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667화 (658/1,590)

# 667

회귀자 사용설명서 667화

벽 넘기(3)

사실 떡밥을 뿌린 것은 차희라와의 대담이 끝난 이후였다.

차희라가 아무나 하고 한번 싸워봐야 할 것 같다는 말을 던진 직후였다.

반쯤은 도박하는 심정으로 정하얀을 슬쩍 내밀 수밖에 없었다.

벽을 넘어야 할 것 같다고 한 차희라처럼 정하얀 역시 벽에 부딪힌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간단했다.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고, 모의전은 그렇게 결정됐다.

이것저것 따지면서 생길 변수 하나하나를 고려했다면 조금 더 좋았겠지만, 솔직히 그 정도로 한가한 상황이 아니었다.

박덕구의 일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한 것도 결국 시간 때문이지 않은가.

‘아쉽기는 하네.’

평소였다면 무조건 반대했을 테지만, 한소라에게 한 번 더 대륙을 구해달라고, 부탁 아닌 부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차희라 역시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마지막 전투에서의 배역의 중요도로 따진다면 정하얀에게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 하얀이가 어느 정도까지 성장하느냐에 따라서 확률이 극단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 단호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솔직히 한소라가 없었으면 시도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말 그대로 처음부터 한소라를 통해 쌓아 올린 빌드업.

차희라가 정체불명의 천재 마법사 박미진에게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한 채 깨졌다는 걸 알린 것도 한소라였고, 계속해서 정하얀의 상태를 체크하고 있는 것 역시 한소라였다.

본인 역시 무척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전출의 꿈을 버리지는 못했는지 조금은 적극적으로 상황을 리드하는 중이다.

물론 몸에 기억된 공포는 사라지지 않겠지만 적어도 이전보다는 상황이 더 나아졌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고 했던가. 이미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 한소라에게 눈앞의 위험은 보이지 않는 것만 같았다.

‘참, 담도 커….’

슬슬 체크해 봐야 할 것 같아서 고개를 돌려 망원경을 발동시키자, 정하얀과 한소라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오늘 같이 식사하면서 조금 더 정보를 흘리라고 말했으니 아마 이 건과 관련된 대화를 하고 있지 않을까.

분위기를 보아하니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낸 지 시간이 조금 지난 모양, 정하얀의 모습은 여전했다.

망원경으로 수시로 체크했던 그 모습 그대로다.

며칠 동안 머리는 감지 않은 것으로 보였고, 방 안에 처박혀 나오지 않은 적나라한 모습이 눈에 띈다.

제대로 뭘 먹지도 못했는지 피부가 푸석푸석해진 모습, 정하얀을 방 안에서 빼내 와서 식사시간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영웅 등급의 퀘스트가 아니었을까.

정하얀의 모습은, 그녀가 그동안 얼마나 필사적으로 공부했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었다.

조금 기분이 찝찝하기는 했지만, 조금이라도 1회 차 정하얀에게 닿게 하기 위해서는 이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생각으로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었다.

당연하지만 곧바로 목소리가 들려온다. 무척 떨리는 목소리였고, 적어도 중노 상태로 접어든 듯한 모습이었다.

‘처음부터 봤어야 했는데….’

-어, 어, 어, 어떻게… 어떻게 이겼다는데? 그건….

-저도… 자세한 건 잘… 모르겠어요. 비밀리에 이루어진 모의전이라 외부에 알려지지도 않았고요. 저도 김미영 팀장님한테 살짝 전해 들어서… 그렇게 알고만 있거든요.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들리는 이야기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여자의 페이스였다고 하더라고요.

-박미진.

-네, 생각보다 재능이 있는 것 같았어요. 모의전이라고 해도… 그 붉은 머리 여자가 쉽게 질 리가 없는데… 숨기고 있는 한 수가 있는 게 아닐까요. 아무리 강하다고는 해도 마법사가 전위를 제압한다는 건 힘든 일이죠. 캐스팅할 시간도 없을 테고, 어쩌면 대인전이 특기일 수도 있겠네요. 그런 종류의 마법사들도 나오기는 하니까. 정하얀 님도 가능하시잖아요. 100%… 확실해요.

-그, 그, 그래도….

