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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689화 (680/1,590)

# 689

회귀자 사용설명서 689화

이기영 이 개 쓰레기 같은 사기꾼아 (3)

‘시바… 시바….’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현성이가… 나 왜 죽이는데….”

저도 모르게 한마디 내뱉어 봤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없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장면에 카스가노 유노의 마력이 바닥 날 때까지 되감기를 해봤지만 그렇다고 미래가 달라지겠는가.

직접적으로 김현성이 내 몸을 난도질 하는 장면을 본 것은 아니었지만 틀림없이 김현성은 현행범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이제야 카스가노가 보여주고 있는 어두운 표정과 긴급히 전해온 메시지가 이해가 간다.

“시바….”

모르긴 몰라도 무척 다급한 상황이라 판단하지 않았을까.

5현장이 무너지는 미래를 막았다는 건 그동안 열심히 한 보상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지만, 그 대가가 내 죽음이라면 생각할 가치도 없다.

빛기영을 믿어주고 있는 대륙 위의 수많은 신도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게네들을 대신해 희생할 생각이 없다.

혹시나 카스가노 유노가 이전의 이기영에게 언질을 받고 주작된 내용을 선보이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가기는 했지만 그런 게 가능할 리 만무.

장담하건대 그녀를 통해 본 내용은 여가 없이 진실이다. 그 이전에 그녀는 내게 거짓을 말할 수 없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자 눈을 감은 무녀가 천천히 입을 열어왔다.

“주인님께서는….”

“…….”

“방금 보신 미래대로 흘러가야 모든 게 완벽해진다고 말씀하셨사옵니다.”

‘그건 아까 들은 건데 다시 들어도 새롭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내가 죽는데 뭐가 완벽해.’

“그리해야 승리를 거머쥘 수 있다고 단언하셨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린데. 시바.’

“보셨던 미래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나보고, 시바, 죽으라는 소리야?’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미래를 알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사옵니다. 혹여나 변수가 생기지는 않을까 무척 우려하셨사옵니다.”

“그게… 정….”

“저 역시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주인님께서는 틀림없이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정말로 주인님이 찾아오신다면 필히 여러 번 당부하라 이르셨습니다.”

‘무슨 개똥 튀겨먹는 소리야. 이건 도대체.’

의아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백번 양보해서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기야 있다.

‘너무 잘 흘러가고 있었지.’

전장의 전황 자체가 좋아 보였다는 게 그렇다.

식물인간인 채로 눈을 감고 있을 것 같았던 라파엘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전장의 한 축을 감당해 주고 있었고, 제노지르아 역시 본인의 모든 걸 내 던진 채로 적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정하얀은 벽을 부숴 버린 상태였고, 차희라는 뭐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당연히 이런 네임드들 뿐만이 아니다. 전황이 어땠느냐고 묻는다면 밀어붙였던 쪽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조금 오버해서 반올림하자면 55 대 45로 쳐줄 수 있을 정도. 어쩔 수 없는 희생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비슷비슷하게 비벼 나가고 있는 구도가 아니었던가.

현재 인류가 가지고 있는 전력으로는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나 다름이 없다.

딱 내가 죽는 장면만 제외하면 이쪽에서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었던 미래였다는 거다.

나비가 작은 날갯짓을 하면 지구 반대편에서는 태풍이 일어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비효과에 대해 생각해 보면 나를 제외한 대륙인들이 승리를 거머쥐기 전까지의 과정 중에는 내가 스스로의 죽음을 자초하는 행동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현성이한테 너무 신경을 안 써줬나? 그래서 그런 거야? 현성아?’

너무 다른 이들을 신경 쓰느라 김현성을 도외시한 것은 아닐까. 전력을 다지고 벽을 뛰어넘게 해주는 데 집중했지만, 상대적으로 김현성을 내팽개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니 요즘 영 접전이 없었던 것 같은 느낌. 베니고어 톡도 대부분 읽고 씹기를 반복했고 통화가 길어질 것 같아 전화도 받지 않았다.

대놓고 무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김현성을 다 잡은 물고기 취급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혹시나 이 새끼가 루시퍼의 손길에 미쳐 포근하고 따뜻한 이기영 어장을 뛰쳐나간 것이 아닐지 걱정도 된다.

