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9
회귀자 사용설명서 659화
승리할 확률(1)
얼룩진 바닥을 보니, 둠현성화가 생각보다 심각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콰직이면 좀 그래….’
물론 쓸데없는 선동과 날조로 대륙의 빛을 깎아내린 천인공노할 녀석들을 혼내줬다는 사실은 기뻤지만, 최소한 안 보이는 곳에서 처리하거나 남들 모르게 제거하는 게 더 나은 행동이다.
만약 정말로 주변의 상황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흑화한 상태라면….
다른 것 다 제쳐놓고 김현성부터 원래대로 되돌려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해 볼 만했다.
물론 내 입장에서 그런 무리수를 던질 수 있을 리 없다.
김현성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게 가능할지도 문제였고, 만약 가능하더라도, 절대로 단기간 내에 성공시킬 수 있는 과업이 아니라는 것 또한 문제였다.
박덕구 각성 사태나 둠기영 뺨치는 연출과 스토리가 필요했고, 아쉽게도 현재 나는 그 정도의 시간과 노력을 쏟을 여력이 없었다.
심지어 대륙 전체가 여러 가지로 하향 평준화된 상황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선택지가 많지 않다.
시대는 김현성이 아닌 둠현성을 원하고 있었다.
김현성 자신이 가진 힘이 아니라는 게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무력 자체가 훨씬 상승했다.
양날의 검이기는 하지만 군침이 도는 카드라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안고 가야 돼.’
정하얀 마저 너프를 맞은 이 시점에 기대를 걸어볼 만한 인재는 버프된 둠현성뿐이다.
조금 기분이 찝찝해지기는 했지만, 일단은 웃는 얼굴로 녀석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었으니까.
“기대되네요. 그러고 보니 혜진 씨랑 지혜 씨는….”
“아마 곧 이쪽으로 올 겁니다. 아. 저기 오고 있군요.”
둠현성이 제대로 사과한 건 맞는지 궁금해진 것이 당연했다.
‘그것까지 안 했으면 얘 진짜 심각해진 건데….’
슬쩍 시선을 돌리니 천천히 걸어오는 이지혜와 조혜진이 시야에 보였다.
멀리서 봐도 웃음기가 보이는 조혜진의 표정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했구나… 아직 그 정도로 막장은 아니구나.’
자꾸만 올라가려고 하는 입꼬리를 최대한 막아서는 표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참을 수가 없는지 피식피식 웃음소리가 새어 나올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한바탕 가슴을 쓸어내리기는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조금은 황당해지기도 했다.
‘쟤도 진짜, 쟤다.’
“…….”
‘조혜진, 너 진짜 한심하다, 진짜 한심해.’
“그렇네요, 오고 있군요.”
‘진짜….’
“혜진 씨가 기분이 많이 풀어진 것 같아 정말로 다행입니다.”
“아, 네. 다행이네요.”
“혹시나 제 사과가 부족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아니, 혜진아. 현성이한테 마음의 짐을 남겨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아니었어?’
“용서해 주신 것 같아서….”
‘뚱한 표정 한 번이라도 지었으면 현성이가 나중에 자리 한번 만들었겠지. 무조건 만들었을 거라고.’
이런 생각을 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 절호의 기회를 두 발로 뻥 차버리는 모습에 내가 다 안타까운 마음이 일어날 정도였다.
‘좀 찝찝하다 싶을 정도로 반응해야지. 그래야, 시바, 김현성이 ‘아… 내가 진짜 잘못했구나.’ 싶어서 더 관심 가져주고 더 잘해주고 그러는 건데… 나였으면 10년은 더 우려먹었겠다.’
김현성의 입에서 사과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마자 고개를 사정없이 끄덕였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앞에 해준 말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김현성도 실수했다는 걸 깨닫고 있을 거라고, 분명히 미안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 거라고, 금방 사과할 거라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걸 직접 확인한 직후일 테니… 마음의 짐도 조금 덜었을 테고….
쟤 성격이라면 저런 표정을 지을 만했지만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김현성이 어떻게 사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가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는 표정을 선보이고 있었다는 것 하나.
‘얘는 왜 이런 거로….’
누가 보면 사과받은 것이 아니라 고백이라도 받은 줄 오해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내가 진짜….’
언제 한번 이기연을 재등판시켜 김현성 공략 과외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두 분 식사하시는 데 끼어드는 것 같아 괜히 죄송하네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지혜 씨도 여러 가지로 수고해 주시고 계시니까요. 이번 일도 그렇고, 도움을 많이 받는 것 같아서… 언제 한번 식사를 대접해 드리고 싶었는데. 그게 오늘인 것 같습니다.”
“영광이네요. 현성 씨 식사에 초대된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진작 초대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튜토리얼 던전에서 나온 이후로는 사실 접점이랄 것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저는 제 할 일을 한 것뿐이잖아요? 기영 오빠를 옆에서 돕는 게 제 일이니 굳이 이러실 필요는 없어요. 저도 지금 제 일에 만족하고 있고… 하지만 굳이 초대해 주시니 감사하게 얻어먹을 수밖에 없겠네요.”
“…….”
“잘 먹을게요, 현성 씨.”
‘누나, 넉살 좋네.’
“그나저나 오늘 회의 좀 이상했죠?”
“…….”
“이렇게까지 쉽게 풀릴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누나, 그 말 괜히 꺼내지 마. 얘, 숨기기로 마음먹은 것 같아.’
나도 그냥 생각 안 하기로 마음먹었어.
