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0
회귀자 사용설명서 670화
벽 넘기(6)
‘저게 정말 재미있는 상황이야?’
아마 내가 차희라의 입장이었더라면 곧바로 무릎을 꿇고 살고 싶다고 외치지 않았을까.
누구나 그렇게 행동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김현성조차 저 운석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언정 즐거운 듯이 웃지는 못할 것이다.
애초에 그런 성격도 아니었지만 그만큼 정하얀이 떨어뜨린 운석은 좌절감을 느끼게 했다.
‘저건 막지 못할 거야. 살아남을 수 없어.’ 따위의 말을 내뱉게 되는 절망적인 상황.
대마왕이 용사 파티를 향해 떨어뜨린 필살기처럼 보이는 수준이다.
이미 정형화된 마법이라고 볼 수 없는 무언가는 대륙의 다른 마법사들이 보여줄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더 끌어당기는 쪽이 붉은 머리의 괴물 쪽이라는 게 아이러니하다.
-하하하하하하하핫!
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차희라의 관점에서 보면 확실히 즐거울지도 모르겠다.
제대로 된 싸움을 하지 못한 채로 시간을 보낸 지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던가.
머릿속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준다고 몬스터의 숲을 들락날락하긴 했지만, 녀석들이 그녀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을 리 없다.
그녀는 정신이 날아갈 정도로 치고받는 걸 원하고, 또 원했고 실제로 그걸 실현했다.
아직 싸움이 끝나지는 않았지만 어떤 성취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 감각이라고, 이걸 원했던 거라고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취한 듯한 기분이 아닐까. 그녀는 싸움에 중독된 것처럼 보였다.
천천히 붉어지는 눈, 지성을 깎아내리는 대가로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근력이 일시적으로 그녀의 몸에 깃들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 운석에 저항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양팔을 크게 벌리며, 오히려 떨어지는 마법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웃음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짐승이 그륵거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차희라의 도끼가 운석에 닿았고.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차희라가 운석을 향해 대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우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발이 땅바닥에 박힐 정도의 압도적인 질량을 견디는 것은 그녀의 육체, 맨몸이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아이템들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거 푹 찍 하겠는데? 푹 찍 할 것 같은데? 압사하는 거 아니지? 누나?’
차희라가 다시 한번 도끼를 휘둘렀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직!!
떨어지던 운석이 흔들리고, 정하얀은 입술을 꽉 깨물고 있다.
어떻게든 저걸 땅바닥에 내리꽂으려는 이와 튕겨내려는 이의 싸움은 입이 다 말라올 정도였다.
‘구하러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차희라 죽으면 다 망하는데… 곧바로 노아의 방주 타야 돼.’
콰지지지지지지직!
발목이 땅에 박혔을 즈음에 한 번 더 휘둘러지는 도끼.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부수려는 건가?’
솔직히 가능할지 모르겠다. 현시점에서는 나 역시 그녀가 버틸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쓰러져!!! 이 괴, 괴, 괴물!! 괴물!!! 제발 쓰러져! 이 괴물!!
자기도 괴물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외침이 들려온 직후에는 다시 한번 더.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운석을 지탱하고 있는 한쪽 팔은 완전히 만신창이. 압력에 의해 갑옷이 터져 나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나 역시 침을 삼키고 바라볼 수밖에 없다. 정강이가 바닥에 박힐 즈음, 다시 한번 도끼를 휘두르는 모습이 보인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안 부서질 것 같은데? 저거 안 부서지겠는데? 차희라 죽는다, 시바. 안 돼, 희라 누나 죽으면 안 돼.’
힘이 달리는지 도끼를 휘두르던 손마저 운석을 떠받친다.
사실상 끝난 싸움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저걸 쪼갤 수 있을지언정 되돌리거나 튕겨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연하지만 받아내는 것 또한 불가능할 것이다.
계획은 흐트러졌지만, 일단은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던 바로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뭐야.”
또다시 폭음이 들려온 것.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엄청난 소리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여신의 거울에 보이는 장면은 운석에 머리를 박고 있는 차희라의 모습.
‘갑자기 무슨 박치기야.’
더 황당한 것은 거대한 운석에서 후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이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떨어져 내리던 운석이 부서지는 것이 보인다. 내부에 충격이 쌓인 건지 계속해서 터져 나간다.
비현실적인 광경을 충분히 봤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이는 모습은 허탈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결국에는 귀를 때리는 소리와 함께 운석이 폭발하든 사방으로 터져 나간다.
내 표정보다 더 볼 만했던 것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한 정하얀.
-제발, 제발 쓰러지라구!!
차희라는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파편의 비를 맞이하는 중이다.
다양한 효과음을 가진 굉음을 내며 파편들을 쳐 내거나 때려 부수고 있다.
아까와 차이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 공중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파편들을 밟고 정하얀이 떠 있는 하늘을 향해 몸을 움직이고 있다.
김현성처럼 정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다리의 근력이 선물해 준 속도는 방향을 바꿀 수는 없지만, 직선적인 움직임에는 강하다.
무작정 위를 향해 나아가다 보니 떨어지는 운석의 파편에 맞아 나가떨어지거나 자잘한 것들이 몸에 부딪혔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다.
정하얀의 몸이 사라진 것은 차희라가 중간쯤 올라왔을 때였다.
‘텔레포트.’
“거리를 벌린 건가?”
순간이동을 가지고 있는 그녀에게 이미 거리 따위는 무의미하다.
전사와 마법사가 전투를 벌일 때 2번째로 중요한 요소인 거리는 정하얀이 컨트롤하고 있다.
운석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차희라는 잃은 게 많다.
