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5
회귀자 사용설명서 675화
한소라 데뷔(5)
한소라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무조건 한소라가 죄인이다.
일단은 분한 감정에 공감해 주는 게 옳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정하얀을 꾸짖었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한소라의 편을 들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다.
어찌 됐건 간에 이기영 명예추기경은 공식적으로 정하얀의 약혼자가 아니었던가.
어떤 상황이 들이닥치더라도 서로의 편이 되어주는 것이 참된 배우자의 자세라는 걸 생각해 보면 무작정 정하얀을 다그칠 수가 없다.
정하얀이 다소 잘못하고 있더라도 이해해 주고, 공감해 주어야 한다.
물론, 백번 생각해도 정하얀의 잘못이었지만, 그래도 일단은 하얀이의 편을 들어주는 게 옳은 선택이라고 여겨졌다.
“소라 씨가 잘못한 것 같네.”
조금 의외였던 것은 정하얀이 곧바로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는 것.
‘이게 아닌데…’라고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달콤한 말을 거부할 리 없었다.
은근슬쩍 몸을 붙이며 다시 한번 입을 열자, 곧바로 고개를 끄덕인다.
조금 방지턱이 있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한소라를 다그치자, 확실히 한소라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만 같다.
결국에는 한 번 더 울음을 터뜨리며 그간의 섭섭했던 것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소라 때문에 진, 진, 진 거라구요. 끄윽…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차희라에게 패배의 빌미를 마련한 것부터…….
“말도 없이 갑, 갑자기….”
그 이후는 말없이 집을 나간 것,
“흐어엉… 끄윽….”
그 이후에는 메시지를 무시한 것, 또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고 화낸 것, 특히나 자신을 배신하고 박미진에게 향한 것까지 말했을 때는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했다.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는 모습을 보니 억울하기는 했던 모양.
약 9번 정도를 반복한 이후에야 겨우 진정한 모습이었다.
“소라가… 끄윽… 진짜 싫어요. 다, 다시는 안 볼 거야.”
‘어차피 다시 보게 될 거야.’
“소라도 시간이 지나면 분명히 사과하러 올 거야.”
“끄윽… 끄윽….”
“본인이 실수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물론 하얀이도 사과해야지. 소라 씨도 섭섭한 게 많았던 것 같은데. 만약 하얀이가 먼저 사과한다면 소라 씨도 사과하지 않을까.”
“…….”
‘사과해’가 아니라 ‘사과하지 않을까’라고 은근슬쩍 제안했지만 정하얀의 마음은 이미 얼어붙었다.
“먼저 사과하기 전까지는 절, 절대로 용서 안 해줄 거예요. 흐윽, 절대로 용서 안 할 거라고.”
‘그래, 그런 자세 좋다, 하얀아.’
혹시나 사과해야겠다고 달려가면 어쩌지 싶었지만 역시나 고집을 부리고 있다.
마지막에 박미진과 정하얀을 비교한 발언이 비수가 되어 꽂힌 것이 분명하리라.
‘한소라도 참 그래. 어떻게 그렇게까지 말해?’
정하얀이 박미진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발언이다.
물론 정하얀이 빌미를 제공해 주기는 했지만, 한소라의 한마디는 정하얀의 여린 마음을 고슴도치로 만들어 버렸다.
이렇게 섭섭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너무 심하긴 했어.’
하지만 어느 정도는 쉴드의 빌미를 마련해 주는 게 좋다고 여겨졌다.
중재자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 이기영은 갈등을 조장하는 종류의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아마 소라 씨도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던 걸 거야.”
정도로만.
“분명히 먼저 사과하러 와줄걸. 그때는 꼭 하얀이도 사과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물론 한소라가 사과하러 먼저 찾아올 확률은 제로였지만 정하얀은 한소라가 사과하러 온다는 걸 확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새다.
“오늘은 밖에 나가서 기분 전환 좀 하는 게 좋겠네.”
“정, 정말… 요? 공부는….”
“이런 상태로 공부도 손에 안 잡히지 않을까. 하루 정도는 쉬어도 될 거야. 쉴 때도 있어야지.”
“다, 다행이다.”
“쉬는 시간이 있어야 내일도 열심히 할 수 있을 테니까.”
