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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701화 (692/1,590)

< 701화 알고 있다(2) >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 거지?’

베니고어나 엘룬 역시 기억하지 못하는 걸 어째서 녀석이 기억할 수 있을까.

물론 확실히 결정된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는 단순한 가정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점점 기억하고 있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간단한 가정을 던진 것만으로도 모든 개연성이 성립되고 있다. 처음부터 싸우기 위해서 찾아온 것 같은 모습도, 또 컨트롤 타워의 모습도 말이다.

녀석들은 김현성이 회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2회 차의 인류가 자신들에게 저항할 것이라는 사실 역시 예상하고 있다.

‘완전히 기억하고 있는 건가?’

이 부분은 확실하지 않다. 아마 외신의 품에 있었기 때문에 회귀의 영향을 간접적으로 벗어난 것이 아닐까.

잃어버린 기억을 모종의 방법으로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당연하지만 인류에게는 안 좋은 소식. 회귀자라는 이점을 노린 것은 대륙뿐만이 아니다. 녀석들 역시 회귀자라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차원을 떠돌아다녔다는 것을 떠올려 보면 가지고 있는 이점이 이쪽보다 크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아주 조금이라도 대륙의 저항을 가정하고 있었다면….

인류에게는 커다란 위협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그렇다. 녀석들은 전면전을 피하고 있었고, 일부 지역을 대치 상태로 만들었다. 놈들의 컨트롤 타워는 그게 더 유리하다고 결정을 내렸다. 아예 싸우는 것을 포기한 성벽들도 눈에 보인다.

‘진짜 목적이 뭐야?’

아니, 목적은 이미 알고 있나. 본 것도 있고 들은 것도 있었으니까.

외신세력은 대륙을 관리하고자 했다. 인간의 개체 수를 줄이고 안정적으로 대륙을 자신의 발아래 두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 모두 입 발린 소리…. 어디까지나 녀석들이 표면적으로 취하고 있는 입장이었다.

‘놈들은 악마야.’

달콤한 말들로 인류를 유혹한 이후, 빨아먹을 거 전부 다 빨아먹고 빈껍데기만 남은 대륙이 쓸모가 없어지자 스스로 대륙멸망 스위치를 스스로 눌러버린 놈들이다.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도 매번 말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위선으로 가득 찬 악마들이며 죽어야 마땅한 놈들이라고.

-암 덩어리?

-그렇다. 붉은 짐승아. 그자는 썩은 암 덩어리다. 차원 자체에 존재하는 게 구역질이 날 정도로 위선으로 뭉쳐 있는 쓰레기, 교화의 여지마저 보이지 않은 괴물이며, 자신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위선자, 배신자, 달콤한 말로 사람들을 속이는 사기꾼이지.

-내 눈에는 네가 개소리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말이야. 남의 집에 갑자기 쳐들어온 침입자가 이쪽의 사정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할 입장은 아니지 않아?

-그대들의 보호자가 잘못되어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우리들은 응당 그러한 책임을 지고 있다. 잘못된 보호자를 밀어내고, 대륙과 그 아래 살아가는 생명체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책임 말이다.

-그건 네 입장이야. 누가 누구를 관리하고 누가 누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고? 개소리 집어치워. 애초에 그 책임은 누가 부여해 준 건데?

-조금 더 커다란 관점에서 생각해 보라 붉은 짐승아.

-뭐?

-대륙은 죽어가고 있다. 인간들은 서로를 죽이고….

-무슨 개소리를 할지 뻔히 보이는데 개똥철학을 중얼거릴 거라면 내려와 새끼야. 지금 이러고 있는 시간도 아까우니까.

‘아니야. 누나. 조금만 더 들어보자고. 진정해.’

-스스로를 좀 먹고 있다. 그들은 언제나 모든 걸 망쳐왔지. 역사가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자연의 섭리를 거부하고 부수며 종국에는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쓸데없는 욕망에 몸을 맡기고 더욱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를 바라지. 본능을 거부할 수 있는 척하지만 종국에는 거부하지 못한다. 대륙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들에게 멸종된 종족과 생물들을 떠올려 보라. 그들은 한없이 이기적이며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도 두려운 종족이다.

-귓구멍에 들어오지도 않는 다큐멘터리는 집어치워.

-우리는 인간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붉은 짐승아. 오히려 그들을 사랑하지.

“누나 조금만 더 들어봐. 어차피 분위기 식었잖아.”

-…….

