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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694화 (685/1,590)

# 694

회귀자 사용설명서 694화

마지막을 준비하자 (3)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느껴진다. 눈은 칙칙한 후회로 물들어가고 있었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점점 더 일그러지는 표정이 보였다.

허물어지며 비명을 내지르는 게 정하얀이 할 수 있는 행동의 전부.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에는 그 누구도 이견을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정하얀은 급속도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한소라는… 한소라는 괜찮은 건가?’

나 역시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였지만 일단은 정하얀을 안정시키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힘든 상황. 둘 중 하나라도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이쪽마저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 들어간다면….

‘그거야말로 놈들이 바라는 바야.’

내부가 흔들리면 흔들릴수록 놈들은 행복한 비명을 내지를 것이다. 본래부터 이게 목적이었으니까. 하나가 되려는 인류의 전투 의지를 상실하게 하고 안에서부터 공략하는 것이 놈들의 진짜 목적이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이런 방법을 쓰면서까지 대륙을 위협하려고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어째서 한소라에게 이런 불운한 위협이 닥쳐왔는지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금방 떠올려 볼 수 있는 이야기다. 아마 놈들이 노린 건.

‘나야.’

박미진을 통해 진짜로 얻으려고 한 것은 이기영이다. 녀석들의 진짜 목적은 한소라가 아니라 이기영이다. 어떻게 보면, 아니, 너무나도 명확하게 그녀는 휩쓸린 것에 불과하다. 이기영의 무능 때문에 말이다.

‘성장하지 못한 건가.’

성장했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일을 겪으며 조금은 앞으로 나아갔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제자리걸음이 아닌가.

악마 숭배자 이토소우타, 악마 소환사 진청, 그 외 수많은 악마 관계자들, 녀석들에게 당했던 수법 그대로….

이기영은 아직도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었다. 대륙을 지킬 거라고, 모두를 지킬 거라고 다짐했지만 자기 사람 하나 지키지 못하는 멍청이에 불과했다.

커다란 죄책감이 나를 짓누르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금방이라도 풀썩 쓰러지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더 이상 동료를 잃을 수는 없다는 결의, 그 작은 결의 하나가 현재의 이기영을 이 자리에 서 있게 했다. 그래. 이 정도가 좋겠다. 이 정도 감정선이면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하얀아… 시바.’

문제는 내가 아니라 정하얀 쪽. 비명을 지르다 못해 실어증이라도 걸린 것 마냥 꺼윽꺼윽 말하지 못하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눈에서 눈물이 얼마나 떨어지는지 제대로 앞은 볼 수 있을지가 걱정될 지경.

지금 빨리 한소라에게 가 봐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아니, 애초에 주문을 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아… 이거 시바, 한소라를 보여주는 게 맞나?’

한 발자국을 넘어야 하는 정하얀이 오히려 다섯 발자국 정도 물러선 모양새이지 않은가.

어쩌면 정하얀은 한소라를 보러 갈 용기가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는 모습은 두려워하고 있는 것만 같다.

본인의 친우를 외면하고 밀어낸 결과물이 어떤 것인지, 자신의 실수로 일어난 최악의 상황이 무엇인지 정하얀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고개를 숙여 똑바로 정하얀의 얼굴을 바라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무너지면 안 돼.’

당연하지만 여기서 무너지면 모든 일이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린다. 뭐라도 말을 해야 했다.

“아직 안 늦었어.”

“…….”

“하얀아.”

“…….”

“네 잘못이 아니야.”

“…….”

“괜찮을 거야. 분명히.”

“…….”

“여기서 이러고 있을 거야?”

“어… 어….”

“정신 차려. 소라 씨에게 가 봐야 돼.”

“소라… 소, 소, 소라… 소라….”

“아직 살아 있어.”

“아… 소, 소라….”

“분명히… 분명히 살아 있을 거야.”

일단 살아 있기는 하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눈물을 쓱쓱 닦고 일어나는 모습, 주문을 외워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좀처럼 외워지지 않는 것 같았다.

