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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698화 (689/1,590)

# 698

회귀자 사용설명서 698화

대륙을 지키자 성스러운 빛의 군대여(1)

‘시바, 나 지금 잘못 들은 거 맞지?’

순간적이었지만 감정이 흔들릴 뻔했다. 계속해서 슬픈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방송 사고를 낼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다른 이유 따위는 언급할 필요 없이 이 새끼가 둠 해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됐기 때문이다.

‘뭐야. 그런 분위기 아니었는데. 시바 감동적인 분위기였는데 또 왜 그래. 또 뭐가 문제야. 시바. 뭐가 문제인 건데.’

그동안 너무 김현성을 체크하지 않은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하… 이거 시바… 근데 신경을 어떻게 써? 바빠 죽겠는데.’

내면의 이기영과 싸우느라 제대로 신경 쓸 수 없었고 녀석 말고도 신경 쓸 일이 많았다.

물론 어느 정도 거리를 두기는 했다. 지금 와서 살갑게 대하고 여러 가지로 케어해 주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행동이지 않은가.

어차피 김현성은 이기영의 배때지에 칼을 쑤셔 넣어야 되는데… 굳이 현 상태에서 더 가까워질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의거한 행동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너무 신경을 안 쓴 것은 아닐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밖에 없는 부분, 혹시나 내가 김현성이 필사적으로 보낸 신호를 무시한 것이 아닐까.

뭔가 돌발 행동을 일으키기 전에 녀석이 보내온 구조 신호를 모른 척한 것이 아닐까.

쌓여 있는 메시지를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것 외에는 다른 말들을 아무것도 해오지 않았지만 김현성의 붉은색 눈빛이 서늘해 보인다.

‘안 돼. 현성아. 타락하고 막 둠 하고 그러면 안 돼.’

기영쌤과 함께하는 멘탈 클리닉에 녀석을 초대하는 게 좋지 않을까. 지금이라도 밀착 수업을 진행하는 게 좋지 않을까.

전부 다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도 당연했다.

몇 시간만 더 늦추는 것이 좋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해 보게 될 정도로 김현성은 불안해 보였다.

자조적인 미소를 띄우며 검을 들고는 있었지만 뭔가 사고를 칠 것처럼 느껴지지 않은가.

‘멘탈클리닉 들어가야겠다.’

라고 생각했지만 이걸 멈출 수 없는 게 문제.

-소, 소라야… 기, 기다려. 히히… 히힛. 내, 내가 전부 죽, 죽여줄게. 전부 죽여줄게.

‘하얀아. 시바. 잠깐만 기다려. 지금 뭔가 잘못된 것 같아.’

-조금 있으면 열릴 거야. 열어야지. 저기… 저기 문 안에 숨어 있을 거야. 소라를 그, 그렇게 만든 멍, 멍청이가… 숨어 있을 거라고… 열린다. 보, 보이지? 보이지, 소라야? 열… 열리고 있어! 열리고 있다고!

이미 마력을 내뿜으며 외신을 불러들이려고 하는 정하얀을 말릴 방법은 없다.

‘지혜 누나. 누나가 뭔가 해줘야 될 것 같아. 누나.’

-그럼… 슬슬 짐을 싸볼까? 연수야. 짐 챙겨놓은 것 중에 빠진 거 있나 확인 잘 했어?

-네, 언니! 근데 정말 도망치는 거 맞아요?

-그럼 가짜로 도망치겠어? 잘 봐. 노아의 방주 뜨는 거 잘 캐치하라고. 말은 저렇게 했지만 상황 꼬이면 우리 두고 갈 수도 있으니까.

‘시바. 누나. 벌써부터 튈 준비를 하면 어떻게 해.’

어차피 누나한테는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차희라뿐이다. 그녀가 이 사태를 수습해 줘야 한다.

“…….”

“…….”

-하하하하하하하핫.

틀렸어. 시바 벌써 맛탱이가 갔어. 하지만 나에게는 아직 믿을 만한 패가 남아 있지.

조혜진, 내 친구, 우리 혜진이. 너만 믿는다.

-절대로… 절대로 그렇게 되게 하지는 않을거야.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막겠어. 막아내고야 말겠어.

아니, 시바 막지 말라고 좀.

이상하다. 시바. 방금 전까지는 분명히 희망 편이었던 것 같았는데 갑자기 절망 편으로 장르가 전환된 것처럼 느껴진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온다. 하다 하다 박덕구 이 새끼는 나이스보트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저 돼지 새끼는 그냥 저 배를 사용할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삐. 삐. 삐. 삐이이이이이이이이-

‘뭐야. 시바. 야. 라파엘 갑자기 왜 그래. 라파엘 왜 그래. 야. 라파엘 죽는다. 시바. 라파엘 죽는다고.’

