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7
회귀자 사용설명서 677화
드래곤(2)
“뭐, 그렇게 걱정하는 표정 짓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설마 우리 디아루리아를 전쟁터로 내몰기라도 하겠습니까.”
“…….”
“아니, 오해하지 말라니까요. 정말로 그런 생각은 한 적도 없으니까. 그런 표정 좀 짓지 마세요. 한 대 치겠습니다, 진짜. 한 대 치겠어요.”
“만약… 혹시라도 우리 루리아에게 손댄다면 당신 죽고, 나 죽는 겁니다.”
“…….”
“…….”
‘와, 얘 봐라.’
“…….”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없나?’
그런 생각을 잠깐 해볼 정도로 디아루기아의 표정은 적대적으로 변해 있었다.
신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표정에 약간이지만 섭섭함을 느꼈다.
솔직히 이런 대우를 받을 만한 짓을 저지른 기억은 없다.
“아니, 이번 일에서 루리아는 완전히 배제하셔야 합니다. 그 아이는 아직 싸울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왜 벌써 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누가 디아루리아를 전쟁터로 내몬답니까. 그런 쓰레기 같은 생각은 추호도 한 적이 없으니까. 마음 놓으세요. 할 일이 있기는 한데, 다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무슨 일을 시키시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전부 거절하겠습니다.”
“아이 건강에는 영향 없는 일입니다. 과민반응하지 말라니까요. 솔직히 저도 내키지는 않지만 필요한 일인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드래곤들이 아이들에게 민감하게 반응한다면 최대한 써먹어야죠. 다른 용들 만나서 설득은 어떻게 했어요? 디아루리아 이야기라도 하면서 도와달라고 부탁한 거 맞아요?”
“…….”
“제가 그럴 줄 알았습니다. 말씀드렸잖아요, 이번 일 잘못되면 다 죽는 거라고. 할 수 있는 한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이기적인 용들을 전선에 세워서 고기방패로 써야 합니다. 저도 우리 똘똘이한테 해 끼치기 싫어요. 이번 일로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도 않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시면….”
“근데 어떡해요. 뭐 하나 삐끗하면 전부 다 깡그리 날아가는 건데. 저도 가정을 지켜야죠. 노아의 방주 타고 도망간들, 그게 잘 풀릴 거라는 보장이 있어요?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최선은 애초에 방주를 탈 일이 없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정말로 아무 이상 없으니까, 그냥 지금 가서 디아루리아 좀 데려오세요.”
“…….”
“빨리요.”
“뭘… 뭘 하려는 겁니까.”
“뭘 하겠어요. 공익광고 찍으려는 거지.”
“공익광고?”
“뭐, 그런 게 있습니다. 공익광고 말고도 찍을 게 있으니까. 빨리 데려와요. 시간 없으니까.”
“그런 걸… 왜….”
“맨 처음, 캐슬락 몬스터 웨이브. 비겁하고 더러운 인간들이 디아루리아를 인질로 잡았을 때는 왜 다른 드래곤들이 잠자코 있었겠습니까. 몰라서 그런 거 아니에요? 괜찮은 광고 하나 찍고 전 대륙에 방송해야 합니다. 여신의 거울을 하늘에 꽉 깔아두면 드래곤 여러분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는 계기가 될지도 모릅니다. 인간 사이에 숨어 사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고요. 이럴 게 아니라 빨리 데려와요. 아, 데려오는 김에 막스도 같이요. 다른 이종족 꼬마들도 섭외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계시면 됩니다.”
“네… 이, 일단은 알겠습니다만….”
애초에 공익광고가 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메시지를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이자, 디아루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얼굴에 미심쩍은 표정이 서려 있었지만 별로 개의치는 않았다.
공익광고라는 게 정말로 효과가 있는지 의심하는 게 아닐까. 나 역시 이게 잘될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아예 효과가 없지는 않을 거야.’
무조건 효과가 있을 거다. 드래곤들이라면 더욱더 그렇지 않을까.
지구에서 각종 매체를 통해 방송되는 공익광고들만 봐도 그렇다.
