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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676화 (667/1,590)

# 676

회귀자 사용설명서 676화

드래곤(1)

“됐어.”

‘일단은 된 거야.’

갈등구조도 만들었고 복선도 마련했다. 후회할 만한 요소들도 집어넣었으니, 거의 모든 게 준비됐다고 해도 무방하다.

정성스럽게 밥상을 만들어 정하얀의 앞으로 대령한 상황, 그녀가 천천히 숟가락을 들어 올린다면 일이 알아서 진행될 것이다.

사실 조금 무리하면 억지로 들어 올려 입안으로 옮겨줄 수도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더 퀄리티를 높이고 싶은 이쪽의 입장에서는 한 걸음 정도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지금부터는 정하얀 본인이 움직여 주는 게 가장 좋다. 정확히 3일이 지난 지금까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리 초조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당연한 거지, 뭐.’

미끼를 물 시간을 주지 않았으니까.

요 3일간은 나와 계속 함께 있었다. 온종일 붙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한소라를 떠올릴 만한 시간에는 나와 함께 있었던 거로 기억한다.

일부로 여유를 주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표현이지 않을까.

정하얀이 조금이라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최대한 할애하고 있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여신의 손거울이 울렸다.

[오빠, 오늘도 오시나요?]

[꼭 오셔야 해요. 공부 열심히 하고 있을게요.]

[언제 오세요?]

[지금 오시나요?]

조금 문제가 있다면 한소라와 나눠 받았던 집착이 더욱더 심해졌다는 것이지만, 이 정도를 받아주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다.

손거울을 집어 들자, 그 외에 읽지 않은 메시지들도 시야에 비쳤다.

[자기, 무한의 가방 남는 것 좀 있어? 있으면 하나만 가져다줘. 사례는 할 테니까.]

이건 희라 누나.

‘선물 받은 건데, 괜찮을까.’

어차피 내 물건이니 상관없을 것 같았지만, 왠지 모르게 찝찝하다.

진열대에서 가방 하나가 사라진 걸 알면 둠현성이 뭔가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아니면 김현성한테 내가 입찰한 가방 상회 입찰하지 말라고 전해. 짜증 나 죽겠네, 진짜. 시발, 그 정신 나간 새끼.]

‘뭐야, 이건.’

잠시 차희라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베니고어 넷 공식 경매장에 접속하자, 차희라의 말이 뭘 뜻하는 건지 눈치챌 수 있었다.

[붉은 용병 님이 샤넬리아 에르메스의 장비 수납 가방(전설 등급)을 33만 골드에 입찰하셨습니다.]

[김현성 님이 샤넬리아 에르메스의 장비 수납 가방(전설 등급)을 35만 골드에 상회 입찰하셨습니다.]

[붉은 용병 님이 샤넬리아 에르메스의 장비 수납 가방(전설 등급)을 43만 골드에 상회 입찰하셨습니다.]

[김현성 님이 샤넬리아 에르메스의 장비 수납 가방(전설 등급)을 55만 골드에 상회 입찰하셨습니다.]

[붉은 용병 님이 샤넬리아 에르메스의 장비 수납 가방(전설 등급)을 60만 골드에 상회 입찰하셨습니다.]

[김현성 님이 샤넬리아 에르메스의 장비 수납 가방(전설 등급)을 80만 골드에 상회 입찰하셨습니다.]

‘아니, 뭐 하는 거야, 얘는…. 훈련 안 해? 베니고어 넷 경매장 이용하는 건 또 언제 배웠어. 아니, 그리고 얘는 왜 아이디에 본명을 적어놨어.’

조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 망원경으로 봤을 때는 분명 미친 듯이 훈련에 임하고 있었던 거로 기억한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경매장을 체크하고 있었던 모양, 이 새끼 정말로 괜찮은 건가 싶기도 했지만….

‘취미생활이니까 나쁘지는 않은데.’

머리를 식힐 시간이 있는 건 나쁘지 않아 보였다. 안 그래도 여유가 없을 테니, 이런 거로라도 스트레스를 풀어야지.

문제는 차희라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지만, 나중에 적당한 가방을 따로 빌려주면 되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녀석이 한참 전에 보낸 메시지가 있었다.

[기영 씨, 바쁘신 와중에 갑자기 죄송합니다.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 요즘 너무 무리하고 계신 건 아닌지 걱정이 생깁니다. 물론 대륙을 위하는 기영 씨의 마음이야 이해할 수 있지만 정작 일이 시작될 때 지치실까 염려됩니다. 조금은 자신의 몸을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경매장에 새로운 시리즈가 올라왔더군요. 힘든 와중에 조금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뭐라고 답장해야 할지 모르겠다.

