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5
회귀자 사용설명서 695화
마지막을 준비하자 (4)
씁쓸한 미소를 짓는 한소라의 표정,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묻는 듯한 정하얀의 눈빛.
나 역시 참담한 심정이기는 했지만 누군가는 입을 열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미 늦었어.”
“늦, 늦지 않았어요.”
“…….”
“아직 안 늦, 늦었는데. 아, 아직 살아 있어요. 소라… 소라 아직 살아 있어요. 오빠.”
“…….”
“아직 안 늦은 거 맞죠? 그, 그렇죠? 네?”
“…….”
다시 한번 더 말하려고 했지만 나 역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믿고 싶지 않은 현실에 절로 입술을 깨물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절대로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한소라의 모습이 점점 더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어떤 각오를 하고 있는지 눈치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결심했다는 듯, 힘겹게 입술을 달싹이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저는… 괜찮아요.”
“무,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무슨… 흐윽…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구….”
“최대한… 멀리… 떨어…지셔야 해요. 더 이상 억누르기… 힘… 힘들어요.”
“이, 이,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소라가 항상 나… 나 믿는다고 했었지? 내, 내가 구해줄 수 있어. 그러니까. 조, 조금만 기다려. 소라야. 소, 소라가 나 천… 천재라고 했었잖아. 그,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간단하게 해결될 거야. 으응.”
“네. 정하얀 님은… 천재시니까요. 선택받으셨으니까요.”
“으응. 그러니까 구, 구할 수 있어. 소라야. 거기서 나올 수 있어. 조금만 더 버티면… 조금만 참으면 내가 꺼내줄 수 있어. 천, 천재니까. 천재니까.”
“정하얀 님은 해내실 수 있을 거예요. 분명히… 분명히 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으응…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허겁지겁 한소라를 분석하고 있는 두 눈이 보였다. 정하얀의 머리에 모터가 달려 있었다면 아마 귀를 찢는 듯한 굉음이 들려오지 않을까.
이곳에서 곧바로 연구를 시작하려고 판을 깔고, 본격적으로 한소라 구출 작전을 시행하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짧으면 10분, 길어야 20분이다. 단순히 이 방만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대륙의 몇 분의 일이 날아갈지도 모른다. 초인적인 힘으로 애써 폭발을 막고 있는 한소라가 새삼스레 대견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할 수 있어. 응… 할 수 있어. 쉬운 일이야. 응. 나는 할 수 있어.”
“막아… 막아주셔야 돼요.”
“어?”
“막아주실 수 있으실 거예요. 정하얀 님은 천재시니까.”
“아니….”
“막으셔야 돼요.”
“오… 빠?”
전하기는 어렵지만 전해야 한다.
“일대가 완전히 날아갈 거야.”
“거짓말….”
“…….”
“거짓말이야. 흐윽… 거짓말… 거짓말이라구… 흐으윽… 끄윽….”
사실 정하얀도 조금은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마력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기운이라고 한들, 팽창하고 있는 저게 보이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베니고어는 단순한 블러핑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기묘한 빛이 계속해서 눈에 띈다. 폭탄의 심지가 타들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
녀석이 그냥 한소라를 죽일 작정이었다면 절대로 이런 귀찮은 방법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초유의 사태가 외신쓰레기가 한소라의 안에 씨앗을 심어 둔 이유다.
“할 수 있어요. 정하얀 님.”
“못, 못해.”
“하셔야 해요.”
“못, 못해. 흐윽…흐어엉… 끄윽… 오빠. 오, 오빠 어떻게 좀 해주세요. 소, 소라 좀 살려주세요. 소라 좀 살려줘요. 흐어어엉….”
분하지만 나 역시 다른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 물론 전혀 수가 없는 건 아니지만 과연 정하얀이 이걸 해낼 수 있을지가 문제.
“살려주세요. 끄윽… 제발요. 제발….”
하지만 아무것도 못 해보고 이렇게 한소라를 잃는 것보다는 낫다.
“봉인.”
“네?”
“봉인이라면 가능해.”
“봉… 봉인이요?”
“봉인할 수 있다면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이 방 안에 있는 시간을 완전히 동결시키는 종류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소라를 지켜내는 것도 가능할 거야. 술자를 처리한다면 소라의 몸에 내재되어 있는 이질적인 기운 역시 사라질 확률이 높아.”
