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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686화 (677/1,590)

# 686

회귀자 사용설명서 686화

기억을 지웠다(3)

이 자리에서 가장 당황한 사람은 다름 아닌 김창렬.

갑작스레 본인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가 익숙하지 않은지 조용히 침묵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그게 실례라는 걸 깨달았는지 급하게 말을 이으려고 했지만….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부길드마스터.”

‘아니야. 지금 비꼬는 거 아니야. 창렬아. 왜 그래.’

나를 더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가지고 있는 컨셉은 아직도 버리지 못했는지 여전히 복면을 쓰고 있는 외관.

이런 자리에서까지 저런 모습을 유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본인이 저게 편하게 느껴진다는데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눈으로밖에 표정을 읽을 수 없어 상대하기 조금 까다롭기도 하고…. 이렇게 간혹 분위기를 싸해지게 만들기는 하지만 김창렬이 길드에 가지고 있는 충성심까지 읽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뒤쪽에서 녀석이 처리해 주고 있는 부분이 많다는 걸 떠올려 본다면 오히려 녀석을 치켜세워주는 게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결코 김현성을 무시한 내 행동이 이상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김창렬에게 많이 신경 써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부정할 여지가 없었으니까.

“뒤늦게 이런 이야기를 드린다는 게 조금 죄송하고 또 민망하기는 하지만 그동안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하는 일에 비해 제대로 된 대접을 해드리지 못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따로 여러 가지로 챙겨 드릴 기회도 있었는데… 그런 것도 제대로 만들어 드리지 못했네요.”

“마음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부길드마스터.”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물론 이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요. 개인적으로 창렬 씨에게 거는 기대로 큽니다.”

“실망시켜드리지 않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좋은 말씀 감사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녀석.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사교성이 없다는 생각을 했을 때, 김창렬의 얼굴에서 뭔가 걱정스러운 감정이 묻어나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뭐야. 왜 그래?’

김창렬뿐만이 아니다. 힘차게 인사를 건네 오던 정하얀이나 다른 길드원들 역시 내 얼굴에 뭐라도 묻은 것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아까 같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됐지만 눈물이 나오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기 전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 시바. 이거….’

어떻게든 수습한다고 수습했지만 폭포수 같이 떨어지던 눈물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 있는 모양, 아마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눈은 분명히 붉어져 있을 것이고 호흡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평소와 다르다든가, 조금 진정되지 않은 것 같다든가, 하는 걸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하리라. 여기에 모여 있는 강자들이 그런 것 하나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김현성의 뒤통수를 계속해서 후리게 될까 애써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았지만 지금은 다른 의미로 놈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다.

“조금… 감정이 북받치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씀을….”

“커다란 위기를 앞둔 시점이기는 하지만… 그냥 오랜만에 이런 자리를 가진다는 것 자체가… 사람을 조금 감성적으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생각도 나고요.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모이고 단체를 만들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이렇게 가까워지는 일련의 과정들을 되돌아보니… 뭔가….”

“…….”

“뭔가 기분이 좋군요. 정확히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여러분들과 함께 얼굴을 마주 보고 있다는 게 좋아요.”

수습용으로 살짝 웃어주자 악어의 눈물이 눈가에 맺히기 시작, 당연하지만 뭔가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는 길드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는 뒤늦게 합류한 입장입니다만 부길드마스터의 말씀에는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금 싱숭생숭한 감정이 며칠 전부터 계속됐었는데… 오늘 이렇게 모임을 가지니 조금은 진정되는 것 같은 기분이군요.”

‘그래, 기모야. 너는 항상 이럴 때 잘 끼어들어서 토스 잘 날려주더라.’

“나도. 비슷해.”

김예리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고 있지 않은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로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요. 부길드마스터님의 말씀처럼… 시간으로 따지면,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왠지 가족 같은 느낌이라서….”

가만히 있던 유아영도 한마디 거들고 있다. 다음에 바통을 넘겨받은 것은 박덕구의 옆에 앉아 있던 황정연.

“부끄러운 표현이 아니죠. 실상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렇지 않나요?”

“네. 그렇죠.”

눈물은 흘러내리지 않았지만 감정적으로 동요하고 있는 상태다. 그다지 나쁜 것 같지도 않다. 별것 아닌 가벼운 연출이었지만 마음 약한 엘레나의 눈에는 이미 한가득 눈물이 고여 있는 상황.

왜 갑자기 부길드마스터 분위기 잡으면서 들어오자마자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지 의아해하는 인간은 이 자리에 없다.

김현성과 조혜진 정도가 내가 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내뱉었는지 이해하고 있지 않을까.

이기영은 언젠가 여기에 있는 이들을 모두 잊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두 눈에 담아두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슬퍼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와… 이거 시바 내가 생각해도 슬프네.’