-말 그대로 우리는 인간들을 사랑한다. 인간이라는 종족을 동경해. 그들은 욕망에 충실하고 추악하며 본능을 거부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당장 자기 자신을 내려다보라, 붉은 짐승아. 네가 가지고 있는 강함. 네가 쟁취한 힘. 그것이 바로 인간이 가진 가능성이다.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중력, 그리고 너희들이 마법이라고 부르는 마력의 선물을 보라. 그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힘이다. 우리는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빛을 조금 더 오랫동안 보고 싶을 뿐이다. 이 땅 위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가 더욱더 번영하고 균형을 유지하고 살았으면 한다. 인간들은 그렇게 살아가야 해.

-이미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

-겉보기에는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당장 몇백 년, 아니, 몇십 년 후를 바라봐도 그렇게 될 거라 단언할 수 있나? 아직 그대에게는 이른 이야기일 수도 있다만 그대들을 관리하는 이들 역시 안전하지 않은 이들이다. 그들 역시 불안전하며 감정에 흔들리는 이들이야. 어둠은 항상 그대들을 노리고 있고 빛은 그들로부터 그대들을 지켜줄 수 없다. 이토록 못난 보호자가 또 어디에 있을까.

-…….

-지금의 보호자는 그대들을 보호할 자격도, 능력도 없다. 일부는 그대들을 단순한 벌이로만 생각하고 있으며 그대들이 가지고 있는 개개인의 고통에 공감해 줄 수도 없지.

-입에 침이나 바르고 개소리 지껄여. 누가 누구에게 싸움을 걸고 있는지 안 보여?

-우리는 합리적이다. 절대다수를 위해 일부 소수의 희생은 언제나 일어나는 불가피한 이야기지. 우리를 비난하고 싶은 그 마음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가. 언제나 인간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나. 그뿐만이 아니다. 소수를 위해 다수를 희생시키기도 했고 현재를 위해 미래를 희생시키기도 했다. 일관성이 없는 것보다는 더욱더 합리적이지 않은가.

-…….

-병력을 거두어라. 무의미한 희생자를 내고 싶지 않은 것은 우리 역시 마찬가지. 우리의 검을 우리를 보호하기 위함이지 그대들을 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악마의 탈을 쓴 것이 아니다. 그대들의 새로운 보호자이며 구원자이다.

‘이 새끼 이거 뭐야?’

계속해서 대화를 듣고 있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다.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마음의 눈으로 보이는 성향은 선의의 혁명가.

대륙을 삼키러 온 녀석치고는 너무나도 정상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다. 대륙의 빛은 무능하고 어둠은 호시탐탐 이곳을 노리고 있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엘룬 쓰레기처럼 자신의 신자들을 돈벌이로 생각하는 녀석들 역시 존재한다.

녀석의 말에 나 역시 공감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커다란 관점에서 본다면 녀석의 사상에는 허점이 없다. 지금 당장은 인류가 하나가 된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이후에는 어떨까. 공통의 적이 사라지고 난 뒤에 인류는 또다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달려가지는 않을 거라 단언할 수 있다.

‘단순히 신성농장으로 사용하려고 한 게 아니었나?’

정말로 어떤 대의를 가지고 있는 건가?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목적은 개체 수를 조절해 인간들을 사육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참된 보호자로서의 자세를 갖추고 있지 않은가.

인간이 가진 부정적인 이면에 감춰져 있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고 그 가능성을 키워줄 생각을 하고 있으시단다. 못난 보호자를 밀어내고 안정적인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고 싶단다. 이 얼마나 달콤한 울림인가.

어쩌면 굶주리는 이들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전쟁과 다툼도 사라질 테고 모두가 천국에 온 것처럼 본인이 하고 싶은 일에 열중할 수도 있겠지. 안에 잠들어 있는 가능성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발견하며 새로운 방향으로 한 발자국 도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째서 김현성과 일부 대륙이 녀석들에게 저항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만약 놈들의 말이 거짓 없는 사실이라면….

이전에 한 생각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녀석들이 대륙을 신성농장으로 사용하려고 했다면 최대한 인간들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끊임없는 싸움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고 그로 인해 대륙이 붕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다른 관점도 존재한다.

‘저 말이 전부 다 개소리일 경우지.’

급진파의 악마들처럼 크게 한탕 치고 빠져나가려는 경우, 저 모든 발언이 거짓말일 경우, 진실은 인간 사육 농장이나 대륙의 멸망인 주제에 말만 번지르르하고 있을 경우다.