물론 일부의 인간, 이를테면 이율하 같은 애들은, 또 감성팔이 시전한다면서 비웃고 넘기겠지만, 모든 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지구에 있는 수많은 비영리단체와 봉사단체, 기부단체가 괜히 돈을 들여 광고를 내보내는 게 아니다.
한번 전파를 타는 것이 그만한 자본을 투자하는 것 이상의 영향력을 끼친다는 걸 의미한다.
아직 매체에 오염되지 않은 대륙민들이나 이종족, 특히나 아예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던 드래곤들이라면 더욱더 영향을 많이 받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아, 이거 오늘은 조금 늦거나 아예 못 가겠는데.’
갑작스럽게 스케줄이 잡혀, 정하얀에게 향할 수 없다는 사소한 문제가 생기기는 했지만….
오늘 하루 정도 혼자 있는다고 해서 한소라의 빈자리를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손거울을 열자, 그새 또 메시지들이 쌓여 있었다.
[시발, 진짜. 김현성 미친 새끼. 진짜, 이 정신 나간 새끼. 이 새끼, 길드 공금 횡령죄로 조사 한번 들어가야 해. 김현성 연봉이 얼만데 걔가 골드가 그렇게 많아?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서 한번 해줄 거지? 자기 길드라고 눈감아주지 말고, 일 끝나면 제대로 한번 조사 때려. 무조건 길드 자금이야, 무조건.]
‘희라 누나… 졌구나.’
아니나 다를까 김현성의 메시지도 눈에 들어왔다.
[아까 말씀드린 신상, 매입에 성공했습니다. 지금 직접 수령하러 가는 중입니다. 바쁘실 것 같아 전화는 드리지 않지만, 힘든 와중에 힘이 되실까 해서 한 번 더 메시지를 남깁니다.]
본인이 내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본인의 스트레스를 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심지어 사진까지 찍어 보내놓았다.
그다음 사진은 진열대에 주차된 장비 수납 가방의 모습,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각도까지 딱 맞게 전시된 자태를 보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거 희라 누나 가져다주세요’라고 할 수도 없고, ‘돈 얼마 썼어요?’라고 물어보기도 조금 그렇지 않은가.
굳이 가격 이야기하지 않은 걸 보니, 저번에 상승의 가방을 샀을 때보다도 돈이 더 들어간 모양이다.
읽고 답장하지 않는 건 좀 아니다 싶어 일단은 여신의 거울을 두드렸다.
[큰 힘이 됐습니다. 훈련하느라 바쁘실 텐데 감사해요.]
[별로 바쁘지는 않았습니다.]
‘손거울 붙잡고 있었나 보네.’
곧바로 답장이 온 것을 보니 마침 쉬고 있었던 것 같다.
[큰 힘이 되셨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혹시 언제 시간 되십니까?]
[아, 네. 안 그래도 길드원들을 한번 모아서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생각했었습니다. 스케줄을 맞춰볼 테니, 그때 다 함께 보면 좋겠네요.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현성 씨.]
[아니요. 너무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더 감사합니다.]
[네, 그럼 저는 할 일이 있어서… ^^]
[다시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건강하시면 좋겠습니다.]
[네.]
[네, 내일 또 연락 드리겠습니다.]
‘장비 수납 가방은 진짜로 쓸 일 없는데.’
“나중에는 쓸 일이 있으려나.”
쓸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았다.
포댓자루를 들고 다니는 차희라가 잠깐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전투력 상승에 도움이 되는 가방은 아니니 굳이 넘겨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정하얀에게도 간단히 오늘은 조금 늦거나 내일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말로 상황을 마무리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망원경으로 그녀를 살펴봤지만 조금 풀이 죽은 것 외에는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서 안심할 수 있었다.
[정하얀 님은… 조금 괜찮으신 건가요? 아무래도 사과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오히려 한소라 쪽이 불안해하고 있지 않은가. 얘네 문제는 잠깐 뒤로 넘기고 일단은 눈앞의 문제부터 해결해야지.
[엘레나 님, 잠깐 시간 되십니까?]
[네, 뭔가 도움 드릴 일이 있을까요?]
여기도 칼답.