“네, 네. 맞아요, 맞아요.”
기분이 조금 풀렸는지 금방 히죽거린다.
정말로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은 생각이 잠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오늘 하루 훈련에 집중해도 큰 성장하지는 못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물론 박미진을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책을 붙잡는다면 소소한 성장이야 있겠지만 현재 정하얀에게 필요한 것은 소소한 성장이 아니다.
‘벽만 뛰어넘으면 돼, 벽만.’
커다란 벽 앞에 서 있는 것이 현재 정하얀의 상태, 반 발자국 전진해 봤자 옆으로 움직이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계기만 생긴다면 단시간 안에 몇 배나 더 성장할 수 있다.
그게 가능하다는 걸 차희라가 이미 한차례 보여주지 않았는가.
현재 정하얀에게 필요한 건 공부가 아니라 계기다.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계기.
‘초조해할 필요 없어. 16일이면 충분해. 오히려 길게 보는 게 좋아. 우당탕탕 처리하는 것보다는 조금씩 조금씩 빌드업 하는 게 훨씬 좋을 거야. 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갈등이 더욱더 커지면 그만큼 후회와 자책도 커질 테니까.
정하얀 쪽으로 살짝 손을 넘기자, 오랜만에 데이트를 나가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순간적이기는 했지만 정하얀은 한소라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은 것 같다. 오히려 더 당당해진 느낌이다.
‘그래, 없어도 돼. 소라는 필요 없어.’
라거나.
‘먼저 사과할 때까지는 다시는 연락도 안 할 거야. 누가 더 손해인지 한번 보자고.’
혹은.
‘박미진이랑 잘살아봐. 어차피 필요 없어. 이제 신경도 안 쓸 거야.’
라고 생각하는 듯한 얼굴. 진심으로 한소라 없이도 잘 헤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만약 내가 오지 않았더라면 한없이 구멍으로 들어갔겠지만, 현재의 정하얀은 한소라를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그만큼 행복한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그녀의 표정이 달라진 것은 내 손을 잡고 떠들어대고 있던 때였다.
일단 한소라 때문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몸에 벌어진 소소한 변화 때문이 아닐까.
‘어?’
의문을 가진 것이 첫 번째.
다시 한번 손을 잡아보는 것이 두 번째.
고개를 갸웃거리는 듯한 모습.
‘눈치 깠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 분명하리라.
평소와 몸 상태가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지금까지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눈치챌 수 없었겠지만, 조금 여유가 생기자 곧바로 캐치해 내는 모습.
자꾸만 손을 꼼지락거리며 맥박을 재듯 몸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몸 안에 있는 생소한 기운에 의문을 품는다.
‘능력은 능력이야.’
정하얀에게 마음의 눈이 있는 건은 아니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이걸 찾아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오히려 정하얀이 눈치채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을 정도로 희미한 기운이었다.
만약 선희영에게 버프나 디버프를 받은 채로 곧바로 이동했다면 가능성이라도 있었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다.
연금술을 이용해 몇 번이나 성질을 바꿨고, 가장 희미하다고 생각하는 기운의 일부만 몸 안에 집어넣었다.
아마 그녀라면 처음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지 않았을까.
이를테면 평소와 다르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다가 뒤늦게 자각한 것과도 같은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머리 스타일이 미묘하게 달라졌다거나 평소보다 조금 더 얼굴이 상기되어 있다거나.
평상시였다면 곧바로 캐치해 낼 수도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한소라의 일 때문에 경황이 없었겠지.
“오, 오, 오빠.”
“응?”
“요즘 몸… 은 조금 괜찮으세요?”
“응, 괜찮은데. 오히려 조금씩 건강해지고 있는 것 같아. 왜?”
“아니요. 조금 이, 이상… 이상한 것 같아서.”
“뭐?”
“조금 이상한 것 같은데….”
“뭐가?”
“뭐, 뭐라고 딱 표현하지는 못하겠는데… 뭔가 이상… 이상해요. 조금 이상한데….”
“…….”
“잠깐만 확, 확인 좀… 해봐도 될까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하얀이 천천히 이쪽을 들여다봤다.