“…….”
“물론 확실하지도 않고, 도박에 가깝기는 하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을 거야. 지금 이렇게 터지는 걸 바라만 보고 있는 것보다는 그게 더 나아. 최소한… 최소한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테니까.”
“네?”
정하얀이 아니라 한소라가 낸 목소리였다.
‘아. 이거 말 안 해줬었나 보다.’
엔딩에 대해 설명해 주는 걸 까먹고 있었던 모양이다.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전쟁 끝나면 봉인 찢고 나옵시다. 소라 씨는 특별히 종말의 날 열외★ (0/1)]
[한소라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어 한소라는 보상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그게 뭔 소리냐고, 미친 소리 하지 말라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는 눈이 보이기는 했지만 한소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
누가 보기에도 봉인되기 싫다는 얼굴이다. 차라리 자신이 희생하는 게 더 나은 방법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하겠지.
만약 봉인이 실패할 경우에 일어날 대형사고에 대해서 걱정하는 듯한 모습, 한소라도 변했다는 걸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대륙과 정하얀을 위해 구태여 주사위를 던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지 않은가.
그 와중에도 정하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 이건 어쩔 수 없는 수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계속해서 고여 있는 눈물을 주르륵 흐르게 내버려 두며 정하얀은 떨리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겠어?”
“해, 해야 돼요.”
한소라를 살리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쉽지 않을 거야.”
“그래도… 그래도 해야 돼요.”
그것만이 한소라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다.
“흐윽… 흐으으윽….”
“정…하얀 님?”
“힘낼게. 소라야. 나… 힘… 힘내볼게. 끄윽….”
“네?”
“꼭… 꼭 소라를 그렇게 만든 애. 죽, 죽여줄게. 내가… 죽여줄 수 있어. 소라도… 터지지 않고 그 상태 그대로 유지될 수 있게. 봉인해 볼게… 끄윽….”
“지, 지금….”
“미… 미안해. 소라야.”
“네?”
“미안해… 끄윽… 정말 미안해.”
“아….”
“모르는 척해서 미안해… 멋대로… 멋대로 그렇게 마음대로 행동해서 미, 미안해… 고, 고, 고맙다고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손으로 밀치고… 마법으로 내쫓아서… 그렇게 막…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해서 미안해. 소라 잘못이 아니었는데도 소라가 잘못했다고 떼써서 미안해. 먼저 사과 안 해서 너무 미안해. 모르는 척해서 미안해. 계속 무시하고 있어서 미안해…흐으으어어엉… 히끅… 내, 내, 내 잘못이야. 소라가 그렇게… 그렇게 된 건 내 잘못이야. 흐으윽… 내, 내 잘못이야. 미안해. 미안해… 너무너무 미안해.”
“어… 어? 어… 어… 흐윽… 아니에요. 흐으윽… 정하얀 님 잘못이… 아닌데….”
“미안해. 정, 정, 정말 미안해. 소라야. 흐어엉… 흐어어어어엉….”
“저도 죄송해요. 저도… 저도 흐윽… 너무 죄송해요. 별것도 아닌 일인데 화내서 너무 죄송해요. 제대로 연락도 못 드리고 잘 해드리지 못해서 너무 죄송해요. 너무 죄송해요.”
“흐어어어어엉… 소라야. 소라야.”
“죄송해요. 너무… 죄송해요.”
“소라는 잘못한 거 없는데… 끄윽… 잘못한 거 없는데.”
“죄송해요….”
“너무 미안해… 용서해 줘… 흐윽… 용서해 줄 거지?”
“사과하실 일도 아닌걸요. 네… 그리고… 오해였으니까요. 이렇게라도 오해가 풀려서 너무 다행이죠… 네. 이제는 미안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미 충분히 사과하셨어요. 그러니까. 고개 드세요. 고개 들고 웃는 모습을 보여주세요. 웃어주세요.”
“헤… 헤헤… 끄윽… 헤헤헤….”
“네. 그렇게요.”
“헤헤… 흐윽… 헤헤헤헤… 끄윽….”
“웃어주세요.”
“으응… 웃고 있어. 웃, 웃고 있어… 계속 웃고 있을게. 계속… 웃고 있을 거야.”
“저… 저 사실은 무서워요. 정하얀 님. 무서….”
