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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684화 (675/1,590)

# 684

회귀자 사용설명서 684화

기억을 지웠다(1)

‘뭐 이딴 거지 같은 상황이 다 있어.’

일단 내가 가만히 있어야 유리한 상황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이 메시지를 판단하기 이전에, 루시퍼가 힌트를 줬다는 점에서 수상한 냄새가 나고 있었으니까.

내기를 건 당사자가 뭔가 눈치채 주기를 바라고 있었고, 나 자신은 가만히 있으면 네가 이기는 게임이라 못을 박았으니, 어느 쪽에 손을 들어야 할지는 명백한 이야기다.

그 미친 까마귀는 우리 현성이를 둠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 모든 상황에 당혹스러움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의 한가운데로 들어오게 된 사람의 기분이 이러할까.

정말로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당장 며칠 후에 들이닥칠 놈들의 문제로만 머리가 꽉 차 있었던 시점이다.

다른 문제를 신경 쓸 여유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고, 사실 길드원들이나 주변을 챙기는 게 고작이었다.

‘이딴 짓을 할 시간이 어디에 있었다는 건데.’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내 머리에 이상은 없다.

하루하루가 완벽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구멍이 뚫린 듯한 느낌이 있을 리는 없다.

기억을 지운 시점을 둠현성 사태부터 지금 사이로 봐야 하는 건지 의심이 될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정황상 나와 루시퍼가 내기한 것은 북쪽에서 빛이 떨어진 시점이라고 판단되기는 했지만….

‘그 전일 수도 있어.’

어쩌면 훨씬 전일 수도 있다. 기억에 없으니, 일단은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 보는 게 옳다.

이런 상상은 하기 싫지만, 루시퍼와 내가 처음 만난 게 훨씬 더 앞이었다고 가정하면 어떨까?

‘뭘 어떻게 해. 그 까마귀 연기력이 보통이 아닌 거지.’

가능성은 적었지만 여러 가지 변수를 생각해 봄이 옳지 않은가.

까마귀도 까마귀지만 지력 90을 넘은 시점에 얻은 특성도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다시 기억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강한 암시를 줬다는 것 자체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아마 다시 떠올리기 위해서는 계기나 조건이 필요하지 않을까.

지금 아무리 생각해 봐야 답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붙잡고 있게 된다.

속 편하게 잘될 거라고 생각하며 룰루랄라 조용히 버티고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휩쓸리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불안감이 증폭된다.

이지혜가 컨트롤 프릭이라고 말했던 게 틀리지는 않는 모양, 아니, 솔직히 누나 말이 맞다.

‘시바… 그래, 나 컨트롤 프릭 맞는 것 같아.’

가만히 있지를 못하겠다, 시바.

내가 스스로 기억을 지우고 조혜진에게 안배 아닌 안배를 해놓은 것 역시 그런 연유겠지.

분명히 나는 내가 기억을 찾으려고 발버둥 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 테니까.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걸 예상했을 게 뻔했다. 그렇기에 충고의 의미로 이 쪽지를 남긴 것이 분명하리라.

‘아니지, 시바. 그렇게 쉽게 생각하면 안 되지. 이게 함정일 가능성도 생각해 봐야 하지 않아?’

내가 비밀을 캐낼 것을 예상했다면 분명히 다른 안배를 준비해 놨을 게 뻔하지 않은가.

분명히 이기영 이 개 같은 놈이 중간중간에 개수작을 부려놨을 게 당연하다는 거다.

장담하건대 함정들도 몇 가지 뿌려 놨을 거란 사실에 모든 걸 걸 수 있다.

정말로 중요한 보물을 숨겨놨다는 것처럼 보물지도를 이쪽으로 슬쩍 넘긴 후에 내가 그 보물지도에 집착하기를 기다릴 수도 있고, 이걸 미끼로 다른 곳으로 꿰어낼 생각일지도 모른다.

정리하면 조혜진에게 쪽지를 주라고 말한 것 자체가 함정일 가능성이 크다. 이건 무조건 함정이다, 무조건.

‘조혜진부터 시작하기를 바라고 있는 거지. 그렇지? 여기서부터 시작하기를 바라고 있는 거잖아. 내 말 맞잖아.’

