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704화 (695/1,590)

< 704화 소울 메이트(3) >

“조금만 기다려.”

“…….”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

‘뭐?’

“거의 다 왔어.”

‘뭐라고?’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악.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순식간에 꿈에서 깬 듯한 감각이 온몸을 감싸 안는다. 그것 외에도 여러 가지 장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 지나가는 것들은 뭐가 뭔지도 제대로 인식하기가 힘들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박덕구의 마지막을 봤을 때처럼 눈물이 계속해서 흐르고 있다는 것.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뭐야. 이게… 갑자기.’

정황상 1회 차의 이야기라는 건 알 수 있었지만 방금 봤던 것들에 대해 자세히 파고들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갑작스레 검은색 세계로 빨려 들어가기 전에 일어났던 상황이 떠올랐던 탓이다.

희라 누나와 케루빔의 대화를 듣고 있는 도중이었다. 이상한 비둘기 하나가 지혜 누나가 있는 곳에 모습을 드러냈고 망원경으로 그쪽을 바라보고 있던 타이밍이었다.

‘그럼 지옥에서 보자. 소울 메이트.’

본격적으로 이상한 게 보인 시점은 이지혜의 목소리가 들려온 직후였다.

‘제기랄.’

사태를 파악한 이후에 허겁지겁 다시 그녀를 들여다본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아니, 머리가 어지러워 내가 어딜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보고 있는 게 1회 차의 검은색 세계인지, 아니면 현실인지도 알 수가 없었지만 일단은 현재 이지혜의 상태가 어떤지부터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1회 차의 일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기에는 내가 너무 정신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여신의 거울에 보이는 화면은 거대한 폭발음과 뿌연 먼지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망원경으로도 마찬가지였다.

“시발. 시발. 시발.”

이지혜가 죽어? 죽은 건 아니지? 그렇지?

어떻게 들어간 거지?

‘도미니온스?’

그런 능력이 있었다는 건 못 들었는데.

정하얀과 같은 순간 이동 능력이라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에야 이지혜가 있는 곳에 들어간 것은 불가능하다.

아니, 순간 이동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상황실 주변에 걸쳐져 있는 방어시스템을 뚫고 들어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고, 정말로 벌어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저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생각해 보면 이상하지도 않다고 느껴진다.

방심했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적어도 나와 이지혜가 있는 상황실은 절대로 적의 침략을 허용하지 않을 거라 자신하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이곳 역시 도미니온스라는 비둘기의 목표물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가정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이 상황에 나 살자고 몸을 피할 수 있겠는가.

“지혜 누나! 들려? 들려?”

여기서 들릴 리가 없지만 자신도 모르게 커다랗게 목소리를 내볼 정도.

머리가 하얀색으로 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몸은 점점 더 초조하다는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만약 이지혜가 죽는다면… 아니, 이미 죽었다면 어떨지에 대해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입이 꾹 다물어졌다.

‘제기랄. 시발.’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지혜 누나. (0/1)]

[이지혜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어 이지혜는 보상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개 시발… 개 시발!’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이지혜 들려? 들리면 대답해. (0/1)]

[이지혜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어 이지혜는 보상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이지혜! 이지혜!”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대답하라고 이 미친년아! 빨리 대답하라고! (0/1)]

[이지혜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어 이지혜는 보상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이지혜! 대답하라고 했잖아! 이 머저리 같은 년!”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쾅 하고 발로 차버렸지만 아직까지도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고 있다.

‘어떻게 하지?’

뭘 어떻게 해.

‘이지혜가 죽으면?’

이전이랑 똑같이.

‘뭐가 이전이랑 똑같은데.’

내 것인지 알 수 없는 절망감이 순식간에 온몸을 감싸 안는다. 머리는 어지럽고 몸은 무기력하다.

아까 흘린 눈물은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있었고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다.

사방에서 들어오는 비둘기들이 화면에 비치고 있다. 집중하고 다음 명령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나 자신의 심장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자기. 방금 뭐였어? 나 다음 명령 기다리고 있는데. 지금 무슨… 신경 안 써도 되는 거지? 싸워? 이 새끼 죽여도 돼? 자꾸 개소리 뱉는 게 아니꼬운데.

-부길드마스터. 다음에는….

-명예추기경님. 현재 적들이 계속해서 몰려들어 오고 있습니다.

-방금 일어난 폭발에 대해서… 관리위원장님. 관리위원장님?

“대답하라고!”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지혜 누나. 죽지 마. 지혜 누나. (0/1)]

[이지혜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어 이지혜는 보상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지? 이거 어떻게 하면 좋은 거지?’

머리가 뜨거워지기보다는 점점 차가워진다. 다른 생각을 아예 할 수 없을 정도로 급속도로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지른 나에게 실소가 나올 지경.