-별거 아니에요. 아무리 천재라고는 해도 정하얀 님만 하겠어요? 여러 가지로 부풀려진 내용도 많을 거고… 또 조금 과장해서 말하는 게 일반적이니까. 괜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래서 나, 나, 나도 차, 차희라랑 모의전 하는 거지? 언, 언제 할까? 언제….

-글쎄요. 아마 곧 하지 않을까요. 연락 주신다고 했으니까, 지금부터 준비하면 될 것 같아요.

-나, 나, 나도 이길 수 있겠지?

-물론이죠. 박… 미진이 하는 걸 정하얀 님이 못 하실 리가 없죠. 분명히 이길 수 있으실 거예요. 그리고… 중요한 모의전이니까요. 마음 단단히 먹으셔야 해요. 준비도 단단히 해야 하고요. 여러 가지로 제가 도와드릴게요.

‘도가 텄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확실히 외줄 타기 달인의 모습이라고 할 만했다.

1년 동안 고층 건물에서 외줄 타기를 홀로 해왔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치고 빠지기는 어떻게 보면 이상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

솔직히 쟤를 정말로 전출시키는 게 옳은 건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마 전출 간다고 하더라도 정하얀 분노 대응팀에서 대마법사 분노 조절 위원회로 전출 가지 않을까.

높은 연봉에 본인도 행복한 비명을 지를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솔직히 내가 신경을 써서 다른 지역으로 간다고 하더라도….

‘하얀이가 놔둘 것 같지는 않은데.’

정하얀에게 이동 거리는 의미가 없었으니까.

이미 그녀를 둘도 없는 친구로 여기는 만큼, 만약 전출을 가더라도 지금과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소라도… 한 번이라도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넘 불쌍하잖아.’

-마음… 단단히… 응, 마음 단단히 먹어야지.

-네, 대외적으로 밝혀진 것도 아니고, 공식적인 발표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이번 일은 정말 중요한 거라서… 차희라와 박미진의 모의전을 진행시킨 이후에, 곧바로 정하얀 님과 모의전을 추진한 이유가….

-이, 이, 이유가 뭔데?

-그러니까.

-이, 이유가 뭐야?

-말, 말씀드릴게요. 지금 말씀드릴 거예요. 그러니까… 조금 특별한 임무를… 네, 끕, 특별한 임무를 맡기려고 한다고… 부길드마스터와 함께 중요한 일을… 히끅.

-그, 그런 거야?

-확실한 건 아니에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요. 수준이 높은 전위를 마법사가 상대해야 할 만한 미션이 있으니까. 그 미션에 부합하는 인선을 뽑으려고… 네, 물론 부길드마스터가 정하얀 님을 사랑하신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이건 일이니까요. 조금 더 강한 마법사 쪽을 고려해 보는 게 당연할 테니까, 히끅.

자꾸만 딸꾹질하는 모습, 하지만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만큼 긴장했다는 걸 말해주는 것만 같지 않은가.

솔직히 한소라의 용기도 놀랍다. 전출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공포와 두려움과 마주하는 모습은, 마왕과 마주한 용사의 모습과도 같은 처절함과 신념이 있다.

-이, 이, 이길 수 있을까. 차희라… 진짜 싫은데… 진짜 싫은데… 세단 말야.

-아마 무난하게 이기실 수 있으실 거예요. 박미진도 해낸 일이잖아요? 뭔가… 약점이 있지 않을까요.

-차희라 진짜 싫은데… 차희라보다 박미진이 더, 더, 더 싫어. 박미진, 진짜 싫어.

-저도 박미진… 별로 안 좋아해요. 부길드마스터한테 접, 저업… 근한다는 소문도 싫고, 뭔가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아서….

-그, 그, 그렇지?

-네,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왔다는 것도 너무 웃기잖아요… 어쩌면 그, 저번에 악마 계약자들 같은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조금 더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부길드마스터는 사람을 너무 잘 믿으시니까요.

-그, 그런 거였으면 좋겠는데… 만약에 나쁜 사람이면….

-…….

-죽일 수 있잖아.

-죽이면 안 돼요. 네, 죽이면….

-그때는 같이해 줄 거지?

-…….

-그렇지?

-일… 단은 차희라와의 모의전이 먼저니까요.

-같이해 줄 거지?

-그 일부터 집중하는 게 더 좋지….