표정만 보면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에 겉과 속이 다른 놈들은 많다.

‘조금 건드려 볼까?’

조금 위험한 발언일 수도 있겠지만 건드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 느낌.

어째서 저렇게 말이 많아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눈앞에 있는 차희라를 대등한 존재로 인식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쪽에게는 호재로 작용했다고 판단해도 상관없으리라.

천천히 말을 내뱉자 차희라의 표정에 의문이 떠오른다. 어째서 이런 걸 알고 있는지, 어째서 지금 이걸 전하라고 하는 것인지 궁금증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내가 말한 대사를 입에 담는다.

-너희들은 한 번 실패했잖아?

-…….

-너희들은 실패했어. 그렇지 않아?

-…….

-말은 번지르르하게 해놨지만 결국에는 다른 목적이….

-실패한 것은 우리가 아니다.

-뭐?

-실패한 것은 우리가 아니야. 그… 그 더러운 암 덩어리 때문이었어. 그 개자식 때문이었단 말이다.

‘뭐야. 시바. 쟤 표정 왜 저래. 표정 관리해.’

-그 역겨운 놈을 믿은 것이 실수였다. 우리는 하지 않아도 되는 싸움을 했고, 마땅히 대륙에 살아가야 할 인간들을 우리의 손으로 죽였다. 그 개자식 때문이다. 우리가 실패한 것은 그 개자식 때문이야!

‘야. 너 왜 그래. 캐붕 일어났자너… 이미지 관리 좀 해.’

-그 거짓말을 일삼는 혓바닥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결코 우리의 실패가 아니야! 본래대로라면 모든 게 계획대로 돌아갔어야 했다. 모든 이들이 고통 없이 살아야 했고, 대륙은 번영해야 했다. 자연이 대륙을 채워야 했고 마력은 풍족해야 했다. 고민과 번뇌가 사라지고 대륙 위 모든 생명체는 그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을 누렸어야 했다.

‘케노보노 시바 다혈질이었어?’

-즐거움 대신 자리 잡은 것은 고통과 비명으로 가득 찬 삶이었고 자연 대신 자리 잡은 것은 역병과 죽은 자였다. 인간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죽였고 갈등은 커져 봉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야… 울지마. 왜 울어. 악어의 눈물 맞지? 맞다고 말해줘.’

-모든 걸 되돌리려고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걸 눈치챈 이후였지. 그 쓰레기가 마련한 무대에서 내 형제가 죽었고, 형제들이 아끼는 인간 역시 죽었다. 그 암 덩어리는 그 누구의 편도 아니다. 그 역겨운 쓰레기가… 그 쓰레기가 모든 걸 망쳤다는 말이다. 거짓된 천사와 거짓된 얼굴로, 거짓된 혓바닥과 거짓된 행동으로 대륙을 오물 사이로 던져 버렸다. 결코 우리의 실패가 아니다. 그런 마지막은….

-…….

-그런 마지막은 우리가 원한 것이 아니었어. 결코… 내가 보고 싶은 풍경이 아니었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

-아무것도 남지 않은 황폐한 이곳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야. 그런 소리 하니까 너네가 정의의 편 같자너… 왜 그래.’

-이번에는 절대로 그렇게 만들지 않겠다. 내 눈이 감기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엔딩은 맞이하게 하지 않겠다. 절대로 이 대륙을 그 암 덩어리의 손에 넘어가게 하지 않을 것이다. 아픈 일이라는 것도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우리는… 우리는 싸울 수밖에 없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출사표 던지고 있어. 시바.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

-대륙의 번영을 위해.

‘뭐야. 시바. 이 새끼 이거 진심인 거야?’

믿기지는 않지만 연기도 이 정도라면 수준급. 만약에, 아주 만약에 녀석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대륙의 진실이 아닐 가능성도 존재한다.

‘정말인가?’

대륙과 외신을 이간질해 서로 싸우게 했다고?

‘그럴 리가… 아무리 그래도 그럴 리가….’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갈등만을 유발시킨 것으로도 모자라 역병과 죽은 자로 대륙을 가득 채웠다고?

‘이건….’

김현성이 바라본 붉은 풍경을 만든 게… 녀석이었다고?

이미 쓰레기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구제할 방법이 없는 악독한 빌런이라는 사실도 이미 깨닫고 있었지만….

“넌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망가져 있었던 거냐. 진청.”

녀석의 악행은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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