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7
회귀자 사용설명서 697화
마지막을 준비하자 (6)
“소중한 동료를 잃었습니다.”
곧바로 대륙 전체로 목소리가 퍼져 나간다. 아마 각 전역에 있는 거대한 여신의 거울을 모두 다 올려다보고 있지 않을까. 굳이 망원경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조금은 갑작스러울 수도 있는 타이밍, 본래 예정되어 있던 시간보다 훨씬 앞당겨 연설을 시작하고 있으니 많은 이가 의아해하고 있을 것이다. 당장 내 주위를 감싸고 있는 스텝들 역시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성스럽다는 표현조차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의 빛을 머금고 있는 빛기영의 모습이 두 눈에 들어온다.
조금 추레한 모습은 아닐까 걱정했던 것도 잠시, 세상의 모든 고통을 짊어진 것 같은 빛은, 굳이 다른 준비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장소에 어울리는 비주얼을 자랑하고 있었다.
‘병약 메이크업 안 하는 게 더 괜찮은데. 자연스러워요.’
굳은 결의를 다짐하고 있는 입과 절대로 쓰러지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두 눈.
예언의 날, 종말의 날이 곧 시작되려고 한다는 걸 모르고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천천히 망원경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군중들이 모이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모두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며 다가올 예언의 날을 준비하는 것이 두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나는 약간 뜸을 들인 이후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우리는 소중한 이들을 잃었습니다.”
“…….”
“아마 많은 분들이 저와 같을 것입니다. 이 대륙 위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소중한 이를 잃어버린 경험을 가지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악마 숭배자에게, 악마 소환사에게, 악마군단장들과 그들의 수족들에게, 전쟁에게, 고통과 증오와 분노에게, 소중한 이들을 잃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우리들은 살아남았습니다. 우리의 동료, 우리의 친우, 우리의 연인들이 지켜낸 생명의 대륙의 위에, 그들이 흩뿌린 피와 희생 덕분에, 그들이 뿌리내린 나무의 밑에서, 그들이 지켜낸 하늘의 아래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
“네, 그렇습니다. 현재의 대륙을 일군 것은 우리뿐만이 아닙니다. 고통스러웠던 역사 속에서 살아 숨 쉬던 영웅들과 모험가 길드에서 입으로 입으로 전해지는 전사들, 하루하루 힘겨운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과 이 대륙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자 하는 수많은 이들이 현재의 대륙을 일군 영웅입니다.”
“…….”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은 우리의 역사이며 고향입니다. 대륙민이나 이방인이나 이종족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의 소중한 이들은 우리의 미래를 위해 피를 흘렸고 우리를 이 자리까지 닿게 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습니다. 웃으며 안녕을 고했습니다.”
“…….”
“그들의 희생 덕분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은 모두 그들이 함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서로를 향해 칼을 들이밀고 있는 공화국과 교국, 왕국연합과 연방, 중립국과 이종족들, 서로를 적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우리들을 하나로 만든 것은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이들입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눈에 보였다. 공화국과 교국의 병사들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서로를 적이라고 불렀던 이들은 조금은 어색한 얼굴로 서로의 어깨를 두드렸다. 좋은 현상이다.
“그들의 희생 덕분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강대한 적과의 전투를, 예언의 날을 위해 싸움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 역시 그들의 희생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죽음과 희생에 우리는 많은 고통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우리를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동료를 잃어본 적이 있는 이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회색밖에 보이지 않는 전쟁터에서 그들은 예전의 동료들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파티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제, 던전에서 동료들이 달아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적들과 맞선 전사, 전우의 등 뒤를 지키기 위해 화살을 대신 맞은 검사.
이야기들은 많다. 내가 저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사연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대륙에서는 흔하게 벌어지는 사연이었다.
녀석들은 서로의 방패나 검들을 간단하게 부딪치거나 가슴에 손을 얹으며 현재 자신들을 이 땅 위에 서 있게 해준 동료들을 애도한다. 나 역시 다르지 않다.
‘작은 바위 길드의 송정욱.’
캐슬락 몬스터 웨이브 당시, 가장 전위에서 전우들을 위해 죽은 녀석이 갑작스레 생각난다.
그렇게 친한 동료도,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이도 아니었지만 캐슬락을 지키고 싶다는 녀석의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연방의 영웅들.’
