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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663화 (654/1,590)

# 663

회귀자 사용설명서 663화

승리할 확률(5)

‘누나, 그런 거 자신 있잖아, 그렇잖아.’

얼굴 속에 배신감이 드러나 있었지만,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라파엘 때를 생각해 보면 이지혜는 저런 표정을 지을 자격도 없다.

이렇게 빠르게 되돌려 줄 기회가 생길 줄은 예상 못 했지만, 그녀가 당황하는 걸 보니 입가에 미소가 피어난다.

이지혜 역시 떠오르는 게 있는지 덜 억울해하는 것 같았지만, 쫌생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은 여전했다.

일단은 침착하게 숨을 들이마시는 중, 본인이 원한 일은 아니었겠지만 이왕 터진 일이니, 열심히 수습해 보려고 하지 않을까.

일단은 너무 높은 커트라인을 줄이는 것부터 말이다.

“15%는 무리예요, 10%.”

“15%.”

“여러 가지를 상정해 봐도 최대 10% 정도가 한계예요, 여왕님. 사실 10%라는 수치도 단언할 수 없고요. 딱 10%로 합의를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요. 의미 없는 블러핑보다는 신뢰할 수 있는 수치가 마음에 드실 테니까요.”

“15야.”

“12%까지.”

“15%라고 분명히 이야기했어. 자기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기가 막히지, 아마? 우리 자기가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면 할 수 있는 거야. 그게 안 된다면 네 노력이 부족했던 거겠지, 뭐.”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을 수도 있고, 아직 정확한 데이터도 적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확언을 드린다는 건….”

“15%. 나는 그걸로 이미 마음을 정했으니까.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 알아들어? 대충할 생각하지 말라, 이거야. 굳이 우리 자기의 보증이 아니더라도, 검은 백조의 이지혜가 유능한 인재라는 건 린델에서 칼밥 좀 먹은 사람이라면 전부 다 아는 사실 아닌가. 나도 네가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을 거라고 보는데. 너는 어때? 내가 너를 너무 높게 평가하고 있는 건가?”

“…….”

“만약 그렇다면 지금 돌아가도 돼. 그대로 나가도 된다고, 쥐새끼처럼.”

다소 공격적인 말까지 내뱉으며 도발하는 것을 보니, 차희라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모양이다.

조금 높게 던진 감이 없지 않았지만 나 역시 이지혜가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이지혜는 유능했고, 손실을 내더라도 최소한의 손실만을 내는 걸 선호했으니 말이다.

그녀는 데이터를 신봉했고 그만큼 꼼꼼했다. 커다란 그림을 그리는 능력이 좋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세밀한 그림을 그리는 것에 강하다.

아마 이것저것 쳐내고 집중한다면 가까스로 15%에 맞춰지지 않을까.

문제는 그녀가 미친 듯이 갈려 나가야 한다는 점이겠지.

그리고 별것 아닌 변수 한 번에 모든 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도 걱정될 테고….

이지혜의 표정이 구겨지는 게 당연하다. 안 그래도 그녀는 갈려 나가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더군다나 저렇게 자존심 건드리는 발언을 하면….

‘누나도 빡치니까.’

“일단 받아들이면 인적 피해든 물질적 피해든 거기서 1%라도 오차가 생길 경우, 네가 대가를 치르는 거야. 내 말 알아듣지?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이해할 수 있지?”

“…….”

“대답.”

“네, 이해했어요.”

“좋네, 계약 성립됐다는 느낌이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잖아, 그렇지? 뭐, 따로 정리할 것도 없고 이제야 제대로 된 이야기가 끝났다는 듯한 느낌이네. 아주 좋아. 마음에 들어. 이래야지.”

‘기분 좋아 보이네.’

“거기 밖에 있는 간부들 전원 들어오라고 전해.”

차희라가 만족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윽고 커다란 덩치의 놈들이 차례대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남녀 가릴 것 없이 거대한 몸은 조금은 비현실적이다.

매번 보던 얼굴이었지만 이렇게 한곳에 모아 보니 더욱더 압권이었다.

심지어 지휘부에서 근무하고 있는 녀석들도 마찬가지, 체력단련이 필수 훈련 항목에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뽑아준 마법사들 몇몇도 눈에 보였지만 이전의 모습들은 찾아볼 수 없다.