쟤 지옥에서 살아 돌아오는 거 아니었어?

뒤늦게 뛰어온 사제들이 라파엘의 위에 올라타 녀석의 심장에 충격을 주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때요?

-틀, 틀렸어요. 심장이… 정지했….

‘포기하지 마. 포기하지 말라구.’

-계속 신성력 집어넣어!

-이미 심장이 정지했어요. 이제는….

-상관없으니까! 못 살리면 우리도 죽는 거야. 언, 언데드로라도 만들어. 어떻게든 생명 장치만 유지해! 숨만 쉬게 만들란 말이야!

‘제발 포기하지 마 시발… 언데드로 만들지 마! 시바, 나 다 듣고 있다. 다 듣고 있다고.’

시작하기 전에 너네 갑자기 왜 이러는데. 이제 곧 싸워야 되는데 얘네 진짜 왜 그래.

대중들 앞에서 똥 씹은 표정을 보여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저도 모르게 자꾸만 표정이 구겨지려고 한다.

차라리 지금부터 튀는 게 좋지 않을까. 시바, 혹시 여기서 대륙 구하고 싶은 사람 나밖에 없나? 그런 건가? 뭐야. 시바 나는 지금 내기 때문에 그냥 튀지도 못하는데. 이런 게 어디 있어. 시바. 심지어 디아루기아 쪽도 상황이 안 좋아 보이잖아.

슬쩍 망원경으로 들여다보니 온갖 고성이 왔다 갔다 하는 도중, 설마 진짜로 전부 다 망한 것은 아닌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천천히 김현성을 다시 한번 응시해 봤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녀석은 천천히 성벽 위에서 여신의 거울을 바라볼 뿐이었다.

계속해서 내 얼굴이 하늘에 비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은 당연지사. 희생자들에 대한 묵념은 여기까지 이제는 싸워야 할 시간이라고 정치인들처럼 목소리 깔고 외쳐야 했지만 갑작스레 머리가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뭐야… 뭐야, 이 새끼… 진짜로 싸울 생각은 있는 건가?’

이렇게 의욕이 없어 보이는 표정은 처음이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이런 느낌이지 않은가.

‘뭐… 대륙이야…. 뭐… 구하면 구해지고 안 구해지면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어차피 내 관할도 아닌데.’

그나마 안심할 수 있었던 부분은 검을 들어 올리기는 들어 올리고 있다는 것. 적어도 피하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 억지로 전쟁터에 끌려온 것 같지 않은가.

뭐라도 말을 해야 했다. 녀석의 감정을 고취할 수 있는 말을 뭐라도 지껄여야 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어떤 것들을 겪어왔는지, 무엇을 위해 지금까지 이 자리에 있는 것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십시오. 마지막이 다가왔습니다. 결실을 맺어야 할 때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아픔을 극복하고 승리의 종을 울릴 때가 찾아왔습니다.”

‘현성아. 시바, 너 고생했잖아. 이제 마침표 찍어야지. 기나긴 여정이었잖아. 다시 생각해 봐.’

“또 다른 아픔을 겪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겨내는 법을 배웠습니다. 상처를 치유하고 견디는 방법을 지난날들을 통해 배웠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상처가 아문 자리는 더욱더 단단해지고 강해질 것입니다.”

‘생각해 봐.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어? 그래도 우리 잘 견뎌왔잖아. 현성이도 상처 많이 아물고 강해졌잖아. 그렇지?’

“우리의 하늘을 되찾아야 합니다.”

‘노을로 합의한 건 기억하지?’

“우리가 살아야 할 장소를 지켜내고 우리의 것을 쟁취해야 합니다.”

‘형이랑 같이 노을 보는 거 맞지?’

녀석의 얼굴을 제대로 살필 겨를도 없다.

-히히히히힛! 히히힛! 히히히힛! 다 죽이는 거야! 전, 전부 다!

하늘이 열리기 시작했으니까. 기어코 정하얀이 하늘을 열어버린 것이다.

차라리 외신이고 천사고 전부 다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사실 안 튀어나오는 거면 이번에도 내가 만든 천사랑 벨리알 도움으로 주작 한 번 멋지게 할 수 있는 거잖아.

정말로 안 들어오는 건 아닐까? 행복 회로를 힘겹게 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당연하지만 주변이 떠들썩해진다. 듣기 좋은 말로 포장해 어떻게든 전투 의지를 끌어올리고 있었지만 정말로 하늘이 열리자 굳은 표정의 이들이 눈에 보인다.

