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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668화 (659/1,590)

# 668

회귀자 사용설명서 668화

벽 넘기(4)

“하얀이 왔어? 정말 오랜만이네.”

“오, 오, 오빠.”

“어떻게, 그동안은 잘 지냈고?”

“네, 네… 잘, 잘 지냈어요. 네, 조금 힘들기는 했는데… 그래도 잘 지냈어요. 오빠도 잘 지내셨죠? 네….”

“응, 좀처럼 연락을 주지 못해서 미안하네. 워낙에 바빠서… 미안해, 하얀아.”

“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오빠가 미안할 일이 아니잖아요. 오빠가 미안할 일이 아니니까. 네… 그렇죠.”

“소라 씨도 오랜만이네요.”

“네, 부길드마스터, 네….”

“작업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네, 크게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사실 물량을 전부 다 맞출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괜찮으니 안심하셔도 돼요.”

“소라가 열심히 만, 만, 만들고 있어요.”

“그래?”

‘눈을 제대로 못 쳐다보겠네.’

정하얀에게 미안해서 눈을 쳐다보지 못하겠다는 것보다는 얘 눈이 맛이 간 것 같아 제대로 마주하기가 무섭다.

‘계속 이런 건 아니야.’

그 날 이후로 계속 망원경으로 상태를 지켜보기는 했지만 여전히 저런 눈을 하고 있는 상태다.

그래도 이쪽을 보러 와야 했기 때문인지 깔끔한 모습을 하고 오기는 했지만,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건 여전했다.

다른 건 모두 둘째 치더라고 눈, 눈이 문제다.

‘아, 이거 괜한 짓 하는 거 아닌가. 이거 벌집 건드리는 거 아니야?’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가 죽은 것같이 보이는 모습이다.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하얀이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분명히 열등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 나름대로 많이 준비하고 또 마음을 다잡기는 했지만, 천재 마법사 박미진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는 못한 모양이다.

정하얀을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쏟아부었지만 다시 처음으로 회귀한 것 같은 느낌.

어울리는 예는 아니었지만 김현성이 느낀 절망감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일이 끝난 이후에 다시 한번 정하얀을 이전과 같은 상태로 되돌려야 한다고 상상해 보라.

괜스레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정하얀을 안심시켜야 했고, 완전히 내려간 자존감도 처음부터 올려줘야 했다. 물론 모든 일이 전부 다 끝난 이후에.

‘지금 상태로는 이게 가장 최선이야.’

정하얀의 질투와 분노는 기본적으로 낮은 자존감을 베이스로 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내 해석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정하얀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인간쓰레기 같은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상황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기도 했고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모든 게 자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탑재하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언제든지 버림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정하얀은 끊임없이 불안해했고, 그 불안감은 2회 차 성장의 원동력이었다.

단순히 맛이 간 상태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가 필사적으로 마법의 손을 붙잡았기 때문에 성장했다고 판단하는 것이 맞다.

간단한 인사를 마친 이후에는 허겁지겁 이쪽으로 달려와 옆쪽을 차지하는 모습, 그제야 한소라의 입가에 편안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들고 있는 폭탄을 남에게 떠안긴 것과도 같은 모양새.

최근 봤던 표정 중에 가장 행복해 보이는 표정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너 그렇게 행복해해도 돼? 너무 티 내지 마.’

지금 이 상황이 그녀에게는 천국이 아닐까.

“준비는 조금 했고?”

“네, 조, 조, 조금요.”

‘필사적이었잖아. 그동안 많이 봤어.’

“너무 그렇게 무리하지 않아도 돼, 하얀아. 이미 말했다시피 그냥 모의전이고 별다른 의미는 없으니까. 여러 가지 데이터가 필요해서, 그냥 딱 그 정도야. 괜히 무리하다가 다치니까. 그냥 연습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돼.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지?”

“네, 알, 알, 알고 있어요, 네.”

아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지금 같은 상태에서는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으니까.

이쪽의 왼쪽 팔을 어찌나 세게 잡고 있는지 내 팔이 다 얼얼해질 지경이다.

