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5
회귀자 사용설명서 665화
벽 넘기(1)
‘이것만큼 중요한 과업이 또 있겠냐고.’
적당히 몸이나 사리라고 만들어준 자리가 아니다.
대륙 손절 계획이 발동됐을 때를 대비한 보험이라고 생각하면 설명하기 편하다.
혹시나 격렬한 전투 끝에 배가 파손되기라도 하면 이도 저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 부닥칠 수도 있으니 처음부터 대비해 놓는 게 옳다.
물론 녀석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리는 없다.
애초에 도망치겠다고 말하기도 조금 그럴뿐더러, 박덕구가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
대충 상륙 작전의 일환이라고 준비해 놓으라고 말해놓는 게 가장 적절한 판단이다.
‘그렇지.’
전황이 전부 흐트러지고 모든 것이 무너지는 상황, 정말 노아의 방주를 발동시킬 수밖에 없는 시점이 온다면, 이 돼지가 전선으로 뛰쳐나갈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한 명이라도 더 구해보겠다고 헛짓거리를 할 수도 있고, 어영부영 미적지근하게 움직이면서 상황을 전부 꼬아놓지 않을까.
내 몸 하나도 챙기기 힘들 텐데, 녀석이 돌발행동을 하는 것만큼 짜증 나는 상황은 없다.
‘그러니까, 이게 더 안정적이지.’
위험한 상황이 찾아오면 곧바로 몸을 돌려, 다른 신호가 오기 전까지 나이스 보트를 지키는 것.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임무를 수행하려고 할 테니, 녀석에게 딱 맞는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괜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을 올려다보자 여전히 풀이 죽은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본인은 잘해보겠다고 했는데, 꾸지람을 들은 게 마음에 남는 모양이다.
“불쌍한 척하지 마, 덕구야.”
“거, 불쌍한 척하는 게 아니요. 그냥 기분이 조금 그래서 그런 거지.”
“…….”
“…….”
“너무 풀 죽지 말고.”
“딱히 풀 죽은 게 아니라니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서 조금 예민해진 것 같네. 그래서 한 소리니까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정말로 널 못 믿어서 화낸 게 아니라 조금만 더 경각심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에, 그러니까 노파심에 지껄인 거니까 표정 좀 펴.”
“그래도….”
“그래도가 아니라 딱 있는 그대로만 이야기 한 거니까. 정말로 마음에 담아두지 마. 내 목소리가 아니라, 일이 터지면 네가 해야 할 일이 뭔지를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으라고. 다른 게 아니라 그게 더 중요한 거야.”
“형님이 무슨 이야기하는지는 알 것 같다니까.”
“난 항상 널 믿는다, 덕구야.”
“정말이요?”
‘그래, 반의반쯤은 믿지.’
“항상 기억하고 있으라는 거야. 매번 말했잖아. 내가 할 수 있으면 너는 더 잘할 수 있다고.”
“그렇지.”
“그래, 그거. 초조해하지 말고 천천히 준비하면 되는 거라고. 내가 괜히 이걸 너한테 맡겼겠어?”
“그, 그건 좀 의외였다니까.”
슬슬 기분이 좋아지고 있는 게 보였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단순한 모습은 괜스레 웃음을 불러일으키게 할 정도다.
솔직히 이게 그렇게 좋아할 일인지 모르겠지만, 녀석은 자신에게 할당된 임무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솔직히 형님이 나한테 뭘 따로 하라고 지시한 건 이번이 처음 아니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아니요. 내 기억으로는 분명히 처음인 것 같다니까. 물론 여러 가지 많이 시키기는 했지만, 이번 일처럼 막중한 임무는 아니었지.”
‘그렇기는 해.’
“기껏해야 심부름 같은 게 전부였고, 이렇게 말하는 게 맞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위험요소가 아예 없는 일이 대부분 아니었나. 당연히 내가 사고도 많이 치고, 형님 눈에는 영 성에 차지 않는 것도 알고 있어서 그렇게 섭섭하지는 않았지만, 뭐 나라고 맨날 저런 일만 맡고 싶었겠소.”
“…….”
“하얀이 누님이나 혜진이 누님, 엘레나 님이나 희영이 누님, 또 우리 형씨 같은 일을 하고 싶었고, 그만큼 신뢰받고 싶었지. 그래서 혼자 한번 지내보겠다고 결심하기도 한 거고….”
