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6
회귀자 사용설명서 696화
마지막을 준비하자 (5)
시작도 하기 전에 동료를 잃었다는 충격이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굳어 있는 한소라의 얼굴에 맺힌 눈물은 그녀가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똑바로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마주하기가 힘이 들 정도였다. 의외였던 것은 정하얀이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
나조차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아픔을 똑바로 마주하고 받아들이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벽 넘었나? 이거 벽 넘은 것 맞지?’
굳이 자신한테 질문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벽을 넘어섰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정하얀이 신처럼 보일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마법사로서의 성장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성장까지 손아귀에 쥔 것 같은 모습은 저절로 주먹을 꽉 쥐게 했다.
울고불고 난리를 칠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다르게 단단히 다짐한 듯 나무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다.
눈에 눈물이 가득 담겨 있는 모습은 여전했지만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계단 하나를 밟고 올라선 이의 모습이었다.
한계치까지 마력을 사용한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잠시, 저절로 마력이 회복되기 시작하는 모습에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에너지를 생산하는 발전소처럼 정하얀은 잃은 마력을 실시간으로 회복하고 있다.
‘이게 가능한 건가?’
어떤 매커니즘으로 이게 가능한 건지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같은 인간이 맞는지 의구심을 가져도 이상하지 않다.
‘이 정도면….’
확실하지는 않다. 하지만 지금의 정하얀은 1회 차보다 더 강할지도 모른다. 심지어는…
‘현성이보다 센 거 아니야?’
종목이 달라 뭐라 우열을 가릴 수는 없지만 정하얀이 김현성보다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을 것이라는 것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정하얀은 마법사였으니까.
갑작스레 덜컥 겁을 집어먹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현재 상태에 정하얀이 만약 폭주라도 한다면 그런 그녀를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제대로 개판 한 번 쳐보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김현성조차 그녀를 막는 데 애를 먹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다.
물론 상황 자체는 안심할 만했다.
정하얀은 달라졌으니까. 눈물이 날 정도의 감동스러운 연출을 통해 정신적인 벽까지 뛰어넘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위를 바라보는 저 뒷모습이 신경 쓰여서 견딜 수가 없다. 결국에는 슬그머니 옆자리로 이동해 정하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애써 웃음 짓고 있는 모습, 하지만 공허한 감정을 숨길 수는 없는 모양이다.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하나를 잃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물론 아직까지 한소라가 죽은 것은 아니었지만 정하얀에게는 굳어 있는 그녀의 모습이 죽어 있는 것과 비슷할 정도의 충격을 주고 있지 않을까.
나도 멘탈을 가다듬기가 힘들다. 매일을 함께했던 동료가 봉인되 굳어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건 정말로 힘든 일이다.
“괜, 괜찮을 거예요. 오빠.”
오히려 손을 꽉 잡아주며 나를 위로해 주는 모습.
“…….”
“그러니까. 울지 않, 않으셔도 돼요.”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나 보다.
“오, 오, 오빠 잘못이 아니에요.”
손을 들어 내 눈을 닦아주고 있는 정하얀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얘가 진짜 기특해졌어.’
달라져도 이렇게 달라질 수가 없다. 당장 난리를 피울 거라고 생각해 고려한 여러 가지 계획들을 곧바로 쓰레기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보라, 누가 이 모습을 보고 예전에 그 정하얀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내가 아무리 한소라를 아끼고 있었다고 한들, 정하얀보다 그녀를 아끼지는 않았다.
실상 내가 그녀를 위로해 줌이 옳다. 그 자그마한 손으로 발꿈치를 들어 올려 내 눈물을 닦아주는 모습은 다시 한번 투명한 눈물을 흘러내리게 했다.
우리 하얀이가 달라졌어요.
‘달라져도 진짜 제대로 달라졌어요.’
“제가 전, 전부 해결할 수 있어요.”
‘그래. 우리 하얀이가 전부 다 해결해야지. 외신 물리치고… 소라 되찾아야지.’
“제가 전부 해결할 거예요. 소, 소라를 꼭 되찾을 거예요.”
‘아암… 그렇고말고. 하얀이는 할 수 있을 거야. 분명히.’
“아직 죽은 게 아니니까요. 소라는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있으니까요.”
‘아이고,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었어? 장하네. 우리 하얀이.’
“소라도 힘들겠지만… 참을 수 있다고 했어요.”
‘그래. 우리 하얀이도 참을 수 있지?’
“그러니까… 울, 울지 마세요. 제… 제가 전부… 제가 전부…”
‘으응. 그래. 그래.’
“죽, 죽, 죽, 죽일 테니까.”
‘어… 죽여야지. 그러엄.’