벨리알 소환 사태 당시 그 누구보다 앞장서 스스로를 희생한 녀석들, 김현성이 끌고 있는 본대를 리무르아의 둥지로 보내기 위해 그 약한 몸으로 도노반을 막아섰던 영웅들이 있었다.
‘한소라.’
대륙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봉인하는 것을 선택한 그녀 역시 비슷한 마음이었을까.
그 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이들이 많을지도 모른다.
지금껏 있었던 수많은 전투에서, 죽을 확률이 높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 향하는 전사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현재의 대륙이 있을 수 있었다.
“그들의 희생 덕분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올바른 가치를,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준 것도 그들이었습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 것인지 그들은 행동함으로써 우리에게 보여주었고 그렇기에 저는 올바른 가치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전해준 교훈과 이야기는 우리를 바른길로 인도해 주는 등불이 되었습니다.”
“…….”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잘못된 선택을 한 이들도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도 배웠습니다. 왼편과 오른편, 어디에 서는 것이 좋은지, 빛과 어둠 어느 편에 서야 하는지, 그들조차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습니다. 이 대륙의 역사가 우리들을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
“그렇게! 그렇게 우리는 이곳 위에 서 있습니다. 작은 적에게도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던 우리는 지금 이렇게 성장해 이 자리에 있습니다.”
“…….”
“수많은 악마의 유혹과 욕망에 흔들렸던 우리들은 이제는 굳건히 각자 가지고 있는 신념과 가치를 되새기며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
“두려움과 공포에 떨었던 우리들은 그들이 전해준 용기와 불굴의 의지를 품에 안고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 …… "
내 말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들은 여전히 두렵고 무서울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싸우려는 이들은 마음을 한 번 더 다잡아야 했고 두려워하는 이들은 두려움을 떨쳐 내야 했다.
주변을 둘러보자. 떨고 있는 병사들의 떨림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할 수 있다는, 이겨 낼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공포가 쉽게 전염되는 것처럼 희망과 용기 역시 쉽게 전염된다.
“자유와 희망이 무엇인지 몰랐던 우리들은 이제는 희망을 품고 마지막 싸움을 앞두고 있습니다.”
물론 저마다의 생각은 다르다.
분명히 다를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를 이 자리까지 있게 한 우리의 동료, 연인, 가족들에게 우리가 이토록 성장했다는 걸 보여주어야 합니다. 당신들 덕분에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고, 당신들 때문에 이겨낼 수 있었다고 자신 있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희생, 그들의 유산을 헛된 일로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일어서십시오. 전투를 준비하십시오.”
전진기지에 배치된 병력이 천천히 움직이는 게 시야에 비쳐왔다. 본인들의 무기를 고쳐 잡고 올라가 있는 투구를 내린다.
다른 곳들도 다르지 않다. 화살을 매만지는 이들도 있었고 함께 싸울 전우의 등을 두드리는 전사들이 보인다. 지휘관들은 중대원들을 격려하고 있었고 사제들은 기도를 드리고 있다. 신념이 가득 찬 두 눈으로 대륙을 위해 죽을 준비를 하고 있다.
각자의 생각은 다르다. 하지만 대륙을 위해 싸우겠다는 마음은 모두가 같지 않을까. 다른 이들 역시 준비가 되어 있는지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재밌네.
차희라는 웃고 있다.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는 갑옷을 장비하며 무기를 꽉 쥐고 있다. 이미 한 번 벽을 뛰어넘은 그녀는 여느 때처럼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커다란 문을 열었다.
그녀가 싸울 드넓은 전장이 펼쳐진다. 온전히 그녀만을 위해 마련된 무대를 위에서 바라보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나는 더 강해질 수 있어.
차희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번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이지혜가 눈에 들어왔다.
-말은 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오빠? 스케줄은 좀 맞추고 변동 사항이 있으면 조금 말해주기라도 하지. 뭐, 사실 어찌 되든 상관없지만…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하니까 감회가 새롭네. 정말로 멀리 온 것 같은데, 생각해 보면 그렇지도 않아. 그렇죠?
이지혜는 잔을 들고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 설명하기 힘든 표정이다. 드디어 끝났구나, 혹은 이제 시작인가. 어떤 표정인지 종잡을 수 없지만 기대하는 것 같기는 했다.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노아의 방주 터지면 저 두고 가지 마요.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예요. 진짜.