대충 상황을 설명하자, 곧바로 알겠다는 문자가 날아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에서 똑똑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모양이다.
“이기영 님.”
“오랜만에 뵙는군요, 엘레나 님도.”
“네.”
확실히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조금 재미있었던 것은 그녀가 들어온 뒤부터 계속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
처음에는 잠깐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들려온 목소리에 어째서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갑작스럽게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도 황당하시겠지만….”
“네.”
“이기영 님의 눈에서 엘룬 님이 느껴지시네요.”
“아… 그렇습니까?”
“네.”
“최근에 엘룬 님이 느껴지지 않아 무척 걱정했었는데….”
“…….”
“아무래도 이기영 님의 눈으로 저를 바라봐 주고 계셨던 모양이네요.”
엘룬의 메인 신도답게 무척 애뜻함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아직도 자신이 엘룬에게 버림받았다는 걸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얼굴.
보는 내가 다 안타깝게 느껴졌지만 지금 당장 그런 걸 설명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가요… 저는 잘….”
“네,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엘룬 님이 지켜봐 주고 계신다는 느낌이 드네요. 아, 이럴 게 아니라…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너무 바쁘실 것 같아 연락드리기도 힘들었네요.”
“아무래도 주어진 책임이 막중하다 보니 조금은 바쁘게 지냈던 것 같습니다. 엘레나 님께 제대로 신경 써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네요. 덕구와 함께 훈련하고 있다고는 전해 들었습니다.”
“아, 이미 전해 들으셨군요!”
“훈련은 조금 어떻습니까?”
“생각보다 더 괜찮은 것 같아요. 사실 시작하기 전에는 조금 걱정이 되는 부분도 있었는데, 덕구 씨가 생각보다 더 잘 이끌어주시는 것 같더라고요. 파티원분들이나….”
“네.”
“다른 곳에서 모집한 분들도 전적으로 덕구 씨를 신뢰하시고 계세요.”
“네?”
“듣지 못하셨나요? 덕구 씨가 선원들과 용병들을 모집해서 지금은 부대 단위로 훈련이 이루어지고 있거든요.”
‘뭐?’
“물론 부대라고 하기에는 조금 초라하지만 모두 훈련에 잘 임해주고 있어요. 모여주신 분들도 처음에는 조금 어색해했지만, 지금은 모두 만족하고 계신 것 같아요. 아무래도 주어진 임무가 막중하다 보니 모두 책임감을 느끼는 거겠죠.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솔직히 조금 무섭기는 하지만 저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기분이 좋더라고요.”
“…….”
“물론 나이스 보트를 사용할 상황이 오지 않는 게 가장 좋다는 건 알지만 말이에요.”
‘뭐야, 이 새끼. 무슨 훈련을 이렇게 스케일 크게 해?’
당연하지만 따로 부대를 구성하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녀석의 추진력에는 잠깐 혀를 찼을 정도, 뭔가 불안한 감이 있기는 하지만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박덕구를 중심으로 뭉치는 세력이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다.
수성전에서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아군에게는 도움이 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아, 그리고….”
“네.”
“말씀하신 대로 이종족 아이들을 데리고 왔어요. 응접실에서 쉬고 있고요. 아까 말씀하신 걸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데 정확히 어떤 광고를 내보내실 건가요?”
“대륙에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도움이 되는 영상입니다. 이제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덕구와 함께 훈련하시는 분들처럼 책임감을 느끼고 열심히 움직여 주시는 분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으니…. 이 땅 위에 살아가는 모든 종족의 화합과 우리 아이들이 아름다운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가자고, 우리는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고, 대륙 위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제 뜻을, 작은 메시지를 전하고 싶습니다.”
“아….”
‘봐봐… 감동하자너.’
이종족들은 물론이거니와 용들까지 영향받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콰직!
커다란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런 훈훈한 공기가 장내에 감돌고 있을 때였다.
“헥헥! 헥헥헥!”
“어?”
“헥… 헥헥! 키에에엑! 키에에에에엑!”
“똘똘이?”
눈에 보이는 것은 방 안을 꽉 채운 용.
‘왜 이렇게 커졌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