“진짜 씨발 놈이네… 이거.”

확실히 함정을 파놓는 것보다 파헤치는 게 더 어렵다.

조금 다른 예지만 선동하는 것보다 해명하는 게 더 어려운 거랑 비슷한 느낌이었다.

괜스럽게 입술을 꽉 깨물자, 조혜진이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봤다. 이미 눈에는 눈물이 한가득했다.

가끔 기억을 잃는 것으로 모자라 정말 모든 걸 잊어버리는 이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얼굴에는 초조함이 감돌고 있었고, 당연하지만 말을 잘 잇지도 못하는 게 보인다.

“부길드마스터….”

“이거 언제 받았어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는 거지만….”

“네.”

“부길드마스터께서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그랬겠지.’

“빨리 말… 아니, 아니다. 말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어차피 시기는 의미가 없을 것 같으니까.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네요. 어차피 뻔한데….”

기억상실 떡밥이 등장한 시점부터 지금까지라고만 생각하면 된다.

어차피 거짓말을 해도 된다고 언질해 놨을 테니까.

내가 미친놈처럼 닦달하지 못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계속해서 초조한 모습을 보이면서 조혜진을 압박한다는 건, 이미 유통기한이 끝난 기억상실 떡밥의 재등장을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조혜진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조혜진이 둠현성에게 알린다면 분위기 갑자기 둠 될 수도 있고….

최대한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옳다. 마치 아무 일도 아니고, 별것 아닌 것처럼 말이다.

무엇보다 여기서부터 파고든다는 것 자체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이 깔아놓은 판 안에서 움직이는 것과 진배없다.

클리어할 수 없는 미궁을 굳이 입구부터 시작할 필요는 없다.

나 스스로 기억을 지웠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고, 답은 분명히 숨겨져 있을 것이다.

길을 잃을 수 있는 숲에 들어가는 건, 주변을 전부 뒤지고 난 이후여도 늦지 않는다.

“…….”

“…….”

“아직 전부 다 잊어버린 건 아니네요. 혜진 씨랑 만났던 기억에만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다른 건 전부 기억이 납니다. 아마 그때 제가 조금 피곤했던 모양이네요. 쓸데없이 찾아가 이런 쪽지까지 전해줄 정도면, 정신적으로 몰렸었나 봅니다. 스트레스도 심했기 때문에 딱 그 날 기억에만 문제가 있었던 것 같고요.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쪽지 안에 있는 내용은 전부 기억하고 있습니다.”

“…….”

“머리를 붙잡고 있었던 것도 다른 생각할 거리가 있어서 그런 거고요.”

“…….”

‘제기랄, 시바, 시바….’

당연하지만 크게 믿어주지는 않는 것 같은 눈치다. 오히려 의심의 눈초리가 매섭게 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김현성에게 알릴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경이 쓰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단 들어갑시다.”

“피곤하신 거라면 오늘은 그냥 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길드마스터에게는 잘 말씀드려 볼 테니….”

“저번에 그 사달이 났는데 뭘 말을 해요? 그리고 현성 씨도 대충은 알고 있어요. 혹시 불안해하실까 봐 하는 소린데… 이미 노을로 당사자랑 합의 봤으니까. 현성 씨는 신경 쓰지 마요. 아, 그리고 길드원들이랑 이런 시간을 보내는 게 저한테는 쉬는 시간입니다. 스트레스 풀어주는 느낌으로요. 정 걱정이면 하루 정도 같이 어울려 주세요. 그게 스트레스 푸는 데 도움될 것 같은데… 이틀 후에 시간 돼요?”

이틀이면 작은 단서 하나 정도는 건질 수 있지 않을까. 만약 건지지 못한다면 미궁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되는 거고.

“내일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야. 내일은 나도 알아볼 게 많은데.’

“왜요. 이틀 후에는 뭐 약속이라도 있어요?”

“약속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조금 더 확실히 현재 상태가 어떤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뭐야, 너 근데 왜 찔리는 표정이야. 약속 있어?’

“약속 있어요?”

“약속이 있기는 합니다. 지혜 씨랑….”

“…….”

“…….”

‘뭐야, 시바. 너네 왜 자꾸 어울려.’