나름 장래가 유망한 마법사들이었는데, 다른 쪽으로 장래가 유망해지고 말았다.

물리 마법사 바크 세르게이의 동료가 분명해 보일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안으로 들어온 녀석들은 숨소리 하나도 내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차희라가 하는 말을 기다리고 있다. 최영기 역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

용병 여왕이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지금 이 순간부터, 너희는 당분간 내가 아니라 여기 있는 이 여자를 모신다. 이름은 들어봤지? 얼굴도 알고 있을 거고. 자기소개.”

“이지혜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누나, 많이 당황했나 보네.’

“너희도 자기소개 해야지?”

확실히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방금 결정된 이야기를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진행하는 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

다시 한번 봐도 차희라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은 것처럼 보였다.

‘그럴 만도 해.’

그녀가 문무를 겸비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아무래도 더 유능한 자원이 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본인이 직접 묶어두고 있는 쇠사슬을 끊어야 할 정도의 상황이라면 붉은 용병을 지휘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짐처럼 느껴질 것이다.

필연적으로 특성을 발동시켜야 하는 상황이 올 거라고 예상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은근히 지금 같은 상황을 바랐을 수도 있다.

싸우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고, 근육으로 꽉 차 있는 녀석들에게 머리를 심어주는 것.

앞으로 다가올 전투에서는 그런 머리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는 걸 그녀는 잘 이해하고 있다.

솔직히 붉은 용병과 이지혜가 잘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최적의 머리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다시 한번 인사드리겠습니다, 길드마스터 대리. 최영기라고 합니다.”

“박종철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길드마스터 대리.”

“양하나.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길드마스터 대리.”

여기저기에서 덩치들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다. 검은 백조에서 나름 대접받는 이지혜 역시 이런 과한 리액션을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굳히고 천천히 차희라를 바라봤다.

‘아, 쟤 빡쳤다.’

“말씀은 잘 새겨들었어요, 용병 여왕님.”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네.”

“대신 한 가지 확실하게 하고 싶은 게 있는데….”

“말해.”

“약속드렸던 것처럼 딱 15%에 맞출 수 있도록 할게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을 거예요. 대신 당분간 붉은 용병에 지휘권은 제가 가져갑니다.”

“이미 말한 거로 아는데.”

“완전한 지휘권을 가져간다고 말씀드린 거예요. 현시점부터 붉은 용병은 차희라 개인의 말보다 길드마스터 대리인 이지혜의 말을 우선으로 합니다.”

“…….”

“…….”

“말 들었지? 이 여자 말대로 한다. 현시점부터는 내 말보다 이 여자의 말을 우선으로 하는 거야.”

“시험해 봐도 되나요? 확실하게 하려는 거니,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아주세요.”

“물론.”

“영기 씨?”

“…….”

“차희라를 공격해요.”

‘지혜 누나, 시바, 왜 그래. 정신 나갔어?’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기가 무섭게 차희라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 최영기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솔직히 최영기가 진짜로 검을 휘두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어차피 본인이 휘두른 검에 차희라가 다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은 있었겠지만 붉은 용병에게 차희라는 감히 똑바로 볼 수도 없는 신 같은 존재가 아니었던가.

‘얘네 왜 이래. 왜 이런 데서 이상한 영화 찍어. 우리 그런 장르 아니야. 무슨 느와르 판 아니라고.’

물론 차희라는 반응하지 않는다.

슬쩍 손을 올려 본인에게 날아오는 검을 잡고, 휙 던지는 것으로 끝.

콰앙!

검을 놓지 않은 최영기는 곧바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벽으로 처박혔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다른 건 다 몰라도 최영기가 억지로 검을 놓지 않은 건 알겠다. 차라리 기절하는 걸 선택한 게 확실했다.

갑작스럽게 급변하는 분위기에 당황했다.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할지 잠깐 고민했지만, 그냥 조용히 희라누나 품에 안겨 술이나 따르도록 하자.

지금은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 포지션이었으니까.

차희라도 그다지 흥분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반응이다. 마치 나를 처음 봤을 때의 얼굴 같다.

저 모습을 보니 어째서 이지혜가 저렇게 행동했는지는 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자기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보였겠지.’

나 역시 비슷한 이유로 흥분한 적이 있지 않은가. 어쩌면 이 판을 그녀가 의도하고 있다는 것에 짜증을 느낀 건지도 모르겠다.

