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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703화 (694/1,590)

< 703화 소울 메이트 (2) >

“어디서부터 이야기하면 좋을까…. 음… 안 해본 일이 없었어요. 지구에 있을 때.”

“…….”

“정말로 안 해본 일이 없었어요.”

“뭔 소리야, 누나. 갑자기 분위기 조성하면서 이빨 털어봐야 안 믿어.”

“왜? 우리는 이렇게 진지한 이야기는 하면 안 돼요?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 말이에요. 오빠가 믿든 안 믿든 상관 안 할래. 그냥 들어요.”

“지금까지 지구 이야기를 몇 번이나 한 줄 알아? 할 때마다 말이 바뀌었는데 내가 어떻게….”

“몰래카메라 하는 거 아니에요. 꼭 이런 이야기 나오면 피하려고 그러더라. 이것도 병이에요, 병. 오빠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걸 이런 식으로 어필할 필요는 없잖아요? 서로에 대해서 조금 더 이해하는 시간을 가져보자는데 그게 뭐 대단하고 엄청난 일이라고…. 한심하다, 진짜. 한심해. 이럴 때 보면 진짜 겁쟁이가 따로 없다니까. 피하지 마요. 나한테까지 정 안 붙이려고 할 필요는 없잖아. 이미 다 끝난 마당인데.”

“…….”

“아무튼 다시 이야기해 보자면 안 해본 일이 없어요. 정확히 무슨 일들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겠네요. 어차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테고, 제대로 믿지도 않을 테니까. 반쯤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요. 원래 과거라는 게 이야기로 풀다 보면 과장되는 부분이 많잖아요?”

“요점이 뭔데?”

“요점만 이야기하자고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니잖아. 오빠가 생각하기에 저는 어떤 사람 같아요?”

“…….”

“미친년으로 보이겠죠. 싸이코패스? 악당?”

“…….”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으니까. 드라마에 흔하게 나오는 악녀 일 번이나 구제할 길이 없는 인간쓰레기로 보고 있을 수도 있겠네요. 애초에 범죄자 비슷한 년이었으니 그랬을 수도 있겠네. 범죄자 비슷한 년이 아니라 범죄자였구나. 그렇게 생각했겠네. 아, 정곡 찔렸다는 표정 짓지 마요. 괜히 아닌 척, 미안해하는 척하지도 말고요. 나도 오빠를 그렇게 보고 있거든. 그리고 솔직히 내가 오빠보다는 쓰레기가 아니지.”

“…….”

“뭐 어때요? 마지막이 온 김에 진솔해진 건데. 지구에서도 별반 다를 바 없었어요. 남들이 바라보는 이지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는 위로 올라가고 싶었거든요. 지금도 다르지 않지만 계속, 계속 위로 올라가고 싶었다 이 말이에요. 제 기준으로도 나쁘지 않다는 위치까지 올라가 본 적도 있어요. 근데 나는 욕심이 끝이 없었나 봐. 위로 가면 더 위로 가고 싶고 이 풍경을 보면 또 다음 풍경을 보고 싶더라고.”

“…….”

“만족을 모르는 건지 원래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던 건지, 나름대로 선을 지키기야 했지만 남들 기준으로는 더러운 일을 하는 것처럼 보였을 거예요. 뭐 남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었어요. 나는 나 자신에게 긍지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더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길이, 눈앞에 길이 보였거든.”

“…….”

“열심히 줄을 잘 타고 있었고 가지고 있는 패도 많이 있었으니까. 자신감도 있었죠.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봐요.”

“…….”

“진짜 위에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게 아니었나 봐. 나한테는 허락된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나 봐. 새삼스레 깨달은 거 있죠. 아, 내가 여기까지 올라 갈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롯이 이 개자식들이 내가 이곳에 있는 걸 허락했기 때문이었구나. 위에 있는 몇몇 놈들이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허락한 거구나. 물론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지만 내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무대를 마련해 준 것은 위에 있는 놈들 이었구나. 애초에… 애초에 나한테는 허락된 자리가… 아니었던 거구나.”

“…….”