‘갑자기 진지하게 만들지 마. 속마음도 괜히 털어놓지 말고….’
“그래?”
“이제야”
“…….”
“이제야 조금 인정받았다는 느낌이요.”
‘그런 말 하지 마, 돼지새끼야.’
이 새끼 혹시 전부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볼 정도, 돼지의 뿌듯한 얼굴은 이쪽의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뭔가 그랬다니까. 나한테는 따로 이런 일을 맡겨준 적이 없으니까. 지금에서야 하는 이야기지만 자괴감도 느끼고 조금 분하기도 하고 그랬지. 형님이 날 못 믿는 거 같았으니까. 솔직히 방금 전에 조금 그랬던 것도 그거요. 모처럼 맡긴 일인데 또 실수나 하고 자빠졌으니까. 나 자신한테 화가 난 거지, 절대로 형님한테 섭섭했다거나 그런 게 아니요. 거의 처음으로 맡긴 막중한 임무인데 시작부터 내가 망쳐 버린 것 같아서….”
‘아니야. 너 망친 적 없어. 잘하고 있다고.’
“이번에도 별로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냥 적당히 수성전이나 하고 있을 줄 알았지.”
‘적당히 수성전 하게 될 거야….’
“형님이 보내준 매뉴얼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형님은 모를 거요.”
‘시바….’
“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는 거 아니요!”
“양념 치지 마.”
“아니, 진짜라니까. 내 모든 걸 걸고 맹세하는데 진짜요. 거기 기모 씨도 있었으니까 안 믿기면 한번 물어보던가. 조금 꼴불견이기는 하지만 기쁘니까 눈물이 막 나온 거지. 이렇게 위험한 일을 맡길 정도로 나를 신뢰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 말이요.”
“으응….”
“몸이 부서지더라도 이번 일은 완수할 거요.”
“그렇게 책임감 느끼지 않아도 돼. 어디까지나 일이 틀어졌을 때 계획이 실행되는 거니까. 그때까지는 이전 그대로지. 사실 나는 네가 이걸 타고 전선으로 향할 일이 없으면 좋겠다. 상황이 정말로 거기까지 간 거면 꼬일 대로 꼬였다는 뜻이 되거든.”
“이해할 수 있소.”
“네가 나서는 건 어디까지나 신호가 갔을 때야. 전략적으로 네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다른 것보다 그걸 잊으면 안 돼. 저걸 쓸 일이 없는 게 가장 좋은 거야.”
“매번 했던 이야기 아니요. 가슴속에 새기고 있으니까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고… 아무튼 밥은 먹었어?”
“아직 안 먹었는데.”
“오랜만에 밥이나 같이 먹자.”
“정말이요?”
“나도 시간이 남으니까. 예리랑 안기모도 주변에 있지? 다 같이 먹는 게 좋겠네.”
‘상륙 작전 같은 건 없어, 덕구야. 그런 건 없다고… 네가 활약할 날은 오지 않을 거라고….’
일단은 다급히 말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인정을 받았다는 녀석의 당당한 얼굴을 보니 더 이상 이 대화를 지속시키기가 민망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꾸만 콧김을 뿜으며 상륙 작전의 돌격대장 얼굴을 하고 있다.
평소보다 힘이 들어간 눈, 위풍당당한 걸음걸이, 모든 행동이 양심을 찌른다.
솔직히 박덕구의 마음도 이해는 한다. 어째서 내가 녀석의 마음을 모를까.
파란 길드가 자리 잡은 이래로 박덕구에게는 별다른 임무를 주지 않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애초 이런 종류의 작전에서 녀석을 메인으로 기용한 적이 없다.
박덕구의 역할은 민주투사 아니면 고기방패였고, 솔직히 녀석을 중심으로 어떤 일을 맡긴다는 것 자체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녀석의 안전을 걱정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걱정하는 게 맞기는 하지만 승률이 조금 더 좋은 쪽에 건다는 건 내 입장에서는 무척 당연한 일이다.
파란에는 굳이 박덕구가 아니더라도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이들이 있었고, 지금까지는 파티가 쪼개질 일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이거 진짜 맡겨볼까?’
