 다른 변수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이 신경 쓰였다.
당장 공포에 짓눌려 할 말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이건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자꾸만 최악을 생각하는 것 같지만 어떻게 불안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안 그래도 36일밖에 안 남은 시점에서 각 집단의 지도자들이 속으로 삼키는 것이 있다면….
‘무너지는 게 한순간일지도 모르는데….’
천사들의 편에 붙어버리는 인간 놈들이 나올지도 모른다.
물론 내가 가진 상식선에서는 인류를 버린다는 건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그 어떤 상황이 닥쳐도 자기 이익을 챙기는 쓰레기 같은 놈들이 있게 마련이다.
실제로 1회 차에서도 녀석들의 편에 붙은 세력이 있다는 걸 떠올려 보라. 절대로 내 견해가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으리라.
‘둠현성, 시바.’
무슨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상황을 김현성이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당황스럽다.
‘이 새끼, 왜 이렇게 막 나가는 거야.’
어째서 조혜진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심지어 나를 때리려고 손도 들어 올리지 않았던가.
결국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당시 녀석의 눈빛은 정말로 나를 때리려 마음을 굳게 먹은 듯한 표정이었다.
아직도 조금 차갑던 그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이왕 흑화했으니 이제 자기 멋대로 살기로 결정한 건지, 아니면 세간의 시선이나 정치적인 것들을 신경 쓰지 않기로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김현성이 고삐가 풀렸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 시바, 그럴 만해. 이제 마음대로 살고 싶을 때도 됐지.’
몇십 년이 넘는 긴 시간,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기만 했다는 걸 떠올려 보면 더욱더 그렇다.
가면쓰레기만큼이나 녀석을 괴롭게 만들었던 게 이런 정치적인 문제였을 테니까.
이제 좀 내 마음대로 하고 싶고, 막살고 싶고, 굳이 싫어하는 사람들이랑 마주치면서 쓸데없는 이야기도 들어줄 필요 없다고 생각했을 테고, 적폐 친구들 비위 맞춰주며 웃는 것도 짜증 났겠지, 뭐.
이제 슬슬 이렇게 사는 게 멍청한 짓이라는 걸 깨닫고, 기왕 이세계로 온 김에 깽판을 치고 싶은 고등학생의 심정이 됐을지도 모른다.
때마침 흑화의 기운 마저 넘실거리는 상황, 자신의 오른팔에 봉인돼 있던 흑염룡을 마음껏 개방시켜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정도가 너무 심해.’
그 정도가 과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굳이 이런 식으로 의제들을 가결시킬 필요가 없다. 3표 차이로 가결되더라도 가결은 가결이었으니까.
원래 평소에 얌전하고 공부 열심히 하던 놈들이 한번 맛이 가면, 끝없는 탈선의 길로 빠지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생각이 들어와 꽂혔다.
적절한 예는 아니지만 마치 사기 결혼을 당한 것 같은 느낌, 성실하고 순진한 모습에 끌려 인생을 배팅하기로 마음먹었건만 술에 취하니 나쁜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녀석의 경우에는 어둠의 힘에 취한 것이라고 봐도 되겠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모두가 ‘예스’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을 살펴봤지만 그런 놈이 튀어나올 리 없다.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여신에게 선택받은 인간에게 자기 생각을 당당히 밝히세요. 그는 현재 당신의 조언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0/1)]
[바스티안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바스티안은 보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
‘뭐 해, 이 새끼야. 빨리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봐.’
하지만 아직도 시선을 돌리고 있다. 퀘스트까지 무시하는 얼굴을 보니 기가 차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베니고어와 함께하는 인간이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현명하고 신앙심 깊은 조언자가 필요합니다. 지금 당장 그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세요. (0/1)]
[베드리아로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리아로는 보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녀석이 이미 포기했다면 이번에는 사제를 목표로.
본인들이 모시는 신으로부터 직접 목소리가 내려온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 아마 뭐라고 말이라도 해오지 않을까.
로렌 신의 독실한 신자이자 성자급의 신성력을 보유한 베드리아로.
살짝 기대하는 눈빛으로 녀석을 응시했지만, 녀석 역시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할 뿐이었다.
신에게 자신을 바친다며 말버릇처럼 말하던 것치고는 패기가 없다.
이놈도 마찬가지고, 저놈도 마찬가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몇에게 퀘스트를 뿌려봤지만, 입 뻥끗하는 녀석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혹시나 자신에게 불똥이 튀지 않을까 걱정하는 녀석이 전부, 27군단 사태 때에도 용맹하게 검을 들었던 양반들이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모르겠다.
바닥에 보이는 붉은색 얼룩도 왠지 모르게 신경 쓰인다.
‘아니야. 그 정도로 막장일 리는 없지. 그냥 뭐 얼룩이겠지, 얼룩일 거야.’
“이번 의제 역시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짝짝짝짝짝짝.
김현성이 없는 곳에서는 조금 더 건설적인 이야기를 해오지 않을까.
마침 딱 쉬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타이밍.
