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4
회귀자 사용설명서 674화
한소라 데뷔(4)
급격하게 어두워진 얼굴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마지막이라는 단어 선택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건지 급하게 입을 열었지만, 정하얀에게 다른 말이 들릴 리 없었다.
-제가 말을 좀… 그렇게 했네요. 마지막은 아니라 정확히 말씀드리면… 네, 그… 저도 준비할 게 조금 있어서요. 지금 다른 팀에서 연구를 하고 있는데 그쪽에 조금 더 집중해야 할 것 같아서요.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당분간은 그곳에서 지내야….
-…….
-네, 그래서 이렇게 인사드리러 왔… 어요. 짐도 챙길 겸해서요.
-…….
-잘 지내시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
침묵이 분위기를 말해주고 있었다.
괜스레 내가 정하얀의 눈치를 보게 된다. 잠깐 사고가 정지한 건지, 아니면 전혀 예상치 못한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정하얀은 퓨즈가 나간 로봇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상황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리지 않을까.
그녀가 정신을 차린 것은 시간이 조금 지난 후, 당연하지만 좋은 쪽은 아니었다.
입술을 꽉 깨문 것은 물론, 부들부들 떨고 있다.
-싫어. 끄윽….
-…….
-진짜 싫어.
커다란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한소라, 진짜 싫어!
-…….
-진짜 싫어! 진짜 싫다구! 내가 오지 말라고 했잖아! 얼굴 보기 싫, 싫, 싫다고 했잖아. 얼굴 보기 싫다고 했는데 왜, 왜 왔어! 나가! 나… 나가! 나가! 나가라구!
-죄송….
-나가아아!!
그렇게 외치면서 자갈을 집어 던지듯 음식을 집어 던졌다.
그 와중에도 캐릭터는 모양은 건들지 않았지만, 솔직히 본능에 가까워 보인다.
한번 자갈을 던져봐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제법 솜씨가 늘어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포물선을 그리는 닭 다리의 곡선이 아름답다.
-죄송해요.
-박미진이지. 박, 박, 박미진이잖아! 배, 배신자! 배신자!! 배신자야! 소라는 배신자야! 끄윽… 끄으윽….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그러니까.
-왜 왔어! 왜 왔냐구! 왜 왔어! 진짜 싫어. 진짜… 바보, 멍청이! 다 네 탓이잖아! 전부! 진 것도 소라 때문이야. 끄윽… 메시지도 무시했잖아. 오지도 않고! 나도 필요 없어. 절, 절교할 거야. 절교할 거라고. 나도 소라 필요 없어. 필요 없다고!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는데 왜 왔어! 왜 왔어! 이 멍청이! 멍청이!
‘어우야….’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내며 몰아붙이는 것을 보면 배신감이 이만 저만이 아닌 모양이다.
박미진 밑에서 일하기로 했다고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눈치는 챈 모양이다.
다행히 어째서 일이 이렇게 돌아가게 됐는지는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다. 적어도 상황판단을 하지 못하는 상황은 아니다.
조금은 더 들어가도 되지 않을까? 약간은 더 갈등을 조장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와 꽂힌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물론 조심스럽게 들어가야겠지만, 충분히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곧바로 퀘스트를 생성해 한소라에게 보내자 그녀가 정말로 되겠냐는 듯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조금 더 밀어붙여요. 조금만 더. (0/1)]
[한소라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어 한소라는 보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정말 그런 게 아니라… 이해해 주세요.
-…….
-…….
-오, 오빠.
-…….
-오빠가 그렇게 하라고 한 거지? 끄윽, 내가 오빠한테 잘 말해줄게. 소라도 가기 싫잖아. 박, 박미진 싫잖아. 이상하다고 끄윽… 이야기했잖아. 박미진 수상하다고 했었잖아. 박미진이랑 공부하면 재, 재미없잖아.
-아니요. 그런 게 아니에요. 다른 걸 다 떠나서 정말로 제게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너무 심하게는 하지 말고 조금만 더 가봅시다, 우리. 한 발자국만 더 움직여 봐요. (0/1)]
[한소라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어 한소라는 보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불안해 보이는 눈동자. 하지만 한소라도 필요한 일이라는 걸 실감했는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제… 제 입장도 이해해 주셔야죠.
-어….
-제 입장도 이해해 주셔야 하잖아요. 저도 나름대로 노력하… 려고 하는 건데… 정하얀 님도 이해해 주세요. 너무… 너무 제 탓이라고만 하시면….