솔직히 장비 수납의 가방은 희라 누나한테 갔으면 싶었지만, 회삿돈까지 투입하는 김현성과는 다르게 차희라는 순수하게 자신의 연봉으로만 대결을 펼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승부는 김현성의 승리로 결정될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오빠, 지금 베니고어 넷 경매장 가 봐요. 차희라 개 털리는 중 ㅋㅋㅋㅋ]

이지혜는 현재 상황이 즐거운가 보다.

[이기영 님, 저번 일은 잘 마무리되셨습니까?]

이건 선희영.

[머리는 조금 괜찮은 겁니까? 바쁜 시기라는 건 알지만, 건강 좀 챙기세요. 괜히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되네요. 아 그리고 전에 제가 보내준 동영상 봤습니까? ㅎㅎ]

이건 조혜진이다.

그 밖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온 메시지들이 보였지만 대충 답장을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조금 특이했던 것은 박덕구에게서 온 메시지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전술 훈련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 모양이다.

그 와중에 프로필 사진을 바꾸고 [노력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같은 명대사를 적어놨지만, 솔직히 기대되지는 않는다.

어차피 돌격할 일이 없을 테니, 상관없지만 녀석을 쓸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오랜만에 손거울에 쌓인 메시지들을 확인하자, 나도 모르는 사이 시간이 꽤 흘렀다.

‘이 여편네는 왜 이렇게 안 와.’

조금 더 시간을 때워야 했기 때문에 다시 한번 정하얀 쪽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형이 시야에 비쳤다.

“또 무슨 쓰레기 같은 생각을 하는 겁니까?”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은 오랜만에 보는 디아루기아. 긴 여행을 마치고 곧장 온 것인지, 정리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뭐, 디아루기아 님은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러 가지로 준비할 일이 많아서요. 세상에 종말이 들이닥치는 상황인데, 대륙의 구원자인 제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보다 어때요?”

“…….”

“성과는 조금 있었습니까? 그러니까….”

“…….”

“다른 드래곤들은 찾아봤어요?”

내가 내뱉은 말이었지만, 목소리에 기대감이 묻어나온다.

‘몇 명은 응답했을 거야, 그렇지?’

아직 약간은 부족한 전력을 보충해 줄 수 있는 종족, 과거 대륙의 수호자이며 균형을 유지하던 이들, 천사들 666마리를 전부 채우지 못한 현시점에서 그나마 기댈 수 있는 이들이었다.

1회 차에서는 드래곤들이 직접 움직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지만, 2회 차에서는 조금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디아루기아라는 연결고리가 있었으니까.

‘스무 명쯤은 되겠지? 그렇잖아.’

바쁘게 전 대륙을 돌아다닌 만큼 당연히 성과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디아루기아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것이 문제. 아니나 다를까 조심스럽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은둔해 있거나 수면기에 들어간 이들이 대부분이라….”

“그래서요.”

“솔직히 많은 분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이거 터지고 나서 계속 돌아다닌 거 아니에요?”

“네, 계속 찾아다니기는 했습니다만….”

“얼마나 응답한 겁니까?”

“세, 셋… 입니다.”

“…….”

“…….”

“그게 말이 돼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워낙 폐쇄적이고 개인적인 성향이 강하다 보니, 솔직히 셋이나 응답해 준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13일 남았는데, 겨우 셋이라고요?”

“…….”

“뭐, 중간계를 수호하니, 어쩌니 하지 않았어요?”

“그것 역시 과거의 일입니다. 지금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에요. 인간계에 숨어 살고 있는 이들도 있으니, 최소 셋 정도는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 셋이 응답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인간계에 숨어 살고 있는 이들까지 합하면 셋은 넘어야죠.”

“그 셋 중에 함께하겠다고 확답을 받은 드래곤은 한 명….”

“…….”

“…….”

“와, 이거 너무하네. 정말 너무 하네요. 모두가 함께 사는 대륙이 아닙니까. 어떻게 자기들만 살자고 이렇게… 중간계의 수호니, 뭐니 전부 거짓 설정 아니에요? 그냥 있어 보이려고 막 둘러댄 거 아닙니까? 대륙의 위기가 들어왔는데, 무슨 이딴 식으로… 뭐, 그렇게 이기적인 놈들이 다 있어? 자기들만 살면 그만이랍니까?”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그건 과거의 일입니다. 애초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든 것은 인간입니다. 오히려 반감을 품은 이들이 더 많다는 걸 생각하면, 이 정도도 감지덕지예요. 오히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좋게 받아들이는 이도 있었습니다. 긴긴 역사 동안 인간이 대륙과 드래곤들에게 남긴 상처들을 생각해 보세요. 이미 고통받을 만큼 고통받은 이들입니다. 그들의 마음도 헤아려야 해요. 오히려 셋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무척 희망적인 상황이라, 이 말입니다.”

