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2화 소울 메이트 (1) >
“잘하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겠는데?”
“무슨 말이에요? 언니?”
“말 그대로야. 이렇게 치고받고 싸우지 않아도 일이 해결될 수도 있겠다고.”
“네?”
‘이 언니는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일을 너무 크게 벌여서 수습하는 데 애를 먹기야 먹겠지만 적당히 잘 넘어가지 않을까 싶어. 오빠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고… 이미 악마라고 이빨을 털어놨으니 몰아내는 연기를 한 이후에는 합의서 쓰고 좋게좋게 마무리될 수도 있다는 거지. 연수야, 언니 커피 좀. 한 잔 마시고 바로 연락해 봐야겠다.”
“지금 커피가 문제가 아니잖아요. 방금 무슨 말씀을 하신 거예요? 좋게좋게 넘어간다니… 이해가 잘 안 되는데….”
“방금 저 파란색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싸우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야. 아깝잖아. 인력 손실이라는 거. 더군다나 여기 모인 사람들은 대륙을 위해 진심으로 싸우는 사람들이고 상위모험가로 분류할 수 있는 고급 인력들인데…. 그렇다고 정신이 썩은 사람들도 아니지. 새로운 대륙으로 커다란 발걸음을 옮기기에 적절한 인재들이라 이거야. 이런 사람들이 희생된다는 건 가슴 아픈 일이지 않아? 쟤들이 정말로 원하는 게 대륙의 번영이라면 우리와 이해관계가 일치한다고 봐도 되는 거 아니야?”
“저는… 정말로 이해가 안 되거든요. 어떻게 결론이 그렇게 날 수 있는 건지. 방금 같은 걸 본 게 맞아요?”
“그럼. 왜 내가 이상한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 언니는….’
조금이지만 등 뒤로 소름이 돋는다.
‘뭐야? 도대체. 정말로? 정말로 그렇게 한다고?’
실소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당황스럽다.
‘이게 뭐야.’
눈에는 흔들림이 없다. 웃자고, 농담 삼아 던진 말도 아니었고 교묘하게 돌려 말하는 것도 아니다.
틀림없이 저 눈은 진지하게 저 개소리에 수긍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저들의 보호하고 관리한다는 걸 용인하고 인간을 울타리 안에 가두고 키우는 것에 동의하는 표정이다.
‘진심이야?’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조금 쓰레기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정말로 저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으니 말이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연수야. 그렇게 고민할 필요도 없다고…. 이렇게 생각해 봐. 뭐가 우리에게 더 도움이 되는가. 뭐가 우리에게 더욱더 이득을 가져다주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금방 답이 나올걸? 언니 그렇게 꼬인 사람은 아니야. 쟤들 말이 이상론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고.”
‘이상론이니 뭐니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윤리적으로 걸리는 부분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지.”
“그래서 이게… 이득이 된다는 거예요?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이건….”
“왜?”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언니.”
“연수야.”
“네?”
“검은백조에서 어땠어?”
“무슨 뜻이에요?”
“자유로운 것 같았어?”
“어떤 대답을 원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다른 의도가 없는 질문이라면 자유로웠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물론 무력 집단으로 분류할 수 있는 단체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통제가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특히 그랬다고 했었나.’
지혜 언니가 출범하기 전에는 그랬다고 들었던 적이 있다.
규율은 엄격했고 처벌 수위 역시 높았다. 실제로 길드에 피해를 끼친 길드원들이 실종됐다거나 사라졌다거나 하는 일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이루어졌었다.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한 일도 많이 일어났었고 길드 내 상하관계는 완벽하게 나누어져 있었다.
길드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박연주 님으로 길드 마스터가 바뀌고 난 이후, 정확히 말하면 이지혜가 그에 상응하는 권력을 손에 넣은 이후였다.
시스템은 변했다.
길드의 변화는 너무나도 빨라 이전 길드원들이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을 정도.
급진적인 변화에 우려를 표현하는 이들은 많았지만 새로운 시스템은 길드에 완벽하게 자리 잡았다.