‘할 수 있다, 소라야. 할 수 있어.’
-저도… 섭섭한 게 아예 없는 건 아닌데, 이렇게까지 하실 정도로 잘못한 일은 아니잖아요. 필요한 일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정하얀… 정하얀 님은 왜 자기 입장만 생각하세요?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지만 이미 한차례 탄력을 받았다.
눈을 꽉 감고 결국에는 자신의 의사를 확실하게 전달했다.
본인의 몸에 뭔가 다른 이상이 생길까 걱정하는 것 같았지만 다른 사고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뭔가 자신감을 얻은 것일까. 아니면 첫 데뷔를 잘 마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일까.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한소라가 갑작스럽게 눈을 뜨고 정하얀을 바라봤다.
‘시바, 와… 연기 쩐다.’
안기모를 찍어 누를 수준의 메소드 연기를 선보이는 한소라의 모습은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완벽했다.
처음 발걸음을 내딛는 것은 힘들었지만, 막상 발걸음을 옮기니 생각보다 더 움직이기 쉬웠던 모양이다.
입술을 꽉 깨물고 지난날의 설움을 이야기한다. 한소라 본인도 약간 열이 올라온 느낌이었다.
시선 처리와 발성 모든 게 완벽하다. 주연 배우로도 손색이 없다.
-제가 이거 만… 드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도 모르시면서… 고맙다는 말도 안 하시고… 그, 그리고 항상 그렇게 제 탓만 하시면 저도 섭섭해요. 저도 사람이라고요. 사람. 사람이에요. 사람이라고요.
-어… 어….
-그렇게 싫다고만 하시면… 그렇게 싫다고만 하시면 저도 네, 저도 싫어요. 저도 싫다고요.
-어?
-정하얀 님이 사과하셔야 돼요. 물론 제 잘못도 있었지만 정하얀 님이 사과하셔야 한다고요. 저도 열심히 노력했는데… 저도 정말로 개인 시간까지 빼면서 같이 준비해 드렸는데… 어떻게 그게 제 탓이라고만 하실 수가 있어요? 부길드마스터한테 제 탓이라고 그렇게 말하면 제가 뭐가 돼요? 제 입장은 항상 생각도 안 해주시죠?
그런데 이제 그만해야 될 것 같다.
-정하얀 님은 정말 안하무인이에요. 제가 밥해주는 사람이에요? 밥해주는 사람이냐고! 내가 밥해주는 사람이야! 캐릭터 도시락에는 손도 못 대게 하면서! 저도 감정 있어요. 나도 감정 있다고! 맛없다고 할 때마다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알아!
-어….
-매일 상담해 주는 것도 자기 좋은 것만 들으면서! 내가 부길드마스터가 심했다고 말하면 우리 오빠 욕하지 말라고 하잖아! 네가 우리 오빠에 대해서 뭘 아느냐고 말하면서!! 스크랩북 만들어도 칭찬도 안 해주잖아! 원하는 것만 많고! 내가 만화도 그려주고, 인형도 만들어줬는데! 원하는 것만 많잖아! 항상 그랬잖아! 항상 그랬잖아요! 하아… 하아… 하아….
‘거기까지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 어… 내가, 내가… 자, 잘….
‘아닌가, 이거 사과하려는 건가?’
깜짝 놀란 정하얀이 뭔가 미안함을 표시하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본인도 이야기를 듣다 보니 느끼는 게 있는 것인지, 아니면 한소라에게 미움받고 있다는 걸 인지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후자이리라.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도 인식하고 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라기보다는 쏘아대는 한소라의 기백에 눌렸다는 것이 맞다.
당연하지만 지금 여기서 사과를 받아서는 안 된다.
[박미진! 박미진! (0/1)]
-그래요. 박미진 님한테 가니까 좋더라고요! 매일 칭찬만 해주시고 공부하는 것도 박미진 님이랑 하는 게 더 재미있어요. 알아듣기 쉽게 잘 가르쳐 주시더라고요. 네! 정하얀 님보다 박미진 님이 더 좋아요.
-잘, 잘못이야. 소라 잘못이야….
-박미진 님이랑!
-다 소라 잘못이야! 이익… 소라 잘못이라고!!!
-그러니까….