전혀 정하얀다운 모습이 아니다. 떡락 아니면 떡상 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닫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지금 갑니다. 지금 가요. 주문 외우고 있으니까 준비해요. (0/1)]

[한소라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어 한소라는 보상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이거 시바 망하면 그냥 튀어야겠다.’

노아의 방주에 시동이나 걸어놓으라고 막스한테도 이야기해놔야지.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아, 안 돼… 안 돼… 이기영 후배. 진심 아니지… 진심 아니지? (0/1)]

아쉽게도 진심이다.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내가 뭐 할 수 있는 일 없을까? 내, 내가… (0/1)]

이미 베니고어의 손을 떠났다.

‘아. 이거 시바. 괜히 한소라한테 맡겼나.’

제대로 준비한 게 맞는지도 의심이 될 지경, 그 와중에도 정하얀은 주문을 외우기에 한 참이다.

평소였다면 얼마 걸리지 않을 캐스팅이 계속해서 캔슬되는 것을 보니 점점 더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조금 더 세세하게 역할이나 대사에 코칭을 해줬어야 하는 게 아니었나 하는 자기반성을 해봤지만 여기서는 한소라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쉬운 일이다. 그냥 죽어가는 척만 해주면 이쪽에서 전부 알아서 해주는 거니까.

‘소라야. 날 실망시키지 마.’

하지만 정하얀의 주문이 외워진 이후, 한소라의 모습을 눈앞에 목도한 순간, 잠깐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

“…….”

‘뭐야. 시바. 얘 취향 왜 이래.’

퀄리티가 중요하니 미쟝센에 조금 더 신경 쓰라고 말은 해놨지만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모습.

‘아니… 뭐야. 시바. 이거 이래도 되는 거야?’

도대체 이런 건 누구한테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괜히 흑마법사를 선택한 게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중2 감성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현재의 한소라가 보여주는 모습은 그 정도 수준을 넘어섰다.

‘미친 거 아니야? 아니, 시바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아니, 이거 시바 이 정도면 하얀이도 눈치채는 거 아니야?’

한소라의 방안은 이질적인 빛으로 뒤덮여 있다. 딱 여기까지가 내가 설계한 대로. 이질적인 빛의 나무에 십자가에 못 박힌 것마냥 매달려 있으라 주문한 적은 없다.

퀄리티가 나쁘지 않다는 게 그나마 위안을 삼을 만한 부분이기는 했다.

온몸이 이질적인 기운으로 빛나고 있으니 언뜻 보면 나무에 점점 집어 먹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무의 가지가 한소라의 몸 안을 파고들었는지 얼굴과 손 등 보이는 부위들이 울룩불룩한 게 눈에 띈다.

아니, 애초에 한소라의 안에서 이질적인 나무가 발아한 것처럼 보이지 않은가. 더러운 외신이 한소라의 안에 역겨운 씨앗을 심어놓은 것으로 해석해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해석하니 뭔가 개연성이 맞는 것 같기는 하다.

‘아… 이거 보다 보니까….’

멋있기는 하네. 한소라가 그린 그림이 뭔지는 알겠어.

‘그래도….’

너무 과하다. 아무리 봐도 너무 과한 설정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나라고 어째서 둠소라 같은 걸 등장시키고 싶지 않았겠는가. 여건만 된다면 둠소라 기획으로 눈물 콧물 다 빼는 연출을 해보고 싶었지만 그런 커다란 이벤트에는 필연적으로 안정적인 연기가 따라올 수밖에 없다.

한소라에게 커다란 걸 바라지 않은 것 역시 그러한 이유. 괜히 판을 크게 벌이는 것보다 작지만 알찬 내용을 선보이는 게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근데 문제가 커져 버렸다.

‘아… 뭐야. 시바. 이거 스케일 왜 이렇게 커.’

순간적으로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는 게 당연하다는 거다. 나는 제작비로 다섯 장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얘가 갑자기 정신이 나갔는지 도입부에서만 열 장을 갈겨 버렸다.

등장 연출은 박수를 보낼 만했지만 그 연기를 소화할 배우가 믿음직스럽지 않았고, 이후에 남은 스토리들은 어떻게 끌고 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애초에 이거….