자유로워진 분위기처럼 일의 능률은 올라갔고 이제는 붉은용병과 파란을 따라갈 수 없게 될 거라고 입을 모아 떠드는 이들의 입을 닥치게 만들었다.
그래. 결론을 말하자면 자유로웠다.
검은백조에서의 삶은 마치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고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완벽한 환경을 마련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을 때 이지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때? 정말로 자유로웠을까?”
“…….”
“정말로 검은백조의 길드원들이 자유로웠을까? 그렇게 느낀 게 아닐까?”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예요?”
“그냥. 한번 생각해 보자는 이야기야. 이런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가정이지. 울타리를 크게 만들면 양들은 본인들이 울타리 안에 있는지도 몰라. 아, 미안, 연수야. 네가 양이라는 소리는 아니야. 검은백조를 가지고 사회 실험을 해본 것도 아니고… 하지만 쟤들 말도 일리가 아예 없는 소리는 아니라 이거야. 물론 입장 차이야 존재하겠지. 우리가 허용할 수 있는 윤리적인 선이라는 것도 있을 테고… 그래서 필요한 게 합의라는 거잖아. 그렇지?”
“…….”
“울타리는 아주 커다랄 거야. 울타리를 친 놈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테고 인류는 저런 놈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를걸?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사실 하나만 기억하는 거야. 인류는 자유롭겠지. 번영을 누리며 자기 자신이 안전하고 자유롭다고 느끼겠지. 보호자들의 든든한 지원에 자원은 마를 날이 없을 거고….”
“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요.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소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검은백조랑은 달라요. 단순한 무력 단체에서 언니의 시스템이 성공했다고 한들 대륙에서도 같은 걸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아무리 언니라고는 해도….”
“나 혼자서는 불가능하지.”
“네. 그… 그렇….”
“하지만 이기영과 함께라면 가능해.”
‘미… 미친년.’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욕을 해버릴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언니 역시 울타리 안에….”
“아니야. 연수야. 나는 더 위에 있을 거야. 울타리를 공사한 노동자 비둘기들보다 더 높은 곳에. 나는 끌려다니는 쪽이 아니야. 끌고 다니는 쪽이지.”
‘미친년이야. 미친년이라고. 미친…미친년이라고.’
이런 여자가 뭐가 좋다고 지금까지 쫓아다녔을까. 순식간에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농담이었으면 좋겠다. 파란색의 천사가 단편적으로 말한 것만 듣고 어떻게 저기까지 생각이 닿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다.
항상 귀엽다고 느꼈던 얼굴이 일그러져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머리가 어지럽다.
확정된 것은 아니었지만 저렇게 미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도 한편으로는 경이롭다. 인류를 장기 말로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확실히 본인 이외의 인간들을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다. 저기 위에 있는 천사들이나 눈앞에 있는 이 여자나 다를 게 없다.
‘자기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있나? 다수의 인간보다 본인이 더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지 않다. 하지만 언니는 틀림없이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한 인간은 아니지만.
우월해질 수 있는 인간이라고.
어째서 저런 생각을 하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지구에서부터 그녀가 살아온 환경이 그녀를 저렇게 만든 것은 아닐까.
단편적으로밖에 듣지 못했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환경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이해하기 힘들어.’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까지 생겨나고 있지 않은가.
이 여자는….
나를….
하연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똑같이 장기 말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심으로 나를 아끼기는 했었나.
달콤한 말들에 진심이 조금이라도 섞여 있었을까? 애초에 같은 인간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자신답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결국에는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언, 언, 언니는…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냐고?”
“…….”
“조금 불안했어?”
불안하다, 불안하지 않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연수야.”
“네.”
“이거 하나만 기억해 줬으면 좋겠네.”
“…….”
“원래 우리 같은 사람일수록 자기 사람은 끔찍하게 아낀다는 거.”
“…….”
“대륙 1/3의 인간을 준다고 해도 우리 연수랑은 안 바꾸지. 아무리 대의가 중요하다고는 해도 사랑하는 사람과 바꿀 수야 있겠어? 저 비둘기들이 아무리 좋은 조건을 제시한다고 한들, 연수 없으면 안 해. 더 극단적으로 예를 들어서 만약 연수가 죽으면 언니는 포기할 수도 있어.”