-이이익… 필요 없어. 흐윽, 필요 없다고!! 끄윽, 필요 없으니까 나가라고! 배신자! 소라는 배신자야. 이이익, 끄윽, 이이익, 나가! 나가아아! 너 같은 사람 필요 없어.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나가, 이 멍청아!
우당탕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정하얀이 한소라를 밀어붙였다.
앙증맞은 두 손으로 파악 하고 한소라를 밀치는 모습은 또 가관이다.
한소라가 균형을 잃으며 풀썩 땅바닥에 쓰러졌지만 정하얀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순식간에 마법을 발동시켜 한소라와 그녀의 짐을 밖으로 밀어붙이자 자연스럽게 한소라의 몸이 바깥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콰앙!!
바깥으로 강제 추방된 한소라.
정하얀은 씩씩거렸지만, 아직 분이 풀리지 않는지 닫힌 문을 향해 음식들을 집어 던지고 있다.
하지만 이내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흐어어어어어엉….
만신창이가 된 식탁을 부여잡고 눈물을 터뜨리는 모습을 보니 내 가슴이 다 아프다.
성대한 생일 파티를 열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아 오열하는 것만 같다.
물론 이런 종류의 갈등이 한 번은 터져줘야 했다.
정하얀의 인간관계와 정신적인 성장을 위해서 당연히 있어야 하는 일이다.
지금 당장은 서럽고 눈물이 나오겠지만 이런 사건들이 정하얀을 더욱더 성숙하게 만들지 아니겠는가.
물론 이걸로 벽을 넘을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물론 나름 만족스럽기는 했다.
원래 비극적인 상황이 오기 전에는 항상 이런 사건이 있어야 했으니 말이다.
-진짜 싫어. 너무 싫다고. 배신자. 배신자랑은 이제 말도 안 할 거야. 흐윽….
‘그래, 미워해. 너무 미워하지는 말고 적당히 미워해야 돼.’
-박미진… 박미진 진짜 싫어. 진짜… 흐윽, 한소라도 싫고 박미진도 싫고 다 싫어. 끄윽….
‘그래.’
-죽여 버릴 거야. 박미진… 박, 박미진 죽여야 돼. 죽일 거야. 끄윽… 죽일 거야. 죽일 거야.
‘안 돼.’
-죽여야지. 죽이자. 그래, 죽이는 거야. 어디 있지… 어딘가에 있겠지. 두고 봐, 한소라. 두고 봐. 그, 그때 와서 돌아와도 용서 안 할 거야. 박미진 죽인 다음에 소라와도 용서 안 해줄 거라고. 끄윽, 끄윽….
뭔가 슬슬 열이 오르는 느낌이다.
조금 위험한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아직은 안전하다. 혼잣말을 주고받지 않으니, 이 정도라면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곧바로 여신의 손거울을 들자, 곧바로 안정을 찾아가는 모습.
벨이 울리는 곳으로 허겁지겁 달려가 전화를 받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하얀아.”
-끄윽….
“하얀아, 왜 그래.”
-끄으윽… 흐어어어엉….
목소리를 들으니 서러워졌는지 곧바로 울음을 터뜨렸다. 여러 가지로 궁지에 몰린 것은 확실했다.
-소라가… 소라가 끄윽… 흐어어어엉… 소라가 끄윽….
“일단 지금 갈게, 하얀아.”
-흐어어어어어엉… 오빠… 그이그으윽….
친구랑 싸운 연인의 서러움을 들어주는 포지션으로 변모한 것은 당연지사.
전화가 연결되어 있지만 정하얀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들리지도 않는다.
소라가 어쩌고, 배신했니 어쩌고, 상처받았네 어쩌고, 자기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었지만, 울음소리와 뒤섞인 목소리는 구분하기 힘들다.
아마 망원경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흐어어어어어엉….
‘장하네, 장해.’
정하얀이 다른 사람 때문에 이렇게 울면서 전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대견하게 느껴진다.
혹시나 이걸 빌미로 계속 붙어 있으려고 하지는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잠깐이라면 오히려 바라는 바였다.
정하얀이 눈치채 줬으면 하는 게 있었으니까.
외톨이 대마법사의 거처로 발을 들이자마자 꽉 하고 이쪽을 껴안아온다.
눈물 콧물로 얼굴이 범벅되어 있었고 실제 눈으로 확인한 장내는 망원경으로 봤을 때보다 더욱더 참혹했다.
“끄어어엉,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라고 위로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한마디 내뱉어보자.
“소라가 나빴네.”
여기서는 한소라가 죄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