‘아니, 이건 어떻게 한 거지?’

한소라의 흑마법도 아니고, 선희영 안에 있는 것으로 만들어낸 기운도 아니지 않은가.

혹시나 정말로 외신의 끄나풀이 튀어나온 건가 싶어 긴장하기는 했지만 의외로 금방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이기영 후배! 이 정도면 될까? (0/1)]

무언가 꼬인 곳에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그 신이 문제였다.

‘시바. 되긴 뭘 돼. 시바.’

어쩐지 한소라의 얼굴이 뭔가 부자연스럽다 했다. 본인의 몸에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당황을 금치 못하는 모양새.

일단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시키는 대로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쟤 입장에서는 얼마나 무섭겠는가. 본인 몸에서 갑자기 빛의 나무가 자라나고 심지어 본인은 거기에 매달려 있게 됐는데….

베니고어의 목소리도 한 번도 들어본 적도 없을 테니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혹시 자기도 모르게 팽당하는 건 아닌지 무서운 게 당연하지 않을까. 아니, 저런 데다 쓸 신성이 있으면.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블러핑이야! 블러핑! 이기영 신도! 신, 신성도 별로 안 들어갔는데… (0/1)]

난 모르겠다. 진짜 모르겠다. 안 그래도 박덕구 몰카에 참여해 본 경력이 있는 정하얀이 저걸 보고 의심을 할지 하지 않을지 알 수가 없다.

긴장되는 표정으로 정하얀을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그런 그녀가 폭포수 같은 눈물을 흩뿌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소… 소라… 소라 맞아?”

도저히 본인이 본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눈.

“소라… 소라 맞아?”

양팔을 벌리고 간신히 숨을 내뱉고 있는 저 인형이, 이미 이질적인 나무에 먹혀 버리고 있는 저 인형이 정말로 한소라가 맞는지에 대한 의문.

“오, 오빠… 소라 아니죠? 저거… 소라… 끄윽… 소라 아니죠. 소라 아니죠? 소라… 흐윽…흐으윽….”

“…….”

“정…. 하… 얀 님.”

“…….”

“…….”

“어….”

“정… 하얀….”

“살아 있어. 살, 살아 있어요! 살아 있어요.”

“님….”

“내, 내가 구해줄 수 있어.”

“…….”

“내, 내, 내가 구해줄게… 구할 수 있어. 구해줄게. 기, 기다려. 기다려. 그, 그러니까… 흐윽… 내가… 지금 거기서 빼… 빼줄게. 그, 그럼 전부 다 해결돼. 그러면 되는 거니까. 다행이다. 오, 오빠 아직 살아 있어요. 흐윽… 끄으윽… 다행이다. 히끅… 너무 다행이다… 흐윽…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신님.”

“…….”

“흐어엉… 어어어어엉… 소라야. 기다려. 기, 기다려….”

‘이게 된다고?’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내…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0/1)]

‘이게 된다고? 진짜?’

어떻게 봐도 초심자의 행운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광경이다.

“흐엉… 흐으으엉… 지금… 지금 구해줄게. 히끅….”

조금은 상기된 정하얀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일단 숨은 붙어 있으니 이제 저 나무에서만 떼어낸다면 행복한 삶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자신이 한 발 더 빨랐다고 생각하는 게 눈에 보인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것도 느껴진다. 극한의 긴장 상태에 놓여 있다가 순간적으로 안심하니 힘이 빠져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겁지겁 한소라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는 정하얀의 모습이 보인다. 이제는 슬슬 입가에 미소까지 띠고 있지 않은가.

물론 일이 그렇게 행복하게 해결될 리 만무. 정하얀의 행동이 굳은 것은 한소라가 다시금 입을 연 직후였다.

“도망….”

“…….”

“도망치세요. 여기 있으면… 위험… 해요.”

그녀의 말이 맞다. 한소라의 몸에서 자라난 폭탄이 터져 나가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1회차 정하얀의 육신을 폭탄의 재료로 사용한 녀석들의 수법 그대로….

나도 이쯤에서 한마디 거드는 게 좋지 않을까.

“이미 늦었어.”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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