“놀러 가는 게 아닙니다. 현장 근처의 지하 경매장으로 사용하던 곳을 대피소 겸 벙커로 사용한다는 말이 있어서 점검차 잠깐 들리는 거니까요. 전해 듣기로는 확인할 사항이 생각보다 많아서….”

‘그거 거짓말이야. 지하 대피소 필요 없어.’

“또 듣기로는 지하 경매장에 거래되던 몬스터 하나가 탈출했다고 하더군요. 등급이 높지 않은 터라 위험한 상황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조용히 처리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습니다. 신세 진 것도 많으니 이번에 갚는다는 느낌으로….”

‘불법거래 몬스터는 개뿔….’

어차피 방주가 있는데 지하 대피소가 뭐가 필요하겠는가.

“시간이 얼마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는 조금 길어질 수도 있지만….”

‘그리고 시바… 지하 경매장… 그거 우리 추억인데….’

“저는 이틀 후가 좋을 것 같은데… 이틀 후로 해요… 어떻게….”

“…….”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

이지혜에게 미안하기는 했지만 우리 혜진이가 아픈 사람을 두고 갈 정도로 냉혈한은 아니다.

예상했던 대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오랜만에 체스나 두면서 밀린 이야기 좀 나눠요. 지혜 씨한테는 제가 말 잘해놓을 테니까요. 시간이 나면 벙커도 저랑 같이 둘러보러 가면 되겠네요. 괜찮죠?”

“아니요. 부길드마스터는 거기까지 갈 필요 없습니다. 다음 날 가면 되는 거고요. 큰일을 앞두고 머리를 식히기로 마음을 먹었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게 가장 좋지 않겠습니까. 지혜 씨에게는 제가 직접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뭐, 그건 그렇지만… 아무튼 지혜 씨랑 친하게 지내는 건 좋은데 너무 가까이는 지내지 마요.”

“네?”

“이런 말까지는 안 드리려고 했는데, 그 사람 조금 계산적인 사람입니다.”

“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드릴 테니까. 그렇게만 알고 계시면 됩니다. 그럼 뭐 다른 일이 있으면 이틀 후에 만나는 거로 하죠. 체스나 두면서 와인이나 마셔요.”

“아… 네.”

“조금 늦었네요. 빨리 가시죠.”

“네.”

그렇게 조혜진과 천천히 모임 장소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조금 꺼림칙한 얼굴이 보이기는 한다. 내가 쪽지나 다른 문제에 관해 물어오지 않는 게 의아한 것처럼 보인다.

아마 이틀 후에 제대로 물어보지 않을까 같은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그렇게 설명하기에는 내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 받아들이고 있구나…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받아들일 리가 없지.’

당장 패닉이 오지 않아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다.

이 건 말고도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서 일단은 자리를 옮기고 있었지만, 솔직히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조금이나마 여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기대하던 자리였건만 오히려 혼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처음부터 천천히 되짚어 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바로 그때였다.

“거, 아직도 안 들어가고 뭐 하고 있었던 거요?”

뒤쪽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온 것, 익숙한 말투고 익숙한 목소리다. 누구인지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다.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보자 시야에 비친 것은 커다란 몸을 한 돼지.

오랜만에 만나자고 주장했던 본인의 말이 받아들여진 게 기쁜지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그런 주제에 지금에서야 나타났다는 것에 괜스럽게 심기가 불편해졌다.

‘이 새끼 진짜.’

물론 나도 늦기는 했지만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고 있는 돼지와 자신

과 싸우고 있는 나는 분명히 입장차이가 존재한다.

여전한 모습, 장담하건대 저 새끼는 시간이 지나도 나를 빡치게 하는 포지션에 자리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너… 이….”

“…….”

“너….”

“거, 내가 좀 많이 늦은 건 아닌가 하고 생각했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구만. 이제 시작한 거요?”

“너 이 새끼….”

“…….”

“…….”

“어…?”

“…….”

“뭐야… 시바… 뭐야, 시발… 시바 뭔데….”

“부길드마스터?”

“잠깐… 잠깐만… 잠깐만….”

“…….”

“…….”

“…….”

“형님… 우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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