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0
회귀자 사용설명서 660화
승리할 확률 (2)
‘이거 시바, 안 좋은데….’
김현성에게 그럴 마음이 들었다는 건 주먹을 쥘 만한 상황이었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괜스레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두드리게 된다.
정말로 다른 해결책은 없는지 머릿속에 계속 생각이 맴돌았지만, 그런다고 김현성이 자체 판단한 확률이 올라가는 것은 아니었다.
항상 말했다시피 이쪽은 도박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다.
확률이 7할 이상일 때만 주사위를 던지는 타입이었고, 그마저도 모든 준비를 마친 이후에야 배팅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런 의미에서 김현성의 10% 발언은 대륙을 지켜야겠다는 내 판단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물론 어디까지가 사실일지를 먼저 확인해 봐야겠지만….
‘아니야. 처음부터 꼬리 내릴 필요는 없어. 어차피 탈출 매뉴얼은 마련되어 있고, 언제든지 손절할 수 있으니까.’
36일 안에 확률을 얼마나 올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전투가 하루 만에 끝나는 것도 아니고, 전쟁 중에도 확률을 올릴 수단이 나올지도 모른다.
‘아, 이지혜 얘는 벌써 튈 생각 하는 것 같은데….’
이지혜 또한 주사위를 던지는 걸 싫어하는 타입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벌써 진지하게 10명 명단을 채우고 있을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화장실 안에서 명단을 작성하고 있다는 것에 내 모든 걸 걸 수 있다.
“1회 차와 비교했을 때는 어떻습니까?”
“전체적인 성장을 논하기 이전에, 진도가 지나치게 빠릅니다. 이맘때 1회 차에서는 아직 그들의 존재조차 파악하지 못했으니까요.”
“굳이 전력을 비교하자면 어떻습니까?”
“터무니없이 모자랍니다. 물론 수준 자체는 상향 평준화 되고 있기는 합니다. 이를테면 더 건강한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테이머 알프스 같은 새로운 인재들을 발견한 것도 맞습니다. 보급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안정적이고, 기영 씨가 만든 포션 덕분에 응급처치나 생존 부분에서 혜택을 받고 있는 것도 맞고요. 인류가 반으로 갈라서 서로 대립하지 않아 전력을 보존하고 있다는 메리트는 역시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것 이상으로 부족한 면이 있다고 말씀드리는 게 적절할 것 같습니다.”
‘추억 보정은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너무 낮아. 확률이 10%라는 건 진짜 말도 안 되는 수치야. 너, 김현성 아니고 둠현성이잖아.’
어쩌면 김현성이 잘못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필사적으로 싸우던 전사들과 비교하면 부족한 게 사실이겠지만 이렇게까지 저평가 받을 정도로 대륙을 관리하지는 않았다.
1회 차에는 녀석들의 협력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 아닐까.
악랄한 수법과 잔인한 행동으로 인류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가면쓰레기.
지금까지 진청이 왔던 길을 돌이켜 보면 비둘기 측에 여러 가지 선물을 던져줬을 가능성이 크다.
칭호는 전장 위의 현자, 직업은 군단 마도사.
애초 가면쓰레기는 개인의 능력으로 상대방을 찍어 누른다기보다는, 주변의 인재들을 블러핑하며 전장을 놀이터처럼 뛰어다니는 녀석이었다.
가면쓰레기가 없다고 해서 비둘기의 무력이 내려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그들의 전술적인 선택지가 줄어들 거라는 것은 자명하다.
‘이건 클 거야.’
무엇보다 2회 차에서는 이기영이라는 인재가 살아남지 않았던가. 이 차이는 클 수밖에 없다.
나 자신을 블러핑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가면쓰레기 진청을 책략으로 밀어낸 전술 천재 빛기영의 존재는 인류의 승리 가능성을 1할 이상 더 끌어올릴 수 있다.
“2회 차에는….”
“네, 그자가 없습니다만… 저는 지금 전술과 전략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순수한 무력.”
“…….”
“무엇보다….”
“네.”
“네임드들의 성장치가 많이 떨어집니다.”
“네임드 말입니까?”
“예, 정확히 말하면 인류 측의 네임드 중에, 4대 천사를 상대할 수 있는 이가 없다는 게 가장 커다란 문제겠군요.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바깥 놈 밑에 있는 비둘기 중에서도 특출난 무력을 가지고 있던 4마리의 비둘기들, 이를테면 원조 사천왕 같은 느낌의 녀석들이었다.