그럼 내기 내용은 뭐였던 거지?

‘루시퍼와의 내기 내용이 이거였던 건가?’

김현성이 나를 죽일지, 죽이지 않을지에 대해서 내기를 했을 확률도 결코 낮지는 않다. 나는 카스가노 유노에게 단서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녀가 보여준 결과물이 있었으니까.

여기서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은 스스로 죽는 엔딩을 보고 승리라고 표현했다는 것.

혹시나 이기영 이 미친놈이 갑작스레 터져 나온 희생정신으로 ‘나는 죽었지만 이 전쟁은 인류의 승리다!’라고 외치는 장면을 떠올려봤지만 영 가능성이 없다.

이기영이 모종의 깨달음을 얻고 천사처럼 착해진 사이 일을 벌였을 가능성도 제로 퍼센트에 수렴한다고 장담할 수 있다.

오히려 김현성이 나를 죽인다는 내기에 주사위를 던졌다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

쉽게 정리할 수 있는 이야기다.

1. 루시퍼와 이기영이 모종의 내기를 했다.

2. 미래에 이기영은 김현성에게 죽었다.

3. 이기영은 김현성에게 죽는 엔딩을 승리하는 엔딩이라고 발언했다.

4. 이기영은 김현성이 자신을 죽인다는 결과에 주사위를 던졌다.

5. 김현성은 이기영을 죽여야 한다.

만약 내 가설이 들어맞는다면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두 가지.

6-1. 이기영 이 새끼가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

6-2. 하도 빛, 빛 하다 보니 이 새끼가 정말로 빛이 되어버렸다. 정말로 대륙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 모든 가설과 예상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겠지만, 현재까지 나온 정황들을 살펴보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가설들이다.

만약 6-1이 들어맞는다면 이기영이 정말로 믿는 구석이 있다는 이야기겠지만… 여전히 의문점은 존재한다.

일단 김현성에게 메시지를 보내보자.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정말로 어항을 빠져나갔는지 확인 정도는 해봐야 하니까.

잠깐 의심하기야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메시지를 보내기가 무섭게 곧바로 여신의 손거울이 울리는 게 느껴진다.

보라! 회귀자와 빛기영의 끊어지지 않는 끈끈한 유대감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는 거다.

만약 3번 가정이 사실이라면 김현성은 이기영을 찔러야 내기가 성립할 수 있다.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정말로 빛기영의 새하얀 배때지에 칼을 쑤셔 박을 수 있을까.

나는 김현성을 그렇게 못난 놈으로 키운 적이 없다. 저 혼자 할복을 했으면 할복을 했지, 지금껏 자신의 짐을 들어준 친우를 배신할 못난 놈은 아니다. 이는 분명히 기억을 지우기 전의 이기영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주사위를 던지고 말고 이전에 내기가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보이는 결과가 내기가 성립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지만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불현듯 떠오르는 장면은 1기영이 붉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으며 알타누스에게 감사를 표현한 모습.

‘이건가?’

전혀 쓸데없는 블러핑이라고 알려줬던 장면이 어쩌면 힌트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만약 김현성이 나를 찌르도록 스스로 유도해야 한다면 이것만큼 적절한 장면이 없다.

‘이건 찌를 만해.’

솔직히 이건 찌를 만하다.

‘이건 진짜 찌를 만한데.’

배신감이 느껴지기야 할 것이다. 본인의 짐을 함께 들어주던 형제가 알고 보니 짐을 떠맡긴 당사자였단다.

‘이건 조금 그렇지.’

본인을 위로하고 수면 위로 끌어 올렸던 사람이 알고 보니 지옥 밑바닥 끝까지 처박아 놓은 놈이라고 생각해 보라. 온갖 악독한 짓으로 동료들을 죽이고 세상을 풍비박산 낸 가면쓰레기가 친형제 같은 사람이란다.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좀….’

거대한 마이너스 감정이 닥쳐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김현성이 이 지옥 같은 시간을 다시 반복한다는 것에 매몰되어 있다는 걸 떠올려 보면 거짓된 진실을 알았을 때 흥분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온갖 배신감과 역겨운 감정이 소용돌이치다 결국에는 자신도 모르게 이기영을 넝마로 만들고, 스스로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되는 배드엔딩.