“겨우 셋밖에 안 도와준다는데 무슨 희망적인 상황이에요?”

“적어도 그들은 진심으로 함께 싸워줄 겁니다.”

“그 셋의 진심, 인류에 아주 큰 보탬이 되겠네요. 아주 대단하십니다, 진짜. 아주 대단한 종족이야. 이렇게 이기적인 종족이 또 있을까.”

“…….”

“애초에 전선이 밀리면 드래곤들도 위험하다는 사실을 제대로 전하긴 한 겁니까? 사태의 심각성을 잘 모르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건데 그놈들은 인간이고, 드래곤이고 가리지 않는 놈들입니다. 뭐, 처음에는 호의적으로 다가올지 몰라도 엔딩은 파국뿐이라고요. 우리 똘똘이가 살아갈 세상이 삭막한 폐허였으면 좋겠어요?”

“디아루리아는….”

“뭔가 수를 써봐야죠. 이대로라면 죽도 밥도 안 돼요. 종족 전체가 나서서 도와달라고 말한 것도 아니고,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 들어오라고 말한 것도 아닌데… 거, 아무리 종족이 다르다고는 해도,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을 지켜달라고 말한 건데… 겨우 세 명? 이건 농락이에요. 오히려 놀리는 거라고요.”

‘시바, 틀린 말도 아니지.’

도와달라고 정식으로 요청한 것이 아니었던가.

괜찮은 특사까지 파견했건만 달랑 셋만 온다는 소리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 셋도 확실하지가 않단다.

말 그대로 놀리는 거나 다름없다. 동맹국이라고 생각했던 나라에 파병을 요청했건만 겨우 삼백 명의 인원을 보내온 것이나 진배없다. 이게 농락이 아니면 뭐가 농락이겠는가.

‘이 새끼들이 아직 전술 김현성을 안 맞아봐서 모르지?’

당장 전술 김현성을 끌고 가 드래곤 레어를 불바다로 만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챘는지 디아루기아 역시 불안해하는 분위기다.

본인도 면목이 없겠지. 자칭 대륙을 수호하는 이들이, 적폐세력이 되어서는 나 몰라라 하고 있는데….

항상 이쪽을 야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 더욱더 고개를 들 수 없을 것이다.

‘시바, 약간은 믿고 있는 구석이었는데….’

정하얀 각성 프로젝트가 순조롭게 흘러가고는 있었지만, 아쉬운 부분이었다. 아니, 단순히 아쉬운 정도가 아니다.

조금이라도 확률을 높여야 하는 현재 상황에서 드래곤들의 합류는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면서 생각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종족 커뮤니티는 거의 없는 거예요?”

“네,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예전에는 회의 같은 것도 열렸다고 들었지만, 지금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디아루기아 님은….”

“저도 어렸을 때 기억을 토대로 찾아가 본 것에 불과합니다. 한둘 정도는 서로 연락을 취하고 있지만, 그것마저 몇백 년에 한 번씩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예 안 일어나는 것 또한 부기지수구요.”

“뭐, 종족 간의 정이나 그런 것도 없어요? 보편적인 인류애 같은 것도 없냐고요. 힘든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고 싶고, 위험에 빠진 이가 있으면 손길을 내밀어주는 게 보통 아니에요? 인간은 그렇다 칩시다. 디아루기아 님은 드래곤 아닙니까. 같은 드래곤이 도움을 청했는데도 이렇게 개무시해요? 이거 안 될 종족이네, 안 될 종족이야.”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저희 드래곤들 역시, 보편적 가치에 대해서는 인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개인적 성향이 강한 종족이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만, 성체가 되지 못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거나….”

“네?”

“…….”

“다시.”

“그러니까… 성체가 되지 못한 이들에게는 도움을 주거나….”

“한 번만 더요.”

“성체가….”

그 말을 하던 디아루기아 얼굴이 창백해졌다. 말실수했다는 얼굴.

솔직히 디아루기아의 얼굴을 보고서는 조금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

내가 우리 딸을 위험에 빠뜨리기라도 할까 봐?

아무리 이기영이 썩었어도 그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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