-같, 같, 같이해 줘.

-네, 물론이죠….

갑작스럽게 박미진 살인 계획으로 탈바꿈한 현장에 왠지 모르게 내가 다 눈치가 보인다.

머리를 손톱으로 쥐어뜯고 있는 정하얀은 내 생각보다 조금 더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자신 없나 본데….’

조금 의외라고 할 수 있는 부분, 그만큼 차희라를 찍어 누른다는 과업이 쉽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아마 자신에게는 불가능한 과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거의 그런 것처럼 느껴졌다.

표정은 아까보다 더 어두워졌고, 이야기가 시작됐을 때보다 더 초조해 보였다.

이전에 한 번 들고 일어섰다가 찍어 눌린 기억이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차희라가 쉽지 않은 상대라는 걸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맹수가 자신보다 더 사나운 맹수를 만났을 때처럼, 정하얀은 그때 이후로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차희라의 영역을 존중하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그녀가 영역에 발을 들이는 걸 못 본 척하기로 스스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물론 차희라가 중요한 인물이고 오빠가 아끼고 좋아하는 인물이라는 것이 결정적이었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하얀의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차희라가 강자였기 때문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정하얀의 안에서 차희라는 큰 사람이다. 본인조차도 이기기 쉽지 않다고 판단하는 인물일 테니 저런 불안감을 보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어떻게 이긴 거지?’

라거나.

‘무슨 수를 쓴 거지? 박미진은 대체 뭐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라거나.

‘내가 이길 수 있을까? 할 수 있을까? 저번에도 졌었는데… 이번에도 질 것 같아.’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올 정도로 벅벅 긁고 있는 모습을 보기가 무서웠는지 한소라가 정하얀의 양팔을 꽉 붙잡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맞아, 하얀아. 스탯상으로는 네가 더 유리해.’

-진정하세요, 정하얀 님. 분명히 성공하실 수 있으실 테니까요.

-안, 안 되면….

-그럴 리가 없잖아요. 설사 안 된다고 하더라도 다른 방법이 있고… 또 결과적으로 부길드마스터가 정하얀 님을 내버려 둘 리가 없으니까요.

‘맞아. 그건 그래.’

-끄으윽, 끄으윽, 끄윽….

-너무 부담 가지지 마세요.

‘아니야, 부담 가져야 돼. 진짜 미안하기는 한데… 지금은 부담 가지는 게 맞아. 원래 아프면서 성장하는 거잖아. 하얀이가 또 언제 이런 시련을 겪어보겠어.’

-끄윽, 끄으으윽, 흐윽….

‘근데 너무 서럽게 울어서 내가 다 미안하다. 더 울어야 할지도 몰라서 그게 더 미안하고….’

-두 분이 오붓하게 같이 사실 날도 얼마 안 남았잖아요?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되니까. 네, 그러면 되니까. 조금만 더 힘내요, 우리….

-끄으윽, 소라도 옆집에서 같, 같이… 살, 살, 살 거지?

‘그건 소라한테 너무 가혹한 일이야, 하얀아.’

-…….

-그럴 거지?

-…….

-그럴 거잖아.

-네….

순간이었지만 한소라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걸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뭔가가 잘못됐다는 얼굴이다. 이건 아니라는 듯한 눈빛, 공허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는 한소라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힘, 힘, 힘낼게, 소라야. 차희라… 차희라 이길 수 있어. 박미진도 죽, 죽일 수 있어.

-그렇죠…?

-절대로… 안, 안, 안 뻇겨.

-…….

-절대로, 절대로… 안 뺏겨. 절대로 안 뺏길 거야. 절대로… 절, 절, 절대로….

한소라의 몸이 덜덜덜 떨리는 게 시야에 비친다. 나 역시 저 자리에 있었다면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까.

정말로 오랜만인 것 같다. 옛날 같은 정하얀의 모습을 보는 건 정말로… 정말로 오랜만인 것 같았다. 괜스레 불안감이 차오른다.

[누나, 제대로 준비하고 와. 진짜 옛날에 하얀이 상대하는 것처럼 하지 말고, 김현성이랑 싸운다고 생각하고 준비해야 돼.]

그런 메시지를 보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말이다.

* * *

“난 언제나 제대로 준비하고 있어, 자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