“주제넘었던 거죠. 주제넘었던 거예요. 내가 아무리 날고 기고 지랄을 한다고 해도 진짜 위에 있는 양반들의 눈에는 키 작은 계집애 한 명이 알랑거리는 거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이거죠. 그렇게 모든 걸 잃었어요. 순식간에 너무나도 어처구니없이 모든 걸 잃었다니까. 믿어져요? 모든 게 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 손 안에 이미 들어온 것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눈 한 번 깜빡하는 순간 모든 걸 잃었다고.”

“…….”

“발버둥 치고 내가 가지고 있는 패들을 쥐고 흔들기도 했지만 말 그대로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진짜 위에 있는 놈들이 보고 있는 것처럼 키 작은 계집애 한 명이 발광하는 꼴이었던 거죠. 제기랄. 씨발. 인정하기는 싫지만 현실이 그랬어요. 열 받아. 개 씨발! 콜록. 콜록.”

“…….”

“그래서 내가 도박을 안 해. 오빠.”

“…….”

“내 주제를 깨달아 버렸거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가진 게 달라. 누구는 노력하나 하지 않아도 공으로 얻는 걸, 어떤 놈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얻어버리거든. 그리고 그게 자신이 정말로 얻은 것인 양 떠든다 이거야. 환경이 준 걸, 본인이 얻은 것처럼 으스댄다고. 걔들 근처에서 그런 걸 바라보고 있으면 그게 얼마나 아니꼬운 줄 알아?”

“…….”

“그래서 오빠를 선택한 거야.”

“…….”

“오빠가 나를 선택한 게 아니라. 내가 오빠를 선택한 거라고. 오빠는 가지고 있었거든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조건, 가지고 있었잖아. 으스대지 않고 그 특별한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고 있었지. 여기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물론 그 얼굴이 내 타입이었다는 게 가장 커다란 이유이기는 했지만 이건 너무 속물적인 이유인 것처럼 보이니 빼도록 할게요.”

“보통 사람들은 앞전의 이유가 더 속물적이라고 생각해. 누나.”

“그래요? 그건 몰랐네. 콜록. 콜록.”

“…….”

“아무튼 그래요. 이지혜는 그렇게 살았어요. 그래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처음에 여기 왔을 때 웃었다니까. 기분이 좋아서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니까.”

“…….”

“처음 대륙에 떨어졌을 때, 튜토리얼 던전에 들어왔을 때, 다른 사람들이 울고 있었을 때, 저는 구석에서 한참을 웃었네요.”

“…….”

“거기서는 손에 쥘 수 없는 것들을 여기서는 쥘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지구에서 보지 못한 풍경을 여기서는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애초에 올라가 본 적이 없었으면 이런 거에 집착하지 않았으려나. 어때요, 오빠가 보기에는…. 잠깐이라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게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했을까? 내가 위에 올라가 보지 않았으면 이런 거에 집착하지 않았을까?”

“아니. 누나는 원래부터 권력에 미친 쓰레기였어. 태생이 그래.”

“말이 심하네. 콜록. 콜록. 콜록. 자기가… 콜록. 콜록. 더 쓰레기면서.”

“…….”

“…….”

“오빠는 어때요. 뭐 할 이야기 없어요?”

“나는 없어. 누나.”

“굳이 캐묻는 건 조금 아닌 것 같고… 사연과 비밀이 많은 남자는 매력적이야.”

“누나 남자 취향 에반거 알고 있지?”

“남자 취향만 구릴 것 같아요? 콜록. 콜록.”

“…….”

“…….”

“괜찮냐는 말을… 한마디도 안 해 주네. 이 쓰레기는.”

“누가 봐도 괜찮지 않아 보이니까.”

“그래요? 나… 이대로 죽나 봐.”

“…….”

“마무리는 조금 멋있게 하고 싶었는데 역시 사람이 뒈질 때가 되니 말이 많아지네요. 오빠는 어때요. 눈물이 나오기는 해요?”

“아니.”

“질리도록 쓰고 있는 그 가면 벗어 봐요. 지금 울고 있는 것 같은데. 목이 메이는 것 같은데?”

“안 울어.”

“그래도 마지막 소원인데… 한 번 쯤은 벗어주지 그래요?”

“…….”

“벗으라고… 새끼야.”

“…….”

“…….”

“다행이네.”

“뭐가.”