정하얀 역시 마력을 많이 사용하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라면 차희라의 체력이 먼저 떨어질 게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했다.
순간이동의 목적지가 차희라의 뒤라는 걸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
근거리에서 마법을 쏘아낼 작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한번 굉음과 함께 차희라의 몸이 튕겨 나간다.
그녀 역시 정하얀이 접근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망원경으로 제대로 잡히지 않을 정도로 몸을 이동시키며 온갖 마법을 차희라의 몸에 때려 박는 정하얀의 모습은 옛날 만화책에서나 보던 초인을 떠올리게 했다.
잠깐이나마 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자 마력의 빛이 번쩍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붉은 짐승이 야심 차게 공중으로 올라갔지만 처맞는 것밖에는 하는 게 없다.
아직도 떨어지고 있는 파편을 잡아 던지거나 정하얀을 쫓으려고 애쓰고 있지만 순간이동을 사용하고 있는 마법사를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희라는 초조해하지 않는다. 조금 짜증이 난다는 모습을 보이는 게 전부다.
텔레포트를 하며 외운 짧은 주문으로는 결정적인 대미지를 줄 수 없다. 정하얀 역시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법진 그리고 있는 거네.’
하늘에서 마법진을 그리고 있다. 마법진이 완성된 것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난 직후, 운석의 파편들이 일순간 멈춰서 차희라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인간이 아니야….”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한소라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러니까 인류의 최종병기라는 소리가 나오는 거지.’
규격 외라는 표현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솔직히 저들이 같은 인간인지도 의심이 간다.
“정하얀 님이… 이기실 것 같아요. 정하얀 님이… 이기네요. 이기고 있어요!”
“글쎄요.”
“정하얀 님은… 어떻게… 인간이… 물론 차희라 역시 강하기는 하지만 정하얀 님을 보세요. 저런 상황에서 계속해서 주문을 외운다는 것 자체가 설명이 되지 않아요. 단순히 마법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도 아시는 것 같아요. 응용 능력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천부적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네요. 정말로….”
“대단하기는 하네요. 솔직히 이 정도로 싸워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제가 너무 정하얀 님을 과소평가했었네요.”
“…….”
“부길드마스터, 이대로 정하얀 님이 이기시면 어떻게 해요?”
“하얀이가 질 겁니다.”
“하지만”
“하지만은 없어요. 하얀이가 질 겁니다.”
“…….”
“…….”
“개입하시려는 건 아니죠?”
‘얘가 사람을 뭘로 보고.’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개입할 수 있겠어요? 개입이고 나발이고 둘 다 죽어요. 그냥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말씀드리는 건데….”
일방적으로 정하얀이 밀어붙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인데, 도대체 저 옹이구멍은 뭘 보고 저딴 말을 지껄이냐고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그녀의 눈에 보이지 않고, 내 눈만 보이는 것이 있지 않은가.
정하얀은 마력을 급속도로 소비하고 있었고, 아직까지 치명타다운 치명타를 먹이지 못하고 있다.
물론 차희라의 체력이 먼저 떨어진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희라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특성.’
그녀의 특성에 서서히 변화가 생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성-피에 미친 광녀-?????]
[???]
‘벽을 넘을 거야.’
그렇게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벽이 있다느니, 조금만 더 하면 넘을 수 있을 것 같다느니 하는 말들은 실없는 소리가 아니었다.
‘진짜로 넘네. 진짜로 넘는 거야?’
그녀는 이 싸움을 성장하기 위한 발판으로 만들었고, 실제로도 내디뎠다. 어떻게 보면 멘탈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강해, 나는 더 강해질 수 있어.’
라는 생각과.
‘제발 쓰러져.’
라는 생각이 나눈 결과물.
차희라는 계속해서 웃고 있다.
본인이 벽을 뛰어넘는 중이라는 걸 실감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정하얀과의 싸움이 점점 재미있어지는 건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즐겁다는 듯이 광소를 터뜨리고 있다.
돌덩이에 파묻히고 불에 데이고 몸이 튕겨 나가면서도 계속해서 무기를 휘두르며 웃고 있다.
왜 저렇게 웃으며 무기를 쉴 새 없이 휘두르고 있는지 모르겠다.
도끼가 지면이 닿자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대기가 떨리고, 검이 휘둘러 지면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 모든 상황이 놀이터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반면에 정하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는 모습이다.
본인이 할 수 있는 온갖 마법을 던지고 있었지만, 점점 자신감을 잃어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분명히 마법의 폭풍에 휘말린 것은 피에 미친 광녀였지만, 정하얀 자신이 폭풍에 휘말린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정하얀 님이 이길 거예요. 제발….”
‘하얀이가 져야 이야기가 돼.’
같이 지낸 시간이 많다 보니 저런 필사적인 모습에 감정이입하는 것 같다.
하지만 마력의 폭풍 속에서 한 발자국을 내딛는 용병여왕의 모습은 한소라의 기도를 비웃듯 부정하고 있었다.
두 눈으로 똑바로 정하얀을 응시하는 표정은 덤이고 말이다.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계속해서 히죽거리며 발걸음을 옮기는 차희라의 몸이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그 결과물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특성-피에 미친 광녀-준 신화 등급]
[지력 스텟을 하락시켜 지력 스텟과 행운 스텟을 제외한 모든 스텟을 상향시킵니다.]
단순히 벽을 뛰어넘은 것이 아니라, 본인 앞에 세워진 장벽을 남김없이 부숴 버렸다.
떡상 중에 떡상.
하늘로 솟아오른 주식.
“상한가 쳤다….”
나 자신도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였다.
차희라는 스스로의 힘으로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문을 부수고 한 발자국을 더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