한 놈, 한 놈을 전술로 분류해도 무방할 정도로 강력한 무력을 가진 녀석들….
나름 고군분투했던 1회 차에서도 엄청나게 막대한 피해와 손해를 감수하고도 놈들을 2명 잡아내는 것이 전부였을 정도로 난이도가 있는 놈들이었다.
이제야 이해가 간다. 어째서 김현성이 확률을 10% 정도라고 생각했는지….
‘이제야 감이 잡히네.’
전략과 전술, 보급과 컨디션 이전의 문제다.
놈들이 전술 김현성을 4기나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전쟁이 시작되는 즉시 4개의 구역에 전술 김현성이 차례대로 떨어진다고 가정해 보자.
구역 하나는 김현성이 틀어막을 수 있다고 해도, 나머지 3개의 구역에는 구멍이 뚫릴 수밖에 없다.
만약 내가 지휘관이라고 하더라도 멍하니 전장을 바라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판단했을 테니까. 전술 김현성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막을 수 없는 이레귤러이자 크랙이다.
내가 초등학생들을 데리고 박덕구와 싸운다고 가정해 보자.
박덕구가 괴성을 지르며 초등학생들 사이를 돌파하는데 전략이고 작전이고 먹힐 수나 있을까.
과한 비교가 아닌가 하는 생각해 봤지만 양 떼 사이에 던져놓은 늑대 꼴이 될 거라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전부 다 쓸데없는 개소리지.’
최소한 부딪칠 수 있는 체급이 만들어져야 뭐라도 해볼 수 있다.
녀석들이 전술핵을 4기를 보유하고 있다면 이쪽 역시 전술핵 4기, 아니, 최소한 전술핵을 억제할 수단을 보유하고 있어야 했다.
“1회 차에서는….”
“제가 한 명, 성검에게 선택받은 용사가 한 명을 마크했었습니다.”
‘그래서 두 명 잡아 죽일 수 있었던 거네.’
괜스레 베니고어에 대한 분노가 치솟아 오른다.
본래 용사가 되어야 했던 놈은 튜토리얼 던전에서 성검을 받지 못해 아귀들에게 몸이 뜯겼고, 녀석의 대용품으로 만들어진 회색빛의 용사는 반병신이 되어 사경을 헤매고 있다.
라파엘이 부활할 수 있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이 있기는 했지만, 솔직히 이 새끼 상태를 보면 싸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성검 용사 파티 역시 마찬가지.
사천왕 아래에 있는 2선들을 상대해 줘야 할 사냥개 이주혁이나 기적의 사제 역시 생명 연장 유지 장치로 겨우 끊어지려는 생명줄을 유지하고 있었다.
1회 차의 영웅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이주혁만 한 놈을 찾기는 힘들다.
‘대륙은 끝났어. 시바, 끝났다고….’
[희귀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베니고어와 함께 희망의 새싹을 키워 나가기. (0/1)]
[보상: 여신이 직접 내린 희망의 네잎클로버 씨앗.]
‘넌 좀 사라져 제발….’
[희귀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을 거야, 이기영 신도. 지금까지도 잘해왔잖아. 지금 와서 포기하는 것보다는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좋지 않을까? 왜 우리가 이기영 신도한테 내린 힘도 있잖아. 물, 물론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0/1)]
‘알았으니까 제발 좀 가만히 있어, 시바. 아직 안 버렸으니까.’
“그럼 확률이 10%라고 말씀하신 건….”
“네, 제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해냈다고 가정했을 때, 그 정도로 확률일 거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그렇다면 조금 더 올릴 수 있겠네요.”
‘알지? 형이 너보다 너에 대해서 잘 아는 거. 전술 김현성 파바박 파바박 하면 두 배 이상은 더 끌어올릴 수 있을걸.’
“…….”
‘근데 표정이 왜 그래. 너 이제 시바, 전술 김현성 안 하려고 하는 건 아니지?’
왠지 모르게 그런 분위기다.
‘와, 시바… 김현성, 이 새끼….’
딱히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애매한 표정을 짓는 걸 보면 이쪽에 부담을 주기 싫은 모양이다.