나를 컨트롤 프릭 취급하기는 했지만, 이지혜 그녀 역시 만만치 않은 컨트롤 프릭이었고, 누군가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걸 극도로 싫어했으니 말이다.

거기에 차희라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은 모습을 시종일관 보이니 한 방 먹여주고 싶지 않았을까.

물론 저런 무리수를 던진 가장 큰 이유는….

“재미있었어.”

차희라가 크게 흥분하지 않을 거라는 걸 확신했기 때문이겠지. 오히려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본래 차희라가 그렇다. 누군가가 본인에게 진심으로 기어오른다면 피똥을 쌀 때까지 찍어 누르지만 적절한 선을 지킨다면 저렇게 즐거워한다.

“즐거우셨다니 다행이네요, 용병 여왕님.”

“하지만 조금 기분 나쁘기도 했고. 네가 지금 멀쩡히 서 있는 이유는 네가 손님이라서야.”

“물론이에요. 제가 잘못했다는 것도 이해하고 있고요. 말씀드렸던 대로 확신이 필요했을 뿐이니 너무 노여워하지 마세요. 말씀 중에 죄송한데 이만 나가봐도 될까요? 간부들과 함께 의논할 이야기가 있는데… 아시다시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우리 오빠랑 천천히 이야기 나누세요.”

“…….”

“그럼 안녕히.”

“야.”

“네?”

“박연주 밑에서 얼마 받고 일하기로 했어?”

“스카웃 제의는 싫네요.”

“…….”

“그리고 오빠, 김미영 팀장은 제가 빌려 갈게요.”

“안….”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 돼, 시바… 김미영 팀장 데려가지 마.’

목소리를 내뱉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다.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작은 복수라고 판단해도 되지 않을까.

자신만 갈릴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이지혜가 이번 일에 진심으로 부딪쳐 보겠다고 결심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다.

본래 본인에게 주어진 다른 일까지 전부 처리하면서 붉은 용병을 지휘하는 데는 부관의 존재가 필수적이라 생각했겠지.

‘그래도 김미영 팀장은 안 되는데… 걔 없으면 내가 얼마나 힘들어지는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김미영 팀장은 사수해야겠다고 생각한 타이밍, 조금은 아쉽다는 차희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하던 것보다 더 탐나네. 자기나 박연주가 괜히 데리고 있는 게 아니었어. 이 정도일 줄 알았으면 진작에 데려오는 거였는데….”

“지혜 누나?”

“자기가 왜 그렇게 저 여자를 신뢰하는지 알겠어. 솔직히 들려오는 소문이 과장은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렇게 보이지는 않네. 무엇보다 자기랑 놀라울 정도로 닮은 것 같은데….”

“별로 닮지는 않았어.”

“뭐, 나 싫다는 사람한테 굳이 관심 가지는 것도 우습고, 그럼… 우리는 조금 더 건설적인 이야기를 해볼까.”

“뭐, 따로 하고 싶은 일 있었어?”

“물론,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 소속으로 뛰기로 했으니 슬슬 이쪽 이야기도 좀 해봐야지, 어찌 됐든 운명공동체니까. 뭐, 별건 아니야. 사람 하나 추천하려는 거지.”

“누구?”

“상대해야 할 네임드는 4마리, 이쪽에서 준비된 건 나랑 파란 길드마스터가 전부라고 하지 않았어?”

“누나 말이 맞아.”

“빈 곳 두 자리 아직 정해지지도 않았지?”

“누나랑 김현성 외에는 없어. 정할 수도 없고, 적임자 같은 것도 없어.”

“아니야. 있을 텐데, 자기 가까이에.”

“하얀이는 따로….”

“아니, 걔 말고. 한 명 더 있잖아, 쓸 만한 놈.”

도대체 차희라가 누굴 말하는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봤지만 반 시체처럼 누워 있는 라파엘밖에는 생각나는 녀석이 없다.

그녀 역시 라파엘의 상태를 아는 만큼 녀석을 겨냥하고 한 말은 아닐 것이다.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 아주 잠깐의 침묵 이후 들려온 목소리.

조금은 기대했지만 차희라의 목소리에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 * *

“…….”

“…….”

“왜 그러십니까?”

“거, 기모 형씨. 갑자기 배가 고파서 그러는데 밥 좀 먹고 합시다. 웬만하면 참겠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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