혹시나 선희영이 발신지라는 걸 눈치채지는 않을까 불안했지만 그럴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내 몸속에 있는 희미하게 흐르고 있는 에너지는 어떤 효과도 없는 에너지, 그 자체다.
버프도 아니고 디버프도 아닌, 마력처럼 몸에 맴돌고 있는 자원이었다.
물론 정하얀이 단순한 자원이라고 생각할 리 없다.
평소였다면 그냥 두고 넘기며 자신의 진단에 확신을 내렸겠지만, 이제는 그런 게 아니지 않은가.
정하얀의 상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마법을 사용하는 사람이 이제는 존재한다.
천재 마법사 정하얀조차 이해할 수 없는 천재가 이제 존재하고 있다.
심지어 그 천재가 나와 가까이 붙어 있지 않은가.
중요한 건 정하얀이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지 다른 게 아니었다.
정체불명의 마법사 박미진의 마법에 이기영이 영향을 받고 있다는 확신.
정체불명의 마법사 박미진이 어디에서부터 왔고,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
정체불명의 마법사 박미진이 정말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의심.
정하얀에게 필요한 건 그것들이다.
당연하지만 정하얀은 박미진에 대해 파헤치지 못할 것이다.
정체불명의 마법사 박미진 같은 건 존재하지 않으니까.
이번 파트는 정하얀의 추리극과 후회극이라고 하는 게 가장 올바른 표현이 아닐까.
“무슨 일인데….”
“확, 확실하지는 않아서 뭐라고 말로 표현하지는 못하겠는데요, 네.”
“말해도 괜찮아.”
“오, 오, 오빠 몸 안에 생소한 기운이 있는 것 같아서요. 혹, 혹시 언제 마법… 같은 거.”
“피로 회복 마법 정도라면 받은 적이 있긴 한데.”
“…….”
대답을 듣자마자 혼자 중얼거리는 모습, 이게 정말로 피로 회복 마법이 맞는지 의심하는 것 같다.
무척 간단한 마법이지만 이런 종류의 마법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을 거다. 애초에 피로 회복 마법이 아니었으니까.
자신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짜증이 일었는지 입술을 꽉 깨무는 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다른 사람의 마력이 몸 안에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곧바로 마력을 보내왔다.
‘뭐야, 시바. 근데 아무 느낌도 안 들어.’
김현성이 예전에 마력 마사지를 해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마음의 눈이 없었다면 정하얀의 마력이 이쪽으로 들어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다.
마치 몸 안에 있는 몸 안으로 투입된 백신이 바이러스들을 잡아먹듯 바깥의 힘을 공격하고 있었고, 이내 몸 안에 서린 기운은 금방 소멸되어 버렸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말이다.
“아, 아니에요. 제가 착각했네요. 착, 착각했어요.”
하지만 표정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었다.
‘생각하고 있구나.’
어쩌면 한소라가 해준 말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박미진이 뭔가 수상하다는 대화를 나눴던 때를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무런 증거 없는 의심이다.
몸 안에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생소한 잔향이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박미진의 것이라고 확정지을 수는 없다.
심지어 그게 정말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지도 확신할 수 없겠지.
지금 당장 뭘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도 판단이 서지 않을 거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괜히 말을 꺼낸다면 오히려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뭔가 속으로는 의심이 가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는 상황, 단서조차 없으니 어떻게 판단을 내릴 수도 없다.
현시점에서 할 수 있는 건 이상한 기운을 제거하는 것밖에 없었을 것이다. 위험요소를 제거한 것으로도 일단은 기분이 좋아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이내 깨닫지 않았을까.
소라한테서도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었던 것 같다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소라의 몸속에도 뭔가 이상한 게 있었던 것 같다고….
정말로 피로 회복 마법일 확률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확률도 있다고….
정하얀의 눈이 흔들린다. 입술을 꽉 깨무는 것이 뭔가 결심한 것 같다.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한소라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결심한 것 같다.
내 생각이 틀렸는지, 맞았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아마 비슷한 방향을 향해 가고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들려오는 목소리.
“이, 이, 이제 신경 안 쓸 거야. 정말로… 신경 안 쓸 거라구….”
자신에게 한소라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직 모르니, 내뱉을 수 있는 대사였다.
당연하지만 정하얀이 지금의 결정을 후회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