승률을 필요 이상으로 낮게 잡은 것 역시 나를 상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기쁘기도 했지만 뭔가 찝찝했다. 이기영을 최대한 무리시키지 않는 선에서 전쟁을 이끌어가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이용할 대로 이용하고 정작 결정적일 때 버림받은 느낌이 든 것은 당연하다.
물론 이쪽을 생각해서 내린 결심이라는 건 알았지만,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그래, 시바. 수신기도 빼고 전장에 나간다, 이거지? 마음껏 나가봐라, 현성아. 형 이제 망원경도 있고 퀘스트도 내릴 수 있어서 네가 수신기 들고 나가든 안 들고 나가든 상관이 없어요. 내가 하자는데 네가 시바, 전술 김현성 안 하는지 한번 보자고.’
억지로라도 메시지를 보낸다면 단언컨대 녀석은 받아들일 것이다.
눈앞에 달콤한 과실과 성과가 먹음직스럽게 자신을 유혹하는데 놈이 그걸 거절하고 배기겠는가.
아마 입술을 깨물면서도 몸을 움직일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효율이 적어도 두 배 이상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확률이 10% 더 상승해서 20%. 여기에 빛기영의 힘을 5% 정도라고 가정하면 25% 정도.
‘그래도 낮아.’
하지만 김현성이 말한 것보다는 더 희망적이다.
문제든 놈들의 전술핵을 이쪽이 막을 수 있냐는 것이 아닐까.
“만약 네임드 4명을 전부 막을 수 있다면 어떨 것 같아요?”
“지금보다는 상황이 나아질 겁니다. 확률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갈 거고요. 하지만.”
‘나도 알아. 그 정도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거.’
“하얀 씨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요.”
‘정하얀은 못 써.’
“따로 할 일이 있으실 테니까요.”
그 말 그대로다. 사천왕 중 하나를 상대할 카드로 정하얀을 소비시킬 수는 없다.
그녀의 역할은 조금 떨어지는 밸런스를 유지시켜 주는 것, 전투 초반에 할 일이 있다는 걸 고려해 보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리고… 만약 하얀 씨에게 여유가 생긴다 하더라도 그들 중 하나를 막아내는 게 가능하지는 않을 겁니다.”
“확실히 하얀이는 후위로 분류할 수 있으니까요.”
“아니요. 전위니 후위니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얀 씨 역시 1회 차 와는 많이 달라졌으니까요. 시간이 몇 년 더 있었더라면 이전의 폼으로 성장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하얀 씨는… 여러 가지로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그 정도로 부족한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김현성의 입을 통해 다시 들으니 새삼스럽다.
“물론 살상 마법 자체는 1회 차의 하얀 씨에게 근접해 있을지 모릅니다. 애초에 1회 차의 정하얀은 대규모 살상 마법을 잘 사용하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마법사로서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격차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마력도 그렇고, 응용력도 그렇고, 특성이나 창의력, 모든 부분에서 뒤떨어질 겁니다. 제가 가능성을 다소 낮게 잡은 것 역시 그런 이유 때문이고요.”
“하지만 지금도 충분히….”
“1회 차의 하얀 씨는 교국 전체를 옮겼습니다.”
“네?”
“대륙의 지도를 바꾼 거라고 말씀드리면 이해하기 편하겠군요.”
‘뭐야….’
“적들의 원거리 포격 마법의 대부분을 차단했고, 간혹 어쩔 수 없을 때는 전황 자체를 뒤바꾸기도 했습니다. 바다를 그대로 대륙으로 옮겨와 지상전을 해상전으로 만들기도 했고요.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하얀 씨가 없었다면 부딪치는 것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을 겁니다. 확실히 말씀드리건대 그녀는 이전의 저보다 강했었습니다.”
‘뭐?’
대륙의 지도를 바꿔?
‘지상전을 해상전으로 바꿔?’
그 정도면 신이라고 볼 수 있는 거 아니야?
[희귀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야. 그런 부분에서 우리는 개입할 수 없거든, 여러 가지 허가를 받아야 사항도 많고, 억제력도… 뚫어야 하고 신성도 많이 들고, 무엇보다 득이 되는 것보다는 실이 되는 일이 많아서… 옛날에 어떤 선배로 바다 가르기 했다가 파산할 뻔했다니까? (0/1)]
‘넌 제발 좀 가만히 있어.’
아무래도 내가 1회 차 정하얀을 과소평가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