“이렇게 만든 놈들을 전부… 전부 죽이고…. 네. 전, 전부 죽여야죠. 상상할 수도 없는 끔, 끔찍한 고통을… 죽을 때까지 안겨주고… 죽이고 또 죽이는 거예요.”
‘그래. 죽이는 게… 죽이는 게 좋기는 좋은 건데…’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게 후회스러울 정도의 고, 고, 고통을 안겨줄 거예요. 그, 그것 밖에는 속, 속죄할 길이 없어요. 저. 결, 결심했어요.”
‘무슨 결심?’
“이제는 더, 더, 더 이상… 뺏기지 않, 않을 거라고… 멍, 멍청하게 바라보고만 있지 않을 거라고. 안심하세요. 오, 오빠. 제가 지킬 테니까요. 제가 지킬 수 있어요. 소라가 준 이 힘으로… 우리 앞을 가로막는 더, 더러운 놈들을 전부 죽일 테니까.”
‘어?’
“우리 보금자리에 침범하려고 하는 멍, 멍청이들 히힛… 전부 죽여야지 머리통을 부숴 버리는 거예요. 우, 우리를 건드리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 그렇지? 소라야.”
‘뭐야.’
“소, 소라도 그렇게 하고 싶데요.”
‘아니, 시바. 뭐야. 한소라 뭐야. 너 진짜 정하얀 안에 있는 거 아니지? 시바. 있으면 빨리 나가. 시바.’
“소, 소라도 그렇게 할 거래요. 저. 저를 도와줄 거래요.”
‘그러니까. 소라가 어디에 있는데.’
“그, 그, 그리고 소라가요. 소라가…”
‘…….’
“꼭… 꼭 복수 해달라고 했어요. 자기를 이렇게 만든 놈… 놈들을 전부 찾아서… 죽, 죽여 달래요. 으응. 알, 알겠어. 소라야. 나… 나만 믿어. 다, 다 할 수 있어. 소라가, 소라가 나 천재라고 해줬잖아. 응. 할, 할 수 있을 거야.”
‘시바. 하얀이 몸에서 나가라. 이 악귀야. 악귀는 물러가라아!’
혹시나 억울하게 봉인 당한 한소라의 영혼이 정하얀 속으로 들어간 것은 아닐지 심각하게 고민해볼 정도였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타락한 베니고어를 향해 저주를 퍼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말로 한소라와 대화를 하는 것 같은 정하얀의 모습은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게 정하얀의 착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전, 전부 끝나고? 어? 어? 우, 우리 집에서 같, 같이 살고 싶다고? 안, 안 돼… 오, 오빠랑 내 보금자리인데… 소, 소라는 옆집에 살기로 했잖아. 옆, 옆방에 살면 안 되냐고? 옆집이랑… 별 차이도 없을 거라고? 그, 그럼 오, 오빠한테 끝나고 물, 물어볼게. 아마… 오빠도 허락해주지 않을까? 오, 오빠도… 소라 싫, 싫어하지는 않으니까. 으응… 대, 대신 나중에 다른 말 하면… 안, 안 돼? 나도 힘들게… 물어보는 거니까.”
“…….”
졸지에 신혼집에 한소라가 들어오게 생겼다. 정말로 한소라가 저걸 원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단호하게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나, 나중에 이야기해야지. 그… 그건… 지금 당장 어떻게 이야기해. 소, 소라도 빨리 몸을 되찾아야 하잖아. 그러니까… 으응… 그러니까 일단은 나중에 생각하자. 헤, 헤헤… 그지? 무섭지 않았지? 하나도 안… 안 아팠지?”
“…….”
점점 눈빛이 바뀌는 게 눈에 보인다. 이성을 잃으면 혼잣말을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거기에 한소라의 영혼이 업데이트 될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한소라 봉인계획이 무리수였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게 당연했다.
‘아냐. 시바. 원하는 건 얻었잖아. 하, 하얀이 각성했잖아.’
하지만 무섭다.
“나, 나 웃고 있어. 소라야. 헤헤… 웃, 웃고 있어. 소라가 웃으라고 해서… 소라도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마…. 금방… 금방 되돌아갈 수 있을 거야. 으응…”
한소라의 타락한 원념이 끊임없이 저주의 목소리를 내뱉고 있는 것일까.
“전부 죽, 죽여야지. 소, 소라는 눈 감고 있어도 돼. 복, 복수는 내가 해, 해줄게. 히힛… 헤헤헤…”
이거 시바 어떻게 하지?
‘그냥… 이대로 놔두는 게 더 좋은 건가?’
매뉴얼은 기억하고 있는 건가?
일단 외신 쓰레기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다는 것은 박수를 보낼 만한 부분이기는 했지만 전투 중에 돌발행동을 해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감돈다.
차라리 한소라를 원래대로 되돌리고 정하얀을 안정시키는 게 좋지 않을까?