만약 이게 배드엔딩이 아니라 해피엔딩이라면 나는 입에 내가 가면쓰레기였다는 거짓말을 입에 담아야 한다.

사실은 내가 너의 회귀에 관여했고, 너는 나에게 속은 것이라 입을 열어야 한다. 그래야 내기에서 승리하게 되고….

“루시퍼에게 도움을 받거나, 루시퍼가 개입할 여건을 만들어줄 수 있다. 이건가.”

“그건….”

“…….”

“…….”

“뭔가… 떠오르는 게 있으십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혼잣말이에요.”

“하지만.”

“여전히 가능성은 낮지만… 어째서 제가 이걸 말하지 말라고 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어째서인지 여쭈어봐도 되… 되겠습니까.”

“당연히 이런 걸 본다면 의심할 테니까요. 정말로 제가 죽음을 맞이하는 게 해피엔딩으로 향하게 되는 지름길인지, 정말로 주사위를 던지는 게 맞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겠죠. 지금도 의심하고 있습니다.”

‘김현성에게 칼빵을 맞는다고, 내기에서 이길지 누가 알겠어? 이게 정말로 내기 내용일지 누가 알겠냐고.’

만약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내기 내용이 진실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면 이런 개죽음이 없을 것이다.

내기에 승리해 그놈의 ‘믿는 구석’을 기다리고 있다가 싸늘하고 싸늘한 시체로 쓸쓸히 죽어가는 것이다.

“결코, 주인님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으실 것이옵니다. 제… 제가 그렇게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 생에도 저는 주인님을 위해 스스로를 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일어날 미래에 오차 따위가 있으면 안 된다며.’

“아니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도망치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가능하다.

보이는 미래를 피한다는 것은 루시퍼와의 내기에 패배한다는 것이겠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다.

애초에 김현성이 나를 찌르는 상황 자체가 오지 않게 하면 된다.

노아의 방주 계획을 조금 더 일찍부터 터뜨려서 싸움 자체를 회피하는 방법도 있고, 가능성이 낮다는 생각이 든다면 김현성을 도발하지 않으면 된다.

김현성은 나를 찌르지 않을 것이고 이기영은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살아남을 것이다.

‘내기가 성립하지 않거나 패배했을 경우의 페널티야 있겠지만.’

일단은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

잠잠히 머리를 굴리며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자. 카스가노 유노는 다시 한번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 아무래도 본인이 봤던 장면이 그만큼 충격적이었던 것 같았다.

“피할 수 있는 미래이기도 하니 그렇게 슬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륙의 승리와는 멀어지겠지만….”

“하지만….”

“그래도 던져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네요.”

나는 도박을 싫어하지만 이기는 게임에 주사위를 던지지 않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만약 기억을 지우기 전의 이기영이 믿는 구석이 있다면….

“던지는 게 옳을 것 같아요.”

“정말로….”

“이기는 게임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길 확률이 높은 게임이기는 할 것 같습니다.”

몇 번의 확인 과정을 거친 이후에는 확실하게 던지는 게 옳다.

“그런 의미에서, 힘드시겠지만 한 번 만 더 봅시다.”

“…….”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는 하지만 제 가설이 맞는지 한 번 더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도망치지 않고 이 내기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해도 미래가 변하지 않는지 한 번 확인해 봅시다.”

카스가노 유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불안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미래에는 변함이 없다.

기억을 지우기 전의 이기영은 내가 여기까지 파고들 거라는 걸 예상했었고, 실제로 피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예상했다.

답은 나왔다.

이기영의 죽음이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 이기영은 거짓말을 해야 한다.

진청의 죄를 스스로 뒤집어쓰고, 내가 가면쓰레기였고 너의 회귀에 관여했다는 거짓말을,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김현성에게 고백하고 스스로를 불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어야 한다.

비극의 히로인이 세상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쌍팔년도 클리셰지만 어쩌겠는가. 김현성이 이런 클리셰가 취향이라는데.

‘내 죽음으로 세상을 구할 수 있다면… 이 보잘것없는 육신 따위, 대륙을 위해 내던지겠어.’

뜨거운 빛의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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