마법사치고 은근 근력 수치가 높은 정하얀의 악력에 팔이 부러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모의전은 이쪽 숲에서 진행될 거고 따로 룰을 두지는 않을 거야. 어떻게 하든 하얀이 마음이니까 마음 편하게 하면 돼.”

“네, 편, 편하게 할게요. 그렇게 해야죠. 차… 희라는 언제 와요?”

“아마 곧 오지 않을까 싶은데.”

“왔어, 자기, 오랜만이네, 세컨드도. 이게 얼마 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지?”

“…….”

“급하게 오느라 밥을 안 먹고 왔는데 뭐 간단히 요기 좀 한 뒤에 해도 상관없지?”

“누나 마음대로 해.”

“너희도 같이 먹고 시작하지. 거기 그러니까… 파란의 한소라. 너도 같이.”

“아니요, 저는….”

“빼지 말고.”

“네.”

차희라도 양반은 되지 못하나 보다.

그리폰에서 내린 이후, 털털하게 입을 열어왔다.

평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 모습, 조금 긴장하고 있는 정하얀의 모습과는 반대로 차희라에게는 여유가 느껴졌다.

본인이 정말로 깨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만 같다.

솔직히 정하얀을 봤을 때 혹시나 그녀가 차희라를 찍어 누르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지만 차희라의 모습을 보니 또 그렇지 않다.

조심하고 있는 건 정하얀 쪽이었고 차희라는 평소처럼 강자의 입장에 서 있다.

“뭐, 대충 앉아서 먹자.”

굳이 함께 식사하는 게 필요한 일인가 싶기도 했지만 나쁠 것 같지는 않다.

이렇게 앉아서 이야기하는 게 감정이 상하는 걸 도와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가 죽여야 하는 적이 아니라 일단은 동료라는 걸 도와주는 작업이지 않은가.

그 와중에 조금 눈에 띄었던 것은 그녀가 가져온 거대한 포댓자루였다.

자기 몸보다도 더 커다란 것 같은 포댓자루를 어째서 가져왔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마음의 눈으로 한차례 확인한 이후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무기와 방어구.’

마실 나온 분위기였지만 확실히 준비는 한 모양, 그녀로서도 지금의 정하얀이 만만치 않다고 판단을 내린 것 같았다.

‘하긴 맨몸으로는 못 받지.’

이전처럼 맨손으로 마법을 튕겨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차희라 역시 이해하고 있다.

‘이길 수 있겠지.’

단순하게 생각하면 정하얀이 우위에 있지만, 경험치 자체가 다르지 않은가.

용병여왕은 수없이 많은 전선을 넘나들며 경험을 쌓은 고인 물이었고 그 경험은 모두 그녀의 육체 속에 내재되어 있다.

잠깐 이성을 잃는다고 한들 쌓아왔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윽고 갑작스럽게 시작된 식사시간, 신나게 고기를 뜯고 있는 차희라와는 다르게 정하얀은 그 어떤 것도 입에 대지 않고 있다.

자꾸만 이어지고 있는 침묵에 괜스레 불편한 느낌이 든 것은 당연했다.

불안해하고 있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위험 전문가 한소라 역시 아까의 표정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 것 같아 급하게 말을 이을 수밖에 없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서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하는 게 좋을 것 같고….”

“그 정도야 알고 있어.”

“너무 멀리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만약에 사고가 터지면 수습해 줄 인원도 대기 중이고 몇 가지 안전장치도 마련되어 있으니까. 너무 소극적으로는 하지 않아도 돼.”

“지켜야 할 게 많네. 무리해서도 안 되고, 소극적으로 해도 안 되면….”

“…….”

“뭐, 대충은 먹었으니까 슬슬 무장이나 입어야지.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자기는 최대한 떨어져. 여기서 대기하지 말고, 조금 더 떨어지라는 거야. 괜히 야한 냄새 풍기지 말고.”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누나. 내가 언제 그런 냄새를 풍겼다고 그래.’

“항상 입을 때마다 귀찮단 말이야. 그리고 이 포댓자루도 들고 다니기 귀찮아 죽겠는데, 무한의 가방은 매물이 없어요. 매물이 없어,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으면 진작에 좀 사놓을 걸 그랬다니까.”

‘나는 많이 가지고 있는데.’