‘이렇게 바로?’
당연하지만 무리수에 가깝다. 차라리 이 텐션을 그대로 끌고 가는 게 더 유리하다.
뭣 때문에 이 이벤트를 계속해서 미뤄왔는지 생각해 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정하얀이 돌발행동을 해올 거라는 건 애초부터 상정하고 있던 바였다. 슬그머니 앞을 바라보자 연신 중얼 거리는 정하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지금까지의 행동패턴으로 본다면 아마 곧바로 일을 터뜨릴 준비를 하지 않을까.
지팡이를 꼭 쥔 모습. 자꾸만 흔들리고 있는 동공, 분노로 인해 파들 파들 떨리는 입가, 억지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알 수 없는 곳을 응시하는 눈빛.
‘터질 거야.’
이건 터진다. 말린다면 말릴 수는 있겠지만 구태여 말리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신호탄은 쏘아졌으니까. 녀석들이 방아쇠를 당기는 것보다 우리가 방아쇠를 당기는 게 더 유리하다.
“그래. 하얀아. 소라를… 되찾는 거야.”
“네…. 소, 소, 소라를 되찾는 거예요. 소, 소라도 빨리 몸으로 되돌아가고 싶데요. 네. 꼭 자기를 이렇게 만든 나, 나쁜 놈을 찾아서… 지옥의 겁화로… 태, 태워 달래요. 평생동안… 평생동안…”
“…….”
“…….”
“잠깐… 잠깐 기다리고 있을래?”
“네, 네. 소라랑… 같이… 있을게요. 준, 준비도 하면서… 나, 나쁜 놈들을 죽일 준비를 해야죠.”
“매뉴얼은?”
“아… 아… 뭐, 뭐였지… 아! 소, 소, 소라가… 기억하고 있대요. 다… 다녀오세요. 오빠. 다녀오셔도 돼요. 저, 저도 여기서 따로… 준비해야 하니까.”
“…….”
곧바로 문을 박차고 나가자.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몇몇 이들이 시야에 비쳤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쪽을 기다리고 있는 김미영 팀장.
내 눈에 맺혀 있는 눈물을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인지 잠깐 동요하는 모습이었지만 이내 침착한 모습으로 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부 길드 마스터.”
“준비하세요. 팀장님.”
“어떤….”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상황실로 가서 대륙에 영상 송출할 준비 해주세요. 몇 시간 안으로 들어올 겁니다.”
“네. 혹시 안쪽에서는…”
“소라 씨가… 소라 씨가 당했습니다.”
“네?”
“지금부터 주변에 사람 출입시키지 말고 통제시키세요. 잠시 후에 하얀이가 밖으로 나올 겁니다. 굳이 말리실 필요 없고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시면 됩니다.”
“네. 그렇게 지시하겠습니다.”
“지금 곧바로 이동하겠습니다.”
“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계속해서 정하얀을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멍하니 한소라를 바라보며 계속 중얼거리는 모습, 굳어 있는 한소라와 대화를 하고 있는 모습은 살짝 소름이 끼치기는 했다.
자신의 몸을 살짝 공중으로 띄워, 뻗어 있는 한소라의 손을 꽉 잡으며 웃고 있는 얼굴이 보인다.
-이겨낼 수 있어. 내, 내가 같이 있잖아.
비정상적으로 목이 꺾여 있는 정하얀의 비주얼에 스멀스멀 공포가 올라오기는 했지만 저 장면은 감동적인 장면이라고 받아들이는 게 옳다.
봉인이 되어서까지 정하얀의 곁을 맴도는 한소라와 그런 한소라를 구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대마법사로 해석해야 감정 잡기가 수월해진다.
조금 무섭기는 했지만 확실히 감동적인 장면이라 할 만했다.
-얼마 걸리지 않을 거야. 조금만 참, 참, 참아… 헤… 끄윽… 히…히힛. 참을 수 있지?
한소라의 마지막 말이 기억에 남는지 자꾸만 눈물을 흩뿌리며 웃고 있는 모습은 틀림없이 가슴을 찡하게 만드는 장면일 것이다.
-히힛… 히히히힛…
조금 더 빠르게 이동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몇 시간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
다짜고짜 단상에 선 이후에는 곧바로 정면을 바라본다. 완벽하게 준비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천천히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한소라의 손을 아직까지 붙잡고 있는 정하얀을 망원경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숙인다. 소중한 동료를 지키지 못하는 책임감을 가슴에 얹으며, 눈물을 꾹 참으며 뒤죽박죽으로 흔들리는 감정을 정리한다.
두려움과 압박감, 죄책감과 공포, 나 자신에 대한 무능, 외신을 향한 분노, 그 모든 감정을 속으로 억누르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중한… 소중한 동료를 잃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