살짝 눈빛을 보내자 이지혜가 입 다물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캐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으니, 아마 다른 말을 해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
“뭐, 원인이 상관이 있나요. 좋은 게 좋은 거지.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이동하는 게 좋겠네요. 예약했다지만 너무 늦게 가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까.”
“네, 지혜 씨 말대로 바로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니 천천히 이동하시죠. 혜진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길드마스터.”
어쩌다 보니 둘씩 짝지어서 앉게 됐다. 생각해 보니 조금 요상한 조합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조혜진과 김현성, 나와 이지혜가 함께 무언가를 한 적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훈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물론 이 훈훈한 분위기를 이끌고 있는 것은 이지혜.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김현성이 이지혜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내부 평가가 올라갔나 보네.’
이번 납치 사건에서 중요한 정보를 전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내 부관으로 함께 일해주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나 역시 누나에게 고마움을 느끼기는 마찬가지, 막말로 이지혜가 함께 있어 주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정말로 골병이 들어 침대 위에 누워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 와중에 안타까웠던 것은 조혜진이 아까의 따뜻함에 취해 있었다는 것.
솔직히 얘랑 김현성을 어떻게 이어줄지 답이 나올 것 같지가 않아서 머리가 아프다.
그렇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영양가 없는 대화가 대부분이었지만 이전에 있던 사건들 때문에 복잡했던 머릿속을 날려 버리는 시간이기도 했다.
물론 현 상황에서 소소한 일상을 계속해서 이어갈 수 있을 리 없다.
식사가 거의 다 끝나갈 때 즈음에 새로운 화두를 던지는 이지혜가 눈에 보였다.
기왕이면 이대로 쓸데없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나 역시 이지혜가 던진 질문에는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큰일이네요, 시간이 이렇게밖에 남지 않았다는 건. 현성 씨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현성에게는 민감할 수밖에 없는 질문. 하지만 대답이 들려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글쎄요. 일단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우선 내부 정리부터 하고 충분한 준비를 해야겠죠.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그 정도 시간밖에 남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습니다.”
“흠, 그건 조금… 놀랍네요.”
“저 안에 있는 게 무엇인지…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것 역시 놀랍고요. 그래서 뭐가 있나요.”
“적.”
“…….”
“…….”
“얼마나 강한가요?”
“강합니다.”
“상대할 수는 있는 건가요?”
“완벽하게 준비가 됐다고 하기에는 힘들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니까요. 물러설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뭔가 비책이라도 가지고 계세요?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치고는 무척 담담해 보이시는 것 같은데….”
“저는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입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노력해 왔으니까요.”
“가능성은 얼마나 잡고 있는지 물어도 될까요.”
“글쎄요,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
“10%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
“네?”
“운이 좋으면 15% 정도… 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김현성이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별것 아니라는 듯이 툭 던진 말이었지만 이지혜는 조금은 충격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아마 김현성이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테니, 저 말을 확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현재의 전력으로 비둘기와 바깥 놈을 상대할 수 있을까에 대해 이야기해 보지 않은 나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
‘정말로?’
“최대한 희망적으로 말씀드린 겁니다.”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닐 거야. 열심히 노력해 왔잖아.’
스리슬쩍 이지혜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이미 생각에 빠진 지 오래다. 이미 마음은 노아의 방주에 타고 있는 상태가 아닐까.
‘오빠, 우리 그냥 손절하자.’
그렇게 말해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조금 충격인데….’
적어도 30%는 될 줄 알았으니까. 눈에 띄게 차가워진 표정으로 냅킨으로 입술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지혜의 모습이 보였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
“같이 가죠, 혜진 씨.”
“네?”
“같이 가요.”
“저는 괜찮… 습니다.”
“같이 가요.”
“굳이….”
“같이 가요.”
“아, 네.”
이상할 정도의 기세에 밀린 조혜진이 당황스러운지 어버버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연하지만 굳이 조혜진과 함께 화장실을 가고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 당장 저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라는 뜻이지 않을까.
구태여 지금 당장 듣고 싶어 하는 걸 보니 정말로 가능성이 저것밖에 안 되는지 궁금했던 것 같았다.
이지혜와 조혜진이 잠깐 자리를 뜬 이후에는 곧바로 마력의 장벽을 쳤다. 살짝 입을 여니, 김현성이 곧바로 대답해 왔다.
“정말입니까?”
“네, 현재 대륙의 전력으로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확률이 너무 낮은….”
“있는 그대로를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아, 이거 진짜, 시바, 노아의 방주 타야 하나?’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게 당연했다. 지금이라도 전부 다 던져 버리고 방주 계획이나 조금 더 가다듬는 게 좋지 않을까.
대륙이고 베니고어고 집어던져 버리고 박덕구가 만들어놓은 배를 타고 하늘로 날아가는 게 최선일지도 모른다.
벙찐 얼굴로 우리를 바라볼 대륙민들을 향해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저는 이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제 행복을 찾아 떠납니다’라고 한 번 외쳐주는 것도 좋겠지.
역사 속의 개새끼로 이름을 남기는 게 죽는 것보다는 좋은 인생이지 않은가.
아니, 생각해 보니까 이름을 남기지는 못하겠네.
‘대륙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는 데, 역사는 무슨 개뿔의 역사야.’
너무 왔다 갔다 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자꾸만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엔딩으로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10%는 너무하다. 저도 모르게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는지 김현성이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
“…….”
“걱정하지 마세요. 기영 씨의 바람대로 대륙을 지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까요.”
‘잠깐, 그 노력, 며칠만 주머니 속에 넣어둬. 넣어둬야 할 것 같아.’
녀석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