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1
회귀자 사용설명서 691화
이기영 이 개 쓰레기 같은 사기꾼아 (5)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어디까지나 만약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하여튼 맨날 이런다니까. 쓸데없이 과민반응 보이지 마세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지금 그게…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왜… 왜 이런 걸….”
“누군가는 수습해 줄 사람이 필요하니까요. 어린아이들끼리 노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대륙은 지금 위기에 놓여 있고,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커다란 전투가 시작될 겁니다. 이제 이틀 남았어요.”
“…….”
“누구 하나 죽어 나간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없습니다. 혜진 씨가 죽을 수도 있고, 길드원 중 한 명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참고로 다른 이들이 죽었을 경우의 매뉴얼도 가지고 있으니 과민반응할 건 없어요. 대륙에서 이기영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세요. 제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마 커다란 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큽니다. 대륙뿐만이 아니라 파란 길드원들도 그래요. 누군가는 수습해 줘야 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어째서 이런 걸 만들어 놓은 거냐고 묻잖아!”
‘아니, 시바 혜진아. 왜 그렇게 흥분을 하고 그래. 둠혜진이 하고 싶어?’
“왜 자꾸 두 번 말하게 만들어요? 말했잖아요. 만약의 상황이라고.”
“이게 만약의 상황을 위해 만들어 놓은 지령서라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집어 치워. 이… 이….”
“…….”
“죽을 작정이야? 죽… 죽을 작정이냐고.”
‘아이, 시바. 너무 디테일하게 만들었나.’
예상하고 있는 것보다 더 흥분하고 있는 조혜진의 모습이 눈에 띈다. 얘가 이렇게까지 나를 생각했었나 싶어 기분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당황스러운 감정이 더욱더 크다.
“제 성격 아시는 분이 왜 이러세요? 내가 죽을 사람으로 보여요?”
“그럼 설명을… 설명을 하라고.”
“설명해 드릴 게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냥 그대로니까 그렇게 알아두시면 돼요. 아니, 진짜 왜 그래요?”
조혜진을 선택한 게 잘못된 선택은 아닌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해볼 정도였다.
‘그의 긍지를 더럽히지 말라며. 혜진아.’
AKA.그긍더 조혜진은 도대체 어디로 갔어. 네가 지금 이렇게 행동하는 게 빛기영의 긍지를 더럽히는 일이라는 걸 왜 모르니.
‘시바… 좀 그긍더 하라고 진짜.’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거라는 얼굴에 내가 다 초조해진다. 빛과 함께 모든 걸 희생하기로 한 내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생각해 보라.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나 역시 많은 결심을 한 이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래.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겠다고 막 마음먹은 타이밍이었다.
조혜진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쌍방으로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는 거다.
‘얘 이거 김현성한테 말해버리는 건 아니야?’
하는 불안감이 치솟을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할 리 없다. 1회차 때보다 나를 더 적대적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아직까지 눈물은 흘러내리지 않고 있었지만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황상태에 빠진 것 같은 모습은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왠지 모르게 사고 칠 것 같은 얼굴. 어떤 식으로라도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개소리하지 마. 개… 개소리하지 말라고. 이… 이건 못 본 거로 하겠습니다. 못 본 거로 할 테니 다시 집어넣으세요.”
‘이거 시바 하극상이야. 명령 불복종이라고.’
상급자로서 따끔하게 한마디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불길한 생각이 끊이지 않는지 조혜진의 호흡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
“다시는 이런 생각하지 마. 이기영 너는 안 죽어. 절대로 안 죽는다고.”
‘아니야. 나 죽어야 돼. 죽어야 되는데 진짜 왜 그래.’
“괜한 짓 하지 말고 제대로 읽어요.”
“싫다고 말했습니다.”
“혜진 씨밖에 없습니다. 혜진 씨밖에 없다고요.”
“…….”
“만약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 그 말을 어떻게 믿으라고….”
‘아. 얘 감정 올라왔다.’
“내가 네 말을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믿으라고. 입만 열면 거짓말… 거짓말하는… 하는 주제에.”
목이 메는지 점점 더 울음기가 번지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끄윽, 흐윽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마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조혜진은 결코 멍청하지 않다. 만약을 위해 준비된 서류를 읽고 감정 과잉이 돼 눈물을 흘리는 건 조혜진답지 않다는 거다.