천사의 모습을 한 악마들과의 싸움에서 우리가 견딜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 바깥에서 보이는 강대한 기운에 정말로 맞서는 게 맞는지에 대한 공포,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이 그냥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느껴진다. 거대한 무언가가 손을 뻗고 있다는 사실이 보이기 시작한다. 심지어 우리 비밀병기는 싸울 의지도 없는 상황이란다.

“…….”

“…….”

‘튀자.’

내기에서는 지겠지만 언제나 손절은 냉혹하게.

그만둘 타이밍이라고 생각하면 곧바로 그만두는 것이 맞다. 노아의 방주를 준비하라는 듯 김미영 팀장에게 신호를 보내자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제가 먼저 앞장서겠습니다.”

‘나는 간다.’

“모두 안심하시고 전투에 임해주시기 바랍니다. 제 눈에는 승리 이외의 다른 글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 모든 고통과 굴레를 벗어 던져 버리고.’

“지켜야 할 것이 있을 때. 인류가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 보여줘야 합니다.”

‘행복을 찾아 떠납니다!’

“불가능한 싸움은 없습니다.”

‘이건 불가능한 싸움인 것 같기는 해.’

“저를 믿고 무기를 들어주세요. 제가 여러분과 함께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여러분보다 쓰러지겠습니다.”

‘아, 진짜 미안하다. 진짜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나도 몰랐지. 아… 시바 진짜 비둘기들 진짜 튀어나오잖아… 지금 빨리 튀어야겠잖아. 아 근데 이거 루시퍼는 어떻게 하지? 내기 내용이 뭐지?’

여러 가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 애들 챙겨서 여기 뜰 수 있으니 빨리빨리 준비하는 게 옳지 않은가.

슬쩍 망원경으로 바라보자 정말로 비둘기 떼들이 눈에 보였다. 확실히 이질적인 모습, 무언가 무기를 들고 날아오고 있었지만 지금 와서 관심을 가지는 것도 우습다.

‘진짜 오기는 왔네.’

딱 이 정도 느낌이라 할 만했다. 역시 사람은 욕심을 버려야 한다. 왜 이걸 이제야 깨달았을까.

절대로 손해 보기 싫어 꽉 붙들고 있는 걸 놓아버리자 개비스콘을 먹은 것처럼 속이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거늘….’

무엇이 그렇게 욕심이나 지금까지 자신의 몸을 희생시키며 살아왔던가. 더 이상 바라보고 있으면 미련만 생길 것 같아 완전히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콰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는 굉음과 함께 땅 바닥 전체가 울리기 시작한 것.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하얀이? 벌써 시작했나?’

가까스로 매뉴얼은 잊지 않았던 모양, 전투 시작 직후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 말 그대로 김현성이 없으면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하지만 정하얀이 없으면 전투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건 과장 하나 보태지 않은 발언이었고 그만큼 정하얀이 부여받은 롤은 대륙연합에게 최우선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

열심히 해주고 있다는 건 자랑스러웠지만 이만 소라를 챙기고 떠나야 할 타이밍. 어차피 금방 회복될 마력이겠지만 이제는 그만 쓰고 아끼라고 하고 싶다. 혹시나 노아의 방주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었으니까.

-전부… 전부 죽어!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소, 소라야… 보, 보이지? 보고 있지?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어….”

북쪽 너머로 떨어지는 것은 거대한 중력.

어마어마한 밀도로 만들어진 중력이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전투준비! 전투준비이!!!!!!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군 병력들의 함성 소리가 귀를 찢을 듯이 들려온다. 부여했던 롤 그대로. 애초에 공중에서 날아다니는 놈들과 공성전을 벌인다는 것부터가 성립되지 않는 이야기. 정하얀은 자신의 룰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이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 범위와 위력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정확히 전진기지를 기점으로 북쪽 전체가 가라앉고 있는 것이 보인다. 기가 차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늘을 날아 향하던 비둘기들은 땅바닥에 처박히며 발에 밟힌 개미가 되고 있지 않은가.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한 번 더 봐도 당황스러운 광경이다. 일부 중요지역만이 아니다. 대륙의 끝에서 대륙의 끝까지 마치 건반이 내려앉는 것처럼 내려앉고 있다. 차이점은 다시 올라오지 않는다는 것.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담은 마력은 비둘기의 날개를 완전히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

정하얀, 정하얀, 정하얀, 정하얀,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실제로도 보기도 했지만 말로 필요 없을 정도의 위용은 절로 내 입을 벌어지게 만들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인가?’

정말로 인간이 맞는 건가.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어떻게 사람이 대륙 전체에… 대륙 전체에….

‘말 도… 안 돼.’

정하얀이 보여준 위용, 저도 모르게 커다랗게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대륙을 지키자! 성스러운 빛의 군대여!”

거대한 함성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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