잠시 휴식하겠다고 공지한 후 재빠르게 접선 장소로 향했다. 처음과 목적이 조금 달라진 상황에 괜스레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본래는 회의가 잘 풀리지 않을 상황을 예상해 만든 비밀 접선이 이런 식으로 사용될 줄 누가 알았을까.
발걸음을 옮기자 곧바로 이쪽의 옆으로 따라붙는 이지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 역시 만나기로 한 인사들이 있는 모양이다.
“진짜로 당황스럽네요.”
“내 말이.”
“별별 상황을 다 예상하고 들어왔는데… 솔직히 이렇게 될 줄은 예상 못 했어요.”
“나도 그래, 누나. 이거 괜찮을지 모르겠네.”
“뭐, 일단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고는 있으니까 나쁜 상황은 아니죠. 그렇게 좋은 상황도 아니지만… 굳이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 묻는다면 좋은 쪽이라고 봐요. 제1 작전권 가져왔잖아요? 여러 가지로 머리 아픈 문제들도 싹 해결됐고. 뒈질 놈들 제대로 뒈질 곳에 집어넣었고, 주요지역 관리도 전담하게 됐으니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고요.”
“나도 같은 생각이기는 한데… 일이 너무 어이없이 풀리니까 마음이 편치가 않네, 시바.”
“오빠는 걱정이 너무 많다니까. 항상 최악을 먼저 생각하는 건 좋지만… 이번에는 별문제 없을 거예요. 자기가 예상한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꼭 이러더라. 오빠, 진짜 컨트롤 프릭인 거 알죠? 오빠네 길드마스터도 마음 독하게 먹은 것 같으니까. 일단 상처 난 부위를 대충 꿰맨 거라고 생각해요. 제대로 못 꿰맨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터진 부위는 다시 메우면 되죠.”
“그러다 썩는다니까.”
“그래서 지금 소독약 치러 가고 있는 거잖아요.”
“…….”
“…….”
“그건 누나 말이 맞네. 조금 이따 봐, 누나.”
“오빠도요.”
옆길로 새는 걸 보니 공화국 쪽 인사들을 만나러 가는 모양인 듯했다.
이쪽도 괜스레 겉옷을 정리하게 된다.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발걸음을 옮기자 작은 테라스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직 도착 안 했네.’
먼저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이내 조용히 안으로 들어오는 녀석이 시야에 비쳤다.
진한 눈썹에 뺨부터 턱까지 이어지는 얇은 수염을 기른 모습, 얼굴과 어울리는 열정적인 눈빛이 기억에 남아 있었던 녀석이었지.
“오랜만이로군요, 다니엘 님.”
“네, 오랜만… 입니다. 이기영 위원장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자주 연락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진작에 연락드렸어야 했는데… 이런 일로밖에 만나지 않는 것 같아 죄송하군요.”
“아니요, 저야말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안부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그러지 못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피차 바쁜 상황이었으니까요. 이렇게 서로 미안하다는 말만 주고받을 게 아니라… 조금 더 건설적인 이야기로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으니… 갑작스럽지만, 본론부터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회의 말입니다만….”
“…….”
“혹시 제가 너무….”
“아닙니다. 아무 일도 모르고,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네?”
“저는 위원장님의 말씀… 말씀이 맞다고 생각해서… 네, 찬성표를 던졌을 뿐입니다. 다른 의도는 절대로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대륙의 위기가 아닙니까? 모두가 함께 모여 힘을 모아야 하는 이런 시기에 쓸데없는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최대한 지양해야 합니다. 모두가 뜻을 하나로 모은 겁니다. 지금까지 응당 그래야 했죠. 네, 그렇습니다.”
“…….”
“제가… 그러니까 제가 지금까지 위원장님의 의견에 반하는 주장을 내세웠던 것은 어디까지나 위원장님께서…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절대로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잘못된 길로 새지는 않으실까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뿐이라는 걸 꼭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절대로… 절대로 위원장님과 반목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
‘이 양반 왜 이래, 진짜.’
“조금 흥분하신 것 같은데… 안색이 좋지 않고….”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멀쩡합니다, 위원장님. 하하, 하하하하. 저는 멀쩡해요. 존경하는 위원장님과 마주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긴장했나 봅니다.”
“…….”
“파란 길드마스터에게 제가 이러한 뜻을 가지고 있다는 걸 꼭 전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꼭이요.”
“…….”
“자, 그럼 어서 회의하러 가시죠. 제 동지들 모두 저와 뜻을 함께하고 있으니, 남은 의제의 문제 역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하하, 대륙을… 대륙을 지켜야지요.”
더 이상 다른 말이 필요 없다.
3일 이상이 걸릴 거라고 생각한 회의가 반나절도 안 돼서 끝나기 직전에 있다.
심지어 반나절도 걸리지 않은 상황은 나를 더욱더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단상에 서서 허겁지겁 회의실을 빠져나가려는 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니 괜스레 헛웃음이 나온다.
마치 화생방을 빠져나가려고 발버둥 치는 훈련병들의 모습 같지 않은가.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김현성이 입을 열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기영 씨. 식사는 하셨습니까?”
“…….”
“회의가 잘 끝나서 다행입니다.”
‘얘, 이거 시바, 그냥 잡아떼려고 그러는 거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