아마 그녀 역시 대충은 예상하고 있지 않을까. 내가 마주해야 할 커다란 시련과 두려움, 그 모든 걸 짊어질 희생에 대해서 눈치채고 있을지도 모른다.
조혜진은 이기영이라는 인간에 대해서 조금은 알고 있다. 절대로 자신을 함부로 던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고,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캐릭터가 아니라는 것 또한 이해하고 있다.
저절로 답이 도출되는 것도 당연했다. 내가 의도한 바와는 조금 달랐지만 아마도 조혜진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기억상실뿐만이 아니었다고.
죽어가고 있는 것은 모두와 함께했던 추억뿐만이 아니었다고.
죽어가고 있는 것은 이기영 그 자체였다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걸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거고,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담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거라고.
“입만… 열면… 흐윽… 거짓말… 하잖아.”
이제는 의식했는지 두 손으로 눈물을 연신 닦아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가져가요. 다시 가져가라고… 그런 거짓말… 절대로 안 믿으니까. 괜찮다고 하는 말… 안 믿으니까.”
“…….”
“가져가. 가져가! 이 쓰레기 새끼야. 가져가라고!”
“…….”
“이런 걸 받으면 내가 좋아할 줄 알았어? 이… 이 기만자 새끼. 오늘 보자고 한 게 이것 때문이었어? 이런 말이나 하려고 초대해서 체스나 두자고 한 거야? 한가하게? 한가하게 체스나 두자고… 흐윽… 체스나 두자고 한 거냐고… 이딴 걸 보여주려고 불렀어?”
“너는….”
“이 나쁜 새끼야. 이 더러운 쓰레기 새끼… 이제야… 이제야 속이 시원해?!”
“혜진….”
“이제야 속이 시원하냐고! 그렇게 혼자 다 짊어지는 척하면… 네가 뭐라도 될 것 같아? 흐윽… 남의 머리 꼭대기 위에서 그렇게 사람을 놀려 먹으니까. 이제 조금 기분이 좋아졌어? 내가 웃고 떠들고 있는 걸 보니까. 속이 후련했어?”
“…….”
“겨우 이것밖에 안 돼? 너… 겨우 이것밖에 안 되는 놈이야? 포기할 거야? 안 죽는다며. 절대로 죽지 않을 거라며. 자기 목숨 챙기는 것 하나는 자신 있다며…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 거라며! 살 거라며!!! 이… 이 개새끼… 흐윽… 이 개새끼야. 그렇게 살 거라며.”
“…….”
“말해줄 수 있었잖아. 말해줬으면 다른 방법을 찾았을 수도 있었잖아. 현성 씨랑 잘 되게 해준다고 말했었잖아. 그것도… 그것도 전부 거짓말이었지. 전부 다… 전부 다 거짓말이었어.”
“…….”
“일이 다 끝나면 한가하게 놀러 나가자는 것도, 일이 끝나면 밤새도록 체스나 두면서 밀린 이야기나 하자는 것도, 같이 쇼핑 나가자고 했다는 것도… 전부… 전부 거짓말이었어… 전부 흐윽… 전부 거짓말이었어.”
“미….”
“사과하지 마. 사과하지 마!”
“안….”
“사과하지 말라고! 흐윽… 사과하지 마아!!!! 이 거짓말쟁이 새끼!!! 이 개새끼!!!! 흐윽… 흐윽… 사과하지 말라고….”
“해….”
“사과하지 마!!!!!”
“일단 진정….”
“진정 같은 소리 집어치워. 이 개새끼. 이 개새끼야. 거짓말쟁이 새끼야….”
“…….”
“말해….”
“무슨 말을….”
“언제부터였는지. 전부 다 말해. 도대체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건지, 정확히 어디에 문제가 있는 건지. 말해. 나는 들을 자격 있어. 나는… 나는 들을 자격 있다고. 정확히 얼마나 남은 건지… 이야기해.”
“…….”
“말하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거짓말하면 그 입 부숴 버릴 테니까.”
“정확히는 저도 잘….”
“…….”
“후우….”
“…….”
“…….”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정확히 언제라는 건 나도 알 수 없지만 긴 시간은 아니고요. 증상을 깨달은 것도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니고… 일부러 숨긴 것도 아니에요. 저도 알아차린 지 얼마 안 됐다고 하면 조금 이해가 돼요?”