물론 이미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일이고….

여전히 모두가 함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현재의 이기영의 기억 속에서는 언젠가 사라질 이들이다.

께 부대끼며 웃고 정말로 가족처럼 지냈던 이들을 결국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엔딩을 떠올리자. 악어의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겨내자, 기영아. 이겨낼 수 있어. 비극의 히로인 엔딩,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

“기영 씨….”

‘힘든 일이지만 지금까지도 잘 이겨내 왔잖아? 길드원들에게 슬픈 표정을 보이면 안 되지. 꿋꿋하게 이겨내는 거야. 이기영. 원래 비극의 히로인은 꿋꿋해야 돼. 울지 않을 거야. 눈물을 보이지 말자.’

나도 모르게 분위기에 취해 제대로 된 즙을 한번 뽑아내려고 했었지만….

‘아니야. 시바. 이거 이러다가 진짜 비극의 히로인 되겠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머릿속에 감돈다. 당장 1회 차 가면쓰레기가 내 안에 침투했다는 가설을 세웠을 정도였으니까. 이 정도 분위기를 만들고 어찌어찌 잘 수습했다는 것에 만족해도 될 것 같았다.

‘괜히 오버할 필요 없어.’

지금도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기영 씨.”

“…….”

이유는 모르겠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뒤통수가 치고 싶어진다. 하지만 계속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리 만무. 일이 터지고 난 이후에 김현성을 사지로 보내버리느니 현재의 내 상황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옳다.

정말로 김현성을 증오하는 감정이 내면에 남아 있다면 어떻게든 빠르게 해결하는 게 해답에 가깝다.

그렇게 한숨을 쉰 이후에 고개를 돌리자 눈에 띄게 슬픈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김현성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 이 새끼.’

“…….”

“…….”

잘생겼네.

“…….”

‘시바, 다행이다. 와. 그래 시바… 거기까지는 안 갔구나. 이건 수습을 한 건가? 여기까지는 수습을 한 거 맞지?’

내 안에 있는 감정 역시 김현성을 적대하면 일이 꼬인다는 걸 이해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면….

‘아직 표면 위로 올라오지 않아서 그런 건가?’

어찌 됐든 상관은 없지만 김현성이 미워 보이지 않는다는 건 나도 안심할 수 있는 부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김현성은 불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근데 뒤통수는 치고 싶네.’

이건 가볍게 짚고 넘어가도 되지 않을까. 아마 ‘파블로프의 개’ 같은 느낌으로 받아들이면 무난할 것 같았다.

십몇 년을 넘게 김현성의 뒤통수를 쉴새 없이 꾸준히 때려왔을 테니 얼굴을 보면 손바닥이 근질근질하는 정도야 충분히 이해해 줄 수 있다.

조금 의아했던 것은 내가 예상하고 있었던 것보다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 솔직히 박덕구를 봤을 때처럼 격정적인 반응을 바란 것은 아니지만 뭔가 액션이 있어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가면쓰레기에게 가장 영향을 준 두 인물을 꼽으라면 당연히 박덕구와 김현성.

‘수습을 했다고는 해도… 이렇게까지 아무렇지도 않다고?’

오히려 약간의 미안한 감정을 비롯해 호감이 느껴질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아니, 그것과는 다르다. 조금 다른 감정이 느껴진다. 딱히 한 단어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아마….

‘동질감.’

동질감일 것이다.

“이제… 괜찮으신 겁니까?”

“네?”

“아까부터, 조금 불안해 보이셔서 뭔가 걱정하시고 계신 게 있나 싶었습니다. 아니면 혹시 제가 잘못한 게 있다든가….”

“현성 씨가 잘못할 게 뭐가 있겠어요. 제가 사과를 드리는 게 맞죠. 즐거운 시간이 될 예정이었는데… 제가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든 것 같아서….”

“아니요. 기영 씨가 죄송할 일은 아닙니다. 충분히… 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지금 기영 씨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감정을 감당하고 계신지 전부 다 이해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제가 죄송합니다. 머릿속이 복잡한 상황이실 텐데… 괜히 이런 자리를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뭔가 이상한데….’

“현성 씨가 만들지 않는다고 해도 제가 만들었을 겁니다. 이렇게 시간을 가지자고 한 것도 덕구 아이디어였으니, 현성 씨가 죄송할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저는… 아! 일단 앉으시죠. 식사부터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김현성에 대한 건 현상 유지를 하기로 마음을 먹은 건가? 애초에 그런 게 가능하면 박덕구를 봤을 때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개연성이 맞지 않아?’

아무 일도 없다는 건 좋지만….

‘너무 구린데.’

“오, 오빠 여기에….”

“부길드마스터 여기에 앉으세요.”

“…….”

“…….”