“당연히 들어가 있을 거라고 확신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불안했거든, 내가 오빠한테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이기영의 사람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 있을까. 콜록. 콜록. 불안했지만 지금 보니 일말의 영향이라도 있었던 것 같아서. 아. 다시 가면 써도 돼. 콜록. 콜록. 섹시하기는 한데 우는 모습을 보는 건 역시 별로네.”

“…….”

“오빠가 아끼는 그 돼지 새끼. 그 돼지 새끼랑… 누구… 였더라. 아. 그… 그 일본 여자… 그 맹인… 카스가노 뭐시기… 만큼인 거네. 나도 걔들만큼은 지분을 가져간 거네. 아니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네. 나는 욕심이 많아서 그 이상이었으면 좋겠어. 아니, 돼지 새끼만큼은 아닌가? 진짜 질린다. 그 돼지 죽은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아니, 됐다. 돼지 이야기는 안 할래. 모처럼 이 이지혜의 턴인데… 자꾸 돼지 이야기하면 오빠 또 죽은 돼지 생각할 거잖아. 콜록. 콜록. 우리 이야기해요. 즐거웠죠? 우리.”

“즐거웠어. 누나. 정말로.”

“죽여주는 한 쌍이었잖아. 소울 메이트. 영혼의 단짝. 이렇게 화끈하게 개판을 칠 수 있었다는 것도 정말 재미있었… 콜록. 콜록.”

“…….”

“재미있었지. 우리가 이 정도까지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누가 알았겠어. 저 위에 있는 놈들도 몰랐을걸. 신성제국을 부수고 공화국을 부수고 깡그리 쓸어버렸잖아. 본인들이 신이라고 생각하는 놈들의 뒤통수도 크게 한 방 먹여줬지. 우리 둘이 이 정도까지 해낼 수 있을지 아마 아무도 몰랐을 거야. 물론 오빠 덕이 크기는 했지만 그래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고.”

“아니야. 누나.”

“…….”

“나 때문이 아니야. 누나의 덕이 컸지. 누나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야. 누나는 천재고 위에 서 있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야. 믿어져?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누나가 위에 있는 개자식들한테 엿을 먹인 거라고. 누나는 내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게 아니야. 오히려 내가 누나의 덕을 본 거지.”

“말 이라도… 콜록… 콜록… 기쁘네.”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그렇게 말해주니… 행복해. 오빠.”

“처음 여단에 왔을 때 나를 받으라고 한 것도 누나였고 수차례나 내 목숨을 구한 것도 누나였어. 우리 계획의 반 이상은 누나가 주도한 것도 알고 있잖아. 이미 가는 양반 듣기 좋으라고 떠드는 개소리가 아니야. 다시 한번 말하건대 누나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야.”

“기쁘다. 그렇게… 생각해 주니 너무… 기뻐. 콜록. 콜록.”

“…….”

“…….”

“그런 말은… 살아 있을 때 많이 해줬으면… 더 좋았을 걸. 이 쓰레기 새끼.”

“…….”

“가면… 가면 쓰게 해줘. 가면 쓴 채로 이렇게… 갈래. 여단의 이지혜는 역시 이렇게 가야지.”

“…….”

“그래. 그렇게. 졸리다, 기영아. 누나 졸려. 이제 정말로 됐나… 콜록… 콜록… 끝인가 봐. 후회는 없… 없어. 정말로 없어. 내가… 내가 누군지 보여줄 수 있었으니까.”

“…….”

“사… 사랑….”

“…….”

“콜록. 콜록. 콜록… 사… 랑해. 동생… 내 소울 메이트. 지옥에서… 지옥에서 보자.”

“나도 사랑해. 누나. 내 영혼의 단짝.”

“매번 하던… 키스. 콜록. 콜록.”

툭.

“다음… 다음… 다음 계획은?”

“복수. 그리고… 완전한 멸망.”

“하… 하….”

“…….”

“하… 하하하… 하하.”

“…….”

“하하…콜록. 콜록. 하하하하하.”

“…….”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

“역시… 나는….”

“…….”

“야망 있는 남자가 취향….”

“…….”

“취향… 이라니까.”

“…….”

“…….”

“누나?”

“…….”

“누나?”

“…….”

툭.

“…….”

“사랑해.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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