하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멋들어진 검정색 갑옷을 부위별로 착용하느라 바빠 보이지 않은가.

당연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광경이다. 차희라가 평소에 입고 다니는 옷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다.

그녀의 말 그대로 착용하는 것부터가 일처럼 느껴질 것 같은 중량감이 전해진다.

물론 저게 차희라한테 얼마나 무겁겠냐만은 애매한 전위에게는 무척 무거운 무게로 느껴질 것이다.

세트는커녕 한 부위도 들지 못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심지어 양손에 커다란 대검과 커다란 도끼를 들고 있는 모습은 신화에서나 나오는 전사 같은 외형이다.

‘위압감….’

정하얀 역시 느끼고 있지 않을까. 별다른 말을 해오지 않고 있었지만 긴장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긴장돼?”

“별, 별, 별로요.”

“긴장 풀어. 어차피 모의전인데 뭐 어때? 뭐 너한테는 걸린 게 조금 많으려나. 강하긴 강하더라, 박미진.”

‘누나, 왜 그래.’

“정말로 강하더라고. 나도 오랜만에 자존심이 좀 뭉개졌지 뭐야. 적당히 해도 돼, 세컨드. 내가 볼 때는 결과도 뻔할 것 같은데. 솔직히 자기 부탁 아니었으면 여기 와 있지도 않았을 거야.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것 같은 느낌이니까. 뭐, 최선을 다해봐.”

‘누나, 그만해.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아.’

[이거 진짜 꿀잼이네요. 빨리 시작 안 해요?]

‘누나도 그만해, 시바 좀.’

“…….”

터질 것 같은 장내가 괜스레 불안하게 보인다.

아마 쓸데없는 차희라의 발언은 그만큼 진심으로 싸우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미적지근하게 토닥토닥거리다 훈련 끝이라고 말하는 건 그녀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다.

물고를 박미진으로 틀었으니 마무리도 한 번 박미진으로 해보겠다는 심산이겠지.

“내가 살기 지우는 방법 좀 배우라고 하지 않았었나.”

“짜, 짜, 짜증 나… 짜증 나는데… 진짜….”

작은 목소리로 천천히 중얼거리기 시작하는 정하얀의 모습도 시야에 비친다.

같은 자리에 없어도 된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히 만족스러워지는 시점이다.

이 괴수 대격돌에 휩쓸리면 누구라도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빨, 빨리 가요, 부길드마스터. 빨리요, 빨리.”

“알겠….”

“지금 가야 해요. 지금… 지금 가야 할 것 같아요. 지금 여기 빠져나가야 한다고요. 지금….”

“아니, 잠깐만… 기다….”

“지금 빠져나가야 한다고….”

“아니, 뭐가 그리 급해.”

“지금 가야 한다고! 이 시발놈아!”

한소라의 목소리가 튀어나온 직후 갑작스레 숲에 있는 새들이 하늘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시바, 깜짝이야.’

자연재해가 일어나기 전의 숲 같은 느낌, 조금 놀라운 것은 한소라가 저 야생 동물들보다 자연재해를 먼저 감지했다는 것.

‘얘는 정체가 뭐야’

잠깐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제는 바로 눈앞에 있는 나한테도 느껴진다.

차희라는 여전히 히죽히죽거리고 있었고, 정하얀은 점점 고개를 숙이며 들리지 않은 목소리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준비 시작이라고 말해주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어울리는 상황이 아니다.

핏발이 선 눈으로 입술을 꽉 깨무는 정하얀, 당연히 입에서는 붉은색 피가 흘러내렸지만, 본인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너, 그러다 뺏기겠더라.”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콰드드드드드드득!

폭음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

차희라의 몸이 몇백 미터가량 떠서 반대쪽으로 처박히는 비현실적인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튀자.”

이미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붉은색 괴물이 입꼬리를 한껏 올리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고, 나는 곧바로 몸을 돌려 그리폰 안장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튀어!!”

“두고 가지 마요. 두고 가지 마… 나, 두고 가지 마!”

“…….”

“제발, 제발!”

“빨리 튀어!!”

“야, 야 이 개새끼야! 나 두고 가지 말라고! 흐어어엉… 두고 가지 마! 흐으윽… 두고 가지 말라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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