‘너무 구려. 너무 구리다고.’

이러다 정신병이 생기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낚인 건 아니겠지?’

이기영 이 개새끼한테 낚인 건 아닌 거지?

“잠깐 화장실 좀….”

“…….”

이기영 이 개 미친 사기꾼 새끼한테 낚인 건 아니지?

애초에 박덕구고 1회 차 기억이고 뭐고 전부 다 블러핑이고 개구라 아니야?

가면쓰레기한테 블러핑했던 것처럼 그냥 아무 의미 없었던 것 아니냐고.

진짜 삭제해 버린 기억이랑 내기했던 내용을 들키기 싫어서 스케일 크게 사기 친 거 일 수도 있지 않아? 1회 차 기억이 내면 안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떡밥으로 내던진 이후에 내가 스스로 조심하면서 움직이는 걸 바라고 있던 거 일 수도 있잖아.

나라면 분명히 그렇게 했을 거야.

어느 정도까지 자기암시를 준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조혜진에게 편지를 받은 이후에 ‘박덕구와 마주친다면 눈물이 난다’라는 자기암시를 함정으로 파놓을 수 있다면. 이것보다 더 완벽한 함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 조혜진이 준 편지가 트리거라고 생각하면 얼추 들어맞지 않아?

“이 미친 쓰레기 같은 새끼가….”

어쩌면 제대로 된 빅 엿을 처먹었을지도 모른다. 가면쓰레기 진청이 빅 엿을 먹었던 것처럼 나 역시 똑같이 엿을 처먹었을지도 모른다.

“쓸데없는 가설 말고 사실만 가지고 생각해 보자. 딱 사실만 가지고 생각해 보자고. 내가 놓친 게 뭐가 있는지 생각해 보자고.”

거울 속에 있는 얼굴이 시야에 비친다. 제대로 통수를 맞은 것 같은 얼굴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생각해 보자.

한번 생각해 보자. 일단 이 30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자. 내가 놓친 게 뭐가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자고.

지루하고 짜증 나고 힘들었던 시간 동안 누구를 만났지? 누구랑 만났었지? 뭘 했었지?

황정연처럼 초 기억력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파고들 여지가 있다. 이기영 이 쓰레기 새끼 역시 완벽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모든 걸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안했던 것이다. 본인 작업이 완벽하지 않다는 걸 깨닫고 있었고, 깔끔하게 처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 하나 병신 만드는 함정을 파놓은 것이 분명했다. 항상 나는 일을 이렇게 처리해 왔었으니까.

이번에도 분명히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뭘 했는데.

마지막을 준비했다.

자꾸 자신에게 물을 이유가 있나. 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챙기고 다녔지. 차희라가 벽을 넘는 걸 도와주고, 정하얀과 한소라와의 갈등을 지켜봤고, 지혜 누나랑 마지막을 점검했잖아. 박덕구와 안기모, 김예리랑 식사도 했고, 모든 이들을 한 번씩 둘러봤잖아.

대륙 회의에서는 오스칼과 이야기를 나눴고, 그 이후에도 연락을 주고받았지. 디아루기아와 디아루리아, 엘레나와 함께 새로운 세력을 포섭하는 시간이기도 했어. 제대로 준비하고 있는지, 내 사람들의 현재 상태가 어떤지, 모든 준비를 마치고 개인적으로 점검하는 시간이었잖아. 이 30일은….

그렇지. 그렇지 않아?

머리를 붙잡고 거울을 봤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다. 그렇게 쓸데없는 자문자답을 계속해서 속으로 지껄이고 있었을 때였다.

갑작스레.

머릿속에서 목소리 하나가 들어와 꽂힌 것.

둠현성 이벤트가 끝나고 일어난 시점이었을 거다. 이지혜가… 분명히 나에게 이런 말을 내뱉은 적이 있다.

[린델 내에… 남아 있는 길드가 얼마 없다니까요. 그러고 보니 카스가노 유노가… 오빠한테 꼭 말씀드릴 게 있다고 했으니까. 이번 회의 끝나면 곧바로 연락해 보시고….]

라고 했었나.

콰직 사건이 있었던 대책 회의에 들어가기 전에 이지혜가 스케줄을 정리해 주며 내게 중얼거렸던 목소리였다.

“시발….”

조금 더 기억을 더듬어 가보자. 만났었나?

빛이 떨어진 이후에 카스가노 유노를 만난 적이 있었나?

“이 미친 이기영 이 새끼.”

내 예상이 맞다는 듯.

‘그래… 맞아.’

어처구니없게도.

카스가노 유노와 만났던 기억이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그래… 맞다고… 이게 맞아… 이게 맞는 것 같아. 이게… 맞을 거야.’

거울에 비친 얼굴이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있는 게 시야에 비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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