“뭐… 뭐를요?”
“내가 가지고 있는 이상과 꿈, 그리고 야망.”
“…….”
“그렇게 만든 당사자뿐만이 아니라 그렇게 만든 세상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복수해 줄게. 그걸 원하는 건 아니지?”
“아… 아니에요.”
“내가 별생각 없이 던진 생각은 나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내가 아끼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해. 물론 합의가 될지 안 될지는 언니도 알 수 없지만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 아파하는 건 보기 싫거든. 전쟁터에서 연수가 다친다면 언니는 정말로 견디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그게 어떤 감정이야?’
묻는 게 무섭다.
대등한, 같은 인간으로서 말해주는 것인지, 아니면 애완동물이나 장기 말 같은 느낌으로 바라보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아니, 애초에 저 말이 진실이기는 한 건가? 단순히 듣기 좋으라고 한 립 서비스는 아닐까. 원래부터 이 사람은 거짓말을 달고 살았으니까.
천천히 눈을 바라보자 평소답지 않게 진지한 눈이 시야에 들어왔다.
뭐가 뭔지, 정말로 이 사람이 나쁜 건지 착한 건지도 알 수 없어. 혼란스럽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지혜의 눈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무척 기쁘게 웃고 있었다는 것.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얼굴로 미소 짓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언니 팔 아픈데. 무안하게 할래? 안 잡아 줄 거야?”
“아니요. 아니에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지금 손을 잡은 걸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손을 뻗는다.
가까운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뭐야.’
“어떻게….”
눈에 들어온 것은 갈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천사. 인간 같지 않은 아름다운 외형에 저도 모르게 숨이 턱 막혀왔다.
‘어떻게… 들어온 거지?’
본부 안에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지? 경비들은 뭐 하고 있었던 거지? 방어 시스템은?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지만 답은 나오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었으니까.
생각보다는 행동이 더 빠르다. 곧바로 무기를 뽑아 녀석에게 쇄도하는 것은 순식간.
살짝 뒤를 바라보자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언니의 표정이 시야에 비친다. 일그러진 얼굴로 중얼거리는 목소리도 눈에 들어온다.
“협상결렬이네. 아니… 그것보다는 여기서 살아 돌아갈 수 있을지가 문제인 것 같은데.”
‘언니는 내가 살려.’
갈색의 땋은 머리를 한 여자는 슬픈 표정으로 천천히 손을 뻗는다. 영창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당신은 위험한 인간입니다. 대륙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인간입니다.”
“그렇게 평가해 주니 영광이네. 이름이?”
“제 이름은 도미니온스. 부디 저를 용서하시길.”
“언니! 도망쳐! 언니!”
“얘는 여기 도망칠 데가 어디 있다고.”
“내 뒤로 숨어!”
“전부 소용없어. 연수야. 이미 늦은 게 빤히 보이는 데 뭐. 내가 아무리 전투에 문외한이라도 그 정도는 알아요. 도미니온스라고 했나? 그것보다 너 실수하는 거야. 아마 후회할걸? 지금의 선택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거야. 만약 네 목적이 정말로 대륙의 번영이라면 말이야.”
“…….”
“내가 말했지? 원래 우리 같은 놈들일수록 자기 사람이 뒈지는 꼴은 못 본다고….”
“언… 언니?”
“그 컨트롤프릭이 미쳐 날뛰는 꼴은 꼭 보고 싶었는데 그걸 못 보고 가게 생겼네. 저기 오빠. 보고 있지? 우리 사이에 이런 말 하기도 쑥스럽고 엄청 웃기기는 하지만 나는 정말로 동생을 사랑했어.”
“…….”
“반쯤은.”
“…….”
“아니, 반의반쯤이었던가.”
“…….”
“그럼 지옥에서 보자. 소울메이트.”
위이이이이이이이잉!
거대한 폭발이 공간을 꽉 메우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언니이!!”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