“솔직히 이 배를 이런 식으로 쓸 줄은 몰랐는데 말이요.”
“나도 그래.”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잖아. 조금만 더 가다듬고 두 시간 정도만… 쓰면….’
“도움이 된다니 다행이지.”
‘애초에 나머지 두 마리를 무슨 수로 막을 거야? 전선 한쪽은 완전히 쓸려 버릴 텐데. 일단 박덕구로 틀어막으면….’
“어, 저기 예리랑 기모 형씨 오네.”
“오랜만입니다, 부길드마스터. 이렇게 보니 정말 반갑군요.”
“오랜만.”
“오랜만이네. 기모 씨도 오랜만입니다.”
‘아니야. 시간이 너무 부족해.’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어도 녀석을 집어넣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
“…….”
“이것 보라니까! 이렇게 하면 적어도 세 배는 더 강해질 수 있는 거 아니요? 내 어깨를 기모 형씨가 밟고 올라가고 기모 형씨 위에 예리가 목마를 타는 거지. 삼단 합체요. 삼단 합체. 충분히 상대방을 당황시킬 수 있겠지.”
“바보 같아.”
‘즐거운 듯이 웃지 마, 예리야. 너까지 어울려 주니까 얘네가 더 이러는 거 아니야. 아직 순수함을 잃지 않은 건 좋은데 그래도 체통은 지켜야지.’
“적어도 몬스터들한테 위압감을 심어줄 수 있다는 부분에서는 그 누구도 반박의 여지가 없을 거요. 기모 형씨가 곧바로 위아래로 신성력을 밀어줄 수도 있고, 여차하면 예리가 분리하는 거지.”
“멋있네.”
“역시 형님은 그렇게 이야기해 줄지 알았다니까.”
“진지하게 실전에서는 쓰지 마라. 앉아서 밥이나 먹어.”
“여기에 형님만 내 등 뒤에 매달리면 완벽해지는 거요.”
‘아니야, 별로 완벽한 것 같지는 않아.’
어쩌다 대화가 이쪽으로 빠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식사 도중에 일어나 삼단 합체를 선보이는 녀석들의 모습은 뭐라 설명할 수가 없다.
안기모는 적당히 어울려 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김예리는 정말로 즐거워 보인다.
한창 저러고 놀 나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보지 못한 사이에 박덕구와 안기모에게 물들어 버린 것 같은 느낌.
공중제비를 돌면서 착하고 착지에 신경 쓰는 모습은 매혹의 춤을 마스터한 예트니코바의 모습 그 자체였다.
이딴 걸 보고도 얘한테 전선 한쪽을 맡길 수는 없다.
이 33일간 박덕구한테만 집중할 수 있다면 아주 약간의 가능성이라고 있었겠지만 차희라나 정하얀의 일도 전부 다 해결되지 않았다.
큰 소리로 고래고래 떠들며 재미있게 놀고 있는 박기리 삼남매를 뒤로 하고 재빠르게 연락을 넣기 시작했다.
[누나, 누나, 누나.]
[왜요? 쓸데없는 거로 메시지 보내지 마요. 누구 때문에 바쁘니까.]
[하연수 좀 빌려도 돼?]
[됐네요. 걔도 1티어로 올라온 지 얼마 안 돼서. 무리예요. 괜히 시체 하나 치우게 하지 말고 제가 이야기했던 대로 대륙의 절반 날려요. 아, 차희라 건만 잘 해결되면 1/3 정도만 날리면 되겠네. 어떻게 됐어요? 차희라랑 정하얀 전투 훈련시킨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아무리 바빠도 그건 꼭 볼래.]
[진행 중.]
[최대한 빠르게 진행해요. 회복할 시간도 있어야 하잖아요. 용병 여왕이 먼저 하고 싶다고 한 거 맞죠?]
[비슷해. 안전 장치를 먼저 마련해야지. 크게 다치면 그것도 일이니까.]
[자기가 아직 부족한 건 아는 모양이네요. 박덕구 쪽은 어떻게 할 건데요?]
[가능성이 보일 것 같지는 않은데.]
[오빠가 그렇게 판단한 거면 어쩔 수 없는데, 저는 나쁘지 않을 거라고 봐요.]
바로 앞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밥 먹다 말고 무슨 연락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