“아프지 않을 거야. 아, 아, 아무렇지도 않게 해줄게. 한숨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제, 제, 제자리로 돌아갈 거야. 나… 나 믿지? 믿어줄 수 있지?”
“…….”
“난 천재니까. 그렇게 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그… 그렇게… 그, 그, 그렇게에에에!!!”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정하얀을 중심으로 마력이 퍼져 나가기 시작한다.
마력의 크기 때문인지 정하얀의 몸이 저절로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몸을 비집고 튀어나오고 있는 마력이 정하얀의 몸을 띄우고 있는 것이다. 믿기지 않는 모습이다.
무슨 주문을 외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정하얀은 흔들림이 없는 눈으로 한소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서워요. 무서워요. 흐윽… 정하얀 님. 무서워요.”
“무섭지 않을 거야. 내, 내가 해결할 수 있어.”
“흐윽… 흑…. 아아아아아아악!!! 정하얀 님… 정하얀 님!”
한소라의 몸에서 이질적인 빛이 쏟아져 나온 것은 바로 그때.
한소라 본인도 많이 당황하기는 했는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정하얀은 입술을 꽈악 깨물고 있다. 본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사태가 심각하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리라.
터져 나오려는 빛을 마력으로 계속해서 막으려고 하지만 그게 생각대로 될 리 만무. 마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블러핑된 신의 빛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사방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어어어엉… 정하얀 님! 정하얀 님!! 터질 건가 봐요. 진, 진짜로 터지나 봐요. 흐어어엉….”
‘한소라 연기 진짜 죽여준다. 아, 시바 둠소라 했어도 됐겠는데?’
“이익… 이이이이익! 할 수 있어.”
‘그래.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어!!”
‘당연하지. 시바.’
저 빛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은 공간을 통째로 봉인하는 것뿐이다.
“아악! 아아아아악!”
“할 수 있어어어어어어!!!!”
‘시바. 진짜 한다. 우리 하얀이 진짜 한다.’
건드릴 수 없는 신의 힘을 마력으로 잡아 본래대로 되돌리는 모습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신?’
공간 자체가 얼어붙고 있는 것이 보인다. 커다란 빛 때문에 터져 나오고 있는 파편은 물론이고 심지어 뻗어 나오고 있는 빛까지 무색으로 변화하고 있다.
단순한 봉인인지, 정말로 시간을 멈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전자이지 않을까.
“이이이이익! 이익!”
하지만 천천히 마력이 사그라들고 있는 것이 문제. 커다란 다짐은 했지만 정하얀으로서도 쉬운 일이 아닌지 자꾸만 무색으로 얼어붙은 공간이 본래의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본인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지 눈물을 머금고 있는 얼굴, 초조한 표정, 어쩌면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여기까지였다고 자신은 천재가 아니라고 그렇게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전혀 계획되지 않은 상황에 혼란스러워하는 한소라를 바라보다, 심각한 표정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바라본다. 막지 못하면 이기영까지 죽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넘을 수 있나.’
눈에 깃든 것은 책임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었다. 혹시나 내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이번 위기를 감당해야 하는 것은 오롯이 정하얀의 몫이다.
액션으로라도 도움을 주는 척을 해보자. 구경만 하기에는 뻘쭘한 상황이지 않은가.
시간과 공간을 얼린다는 불가능한 미션에 합류한 척 커다란 신성을 꺼내 들고 손을 뻗는다.
“으아아아아악!”
한소라를 지키기 위해. 대륙을 지키기 위해. 다시 한번 모든 걸 쏟아낸다.
“오… 오빠.”
“할 수 있을 거야. 하얀아.”
‘넌 천재니까. 무조건 뛰어넘을 거야.’
“나는 너를 믿어.”
“…….”
“…….”
“네.”
“정하얀 님… 정하얀 님!! 저… 저!”
“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거대한 마력이 한바탕 실내를 휩쓴 직후.
“해냈어… 헤… 헤헤. 끄윽… 소라야… 소라야 해냈어.”
완전히 굳어버린 채 입을 벌리고 있는 한소라를 바라보며… 울음 섞인 미소를 보내고 있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쳤다.
당연하지만….
당연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꼭… 꼭 구해줄게. 금방… 다시 꺼내줄게.”
외신과의 결전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 길드 유일의 흑마법사이자 끊임없이 노력하던 소중한 친구가 리타이어 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