“…….”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저도 알 수 없지만… 이건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만약 방법이 있었다면 제가 먼저 찾았을 겁니다.”
“그걸 네가… 네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 건데.”
“…….”
다른 말이 필요할 리가 없다. 천천히 빛의 날개를 펼쳐보자. 순식간에 온몸이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하고 커다란 신성이 몸 안에 깃든다.
어두웠던 방 안을 비추는 빛은 웅장해 보이기보다는 왠지 모르게 슬퍼 보인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래. 그 정도로… 서글프게 느껴졌다.
“이… 이것 때문….”
고개를 젓자 다시 한번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보였다.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 이미 이기영의 몸은 예전에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다.
조금만 생각해도 알아차릴 수 있지 않을까. 그동안 내가 자신의 몸을 얼마나 혹사시켰는지 알고 있다면 당연히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약한 신체로 몇 번이나 거대한 사선을 넘었다. 분에 넘치는 동료들과 함께, 평생을 노력해도 볼 수 없었던 풍경을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정말로 많은 일을 겪었다. 힘들기도 했고 가끔은 눈물을 흘릴 일도 있었지만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과정이 즐거웠으며, 이 역경과 고통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래 그런 설정이다. 그게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몸은 그 시간들을 견디지 못했다. 한때 악마들에게 붙잡혀 살아 있는 게 기적일 정도로 몸이 넝마가 된 적도 있었고, 부작용에 약을 먹으며 하루하루를 버틴 적도 있었다.
나 역시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기영은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죽어가는 신체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몸으로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신성. 베니고어 여신이 한 인간을 가엽게 여겨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버틸 수 있는 신성을, 스스로 매듭지을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것이다.
“거짓말… 거짓말하지 마.”
“…….”
“흐윽…. 흐윽… 거짓말하지 말라고… 제발… 제발 거짓말이라고 해줘.”
거짓말이 아니다.
“제발… 부탁이니까. 거짓말이라고… 말해줘, 제발….”
“거짓말이 아닙니다.”
빛기영의 대륙을, 아니, 내 사람들을 지키고 싶은 두 눈에 거짓 따위는 없다.
“흐윽… 어떻게… 어떻게….”
솔직히 희생이라는 말은 이기영과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다.
“어울리는 말은 아닙니다만….”
하지만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이미 끝이 왔다는 걸 알아차렸다면 이런 엔딩도 나쁜 엔딩은 아니다.
“뭐, 받은 만큼 돌려주는 거라고 생각합시다. 저도 제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기왕 벌인 일은 잘 마무리 지어야죠.”
“…….”
“혹시 압니까. 일이 잘 매듭지어지면 포상의 의미로 베니고어 님이 저를 살려주실지 누가 알겠어요? 솔직히 전부 다 내던지고 도망치고 싶지만, 그런 선택을 하면 몸을 유지하고 있는 신성까지 뺏어가지 않을까 무섭더군요. 그렇지 않아요? 기껏 대륙을 구하기 위해 내려준 신성을 도망치는 데 사용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제가 신이라면 괘씸해서라도 천벌을 내렸을 겁니다.”
“흐윽….”
“전부 다 살자고 하는 짓이니까 신경 쓰지 마요. 저도 조금은 변했습니다.”
“흐윽… 흐으윽….”
“아마 예전이었다면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예요. 너 죽고 나 죽자 심정으로 개판 돼도 나 몰라라 했겠지만… 그냥 갑자기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임이라는 거, 그걸 심어준 게 혜진 씨인 것 같습니다. 제가 속해 있고 제 안에 들어와 있는 이들에 대한 책임이요. 익숙하지 않아서 뭐라고 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흐윽… 흐… 으으윽… 끄윽.”
“나랑 어울리지도 않고, 이런 말 하기도 부끄럽지만 저는 제 행동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긍지라는 거. 그걸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흐윽… 흐으윽….”
“그러니.”
“흐으윽….”
“제 긍지를 더럽히지 마세요.”
“…….”
“…….”
“이기영… 이 쓰레기 같은 새끼….”
“…….”
“이기영… 이기영 이… 개 쓰레기 같은 사기꾼 새끼… 흐윽….”
빛처럼 새하얀 장내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흐느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사기… 히끅… 사기꾼… 흐윽…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