멀지 않은 곳에는 오스칼이 있다. 그녀는 여신의 거울을 바라보고,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병사들을 바라보며 굳은 결의를 보내오고 있었다.
-나는 오스칼이야. 나는… 오스칼이다.
항상 사고만 치던 박덕구 역시 조금은 긴장한 듯한 표정이다. 안기모는 조용히 전장을 응시하고 있었고 김예리는 박덕구의 등을 두들겨 주고 있다.
-해낼 수 있을….
-할 수 있어. 지금까지. 아저씨. 잘 해왔으니까.
-네. 당연히 잘 해낼 수 있을 겁니다. 항상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나도 알아. 맨날. 중얼거리는 그거. 형님이 하면.
-나는… 나는 더 잘할 수 있다.
-그래. 그거.
박덕구는 웃었다. 본인의 안에 남아 있는 약간의 의심이 해결 된 듯 누군가가 전해준 말을 되새기며 가슴을 두드렸다.
선희영은 긴장한 것 같지 않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는 표정으로, 여느 사제와 다름없이 조용히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부디… 이겨낼 수 있기를.
겁이 많았던 엘레나 역시 이번만큼은 마음을 굳게 먹은 모양이다.
-엘룬이시여… 엘룬이시여. 저희들을 굽어살피소서. 종족의 미래, 아니 이 대륙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저에게 전해주시옵소서.
유아영은 무구들을 정리하며 김창렬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녀석은 아직도 혼란스러워하는 신입 길드원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이겨내지 못한 이들도 보인다. 라파엘은 여전히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손가락도 까닥하지 못한 채 여전히 무의식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조혜진은 조용히 눈물을 닦고 있다. 자꾸만 거울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아 내리고 있었다. 싸울 수 있는 상태가 맞는지 의심이 되기는 했지만 그녀는 방 한쪽에 놓여 있는 창을 들고 밖을 나선다.
-지킬 수 있어.
그녀가 정말로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카스가노 유노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뭔가를 바라보고 있다. 아마 미래가 바뀌었는지 확인하는 과정이 아닐까.
눈물이 멈추지 않는 것을 보니 그녀가 본 미래에 다른 변수는 생기지 않는 모양, 오스칼은 희생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고 했지만 누군가는 희생해야 했다.
-제발… 제발….
정하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시 한번 한소라의 손을 꽉 잡은 이후에 웃는 얼굴로 몸을 일으켜 어두워진 장소를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같이 가자. 소라야.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거대한 빛을 바라보며 천천히 마력을 일으키는 것이 보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천천히 열리고 있는 저 문을 잡아당기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당연하지만 굳이 막을 이유가 없다. 인류는 싸울 준비를 끝냈으니까.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저 악마들이 아니라 빛의 군대가 해야 할 일이다.
다시 한번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자. 지금 이 시점에 가장 마음이 복잡한 이를 바라보자. 어두운 방 안에서 밖으로 비치는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김현성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검붉은 눈을 한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기가 힘들다.
-책임.
뒤늦게 책임감이 돌아온 것인지 아니면 버리려고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녀석은 검은 날개를 활짝 펼쳤고 자신의 검을 허리춤에 매달았다. 김현성이 밖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전투준비! 전투준비!! 전 병력은 전투를 준비한다. 마지막 싸움을 준비한다!
누군가가 내지른 목소리에 김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헛된 죽음은 없다. 우리는 승리를 쟁취할 것이다. 무엇을 위해 싸우는 것인지 기억하라.
지휘관 중 한 명이 내지른 목소리에 김현성은 한 발자국을 더 내디뎠다.
-대륙을 위한 싸움이다. 우리를 굽어 살펴주시는 여신을 위한 싸움이야!
터져 나갈 것 같이 솟아오른 빛의 기둥을 응시하며 녀석은 자신의 시작과 끝을 매듭지으려 하고 있었다.
죽음을 각오한 병사들, 여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사제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영웅들과 겁을 먹은 소년병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자신이 지켜야 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전사들까지.
계속해서 커져 나가는 목소리, 점차적으로 뒤섞이기 시작한 인간들을 바라보며… 김현성은 작게 속삭였다.
-엿이나….
‘어?’
-엿이나 먹으라지.
‘아니야… 그러지 마. 너 이 새끼… 왜 그래. 왜 갑자기 또 둠 하려고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