조용히 허벅지를 두드리며 다음 계획에 대해서 떠올리고 있었지만 머리가 점점 더 차가워지기 시작한다.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이지혜. (0/1)]

거대한 무언가가 위에서부터 나를 덮쳐오는 것 같다. 호흡이 가빠지고 정신이 없다. 눈물은 마르지 않고 자꾸만 매몰되는 것만 같다. 눈 깜빡할 사이에 어두운 곳으로 내리 떨어지는 기분이라 이 짓거리를 멈춰야겠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시바. 이 정도면 만족했겠지. 뭐.’

이 정도면 리액션이면 이지혜 역시 충분히 만족했으리라.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구란 거 아니까 그냥 일어나. 누나. 진짜. 재미없어. 제발 이런 짓 좀 하지 마. (0/1)]

[이지혜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어 이지혜는 보상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

‘지옥에서 보자 소울 메이트는 개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진짜.’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아니, 진짜. 그만 좀 해. 무슨 쌍팔년도도 아니고 이상한 연출 자제 좀 합시다. 진짜. (0/1)]

[이지혜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어 이지혜는 보상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아직까지도 아무 반응이 없는 모습에 당황스러워서 헛웃음이 나온다.

‘이지혜가 여기서 죽어?’

김현성의 가방 쇼핑을 끊는다는 소리보다 더 설득력 없는 소리다. 이토 소우타가 베니고어의 독실한 신자라는 것보다 더 설득력 없다.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는 것 또한 실소가 나온다. 무려 1회 차의 가면쓰레기다.

세상을 완전히 나락으로 빠뜨렸던 빌런 중에 빌런 이였고, 항상 본인 빠져나갈 구멍은 기가 막히게 만들어 놓았던 쓰레기였다.

외신과 인간의 뒤통수를 때리다 못해 아주 너덜너덜하게 만들어버린 장본인이 아니었던가.

물론 1회 차 이지혜와 2회 차 이지혜의 성장 방향이나 목표가 달라 어느 정도는 나비효과를 받았다고 한들 그래도 가면쓰레기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가면쓰레기로 태어났고 겨우 이 정도로 죽을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 당연히….

‘보험을 들어 놨겠지.’

나도 그녀에게 숨기는 것이 있듯이 그녀도 나에게 숨기는 것이 있다. 백 퍼센트 장담할 수 있다.

만약 이지혜가 보험을 들어 놓지 않았다면 지금 당장 옥상에서 몸을 던져도 상관이 없을 정도였다. 솔직히 걱정스럽지도 않다.

‘누나 그렇게 멍청한 사람 아니지 않아?’

애초에 이 쇼에 내가 걸려들 거라고 생각한 것도 우스워. 하려면 조금 제대로 해야지 이게 뭐야.

처음에 시스템이 뚫린 것도 지가 방어막도 풀어버린 거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닌가. 뭘 계획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빨리 예X전생 하세요. 진짜. 지옥에서 빨리 살아 돌아오라고 헛소리하지 말고 진짜.

‘이거 조혜진 때문 아니야?’

그건 좀 너무 했지.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설득력 없다. 조혜진한테 뭐 하나 제대로 보여준다고 호언장담하던 목소리가 떠오르기는 했지만 방어시스템에 일부러 구멍을 내서 적을 안으로 들일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다. 자기 밑천을 보인다는 건 이지혜로서도 환영할 만한 상황이 아닐 테니까.

아마 도미니온스라는 녀석이 방어시스템을 뚫고 침입할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이지혜가 빠른 판단력으로 시나리오를 짰다는 게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와, 고새를 못 참고 시나리오를 써? 얘도 진짜 놀랍다. 진짜 너무 놀라워.’

“아니, 왜 근데 안 나와.”

애초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지만 아직까지도 다른 액션이 없다.

“아, 진짜 거짓말하지 말고 나오라고. 사람 초조하게 만들지 말고.”

아직도 다른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야! 진짜 시바! 하지 말라고! 진짜! 하지 마! 누나!”

새끼손톱 때 정도의 불안감이 살짝 마음을 뒤흔들었을 때였다.

-어휴….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

-좀 속아주지. 오빠도 정말 쓰레기야. 이 정도까지 했는데 조금이라도 불안해하면 어디 덧나나?

-언, 언니?

-연수야. 몸으로 받아주겠다고 생각한 건 너무 기특하고 좋은데. 언니 너무 무거워. 조금 떨어질래? 아, 그리고 오빠. 혹시 의심할까 봐 하는 소린데 이거 주작한 거 아니에요. 저도 깜짝 놀랐다니까요. 이런 것까지 주작할 이유도 없으니까 괜한 의심하지 마요. 내가 오빠 같은 줄 아는 건 아니죠? 아, 그나저나 진짜 신기한 비둘기가 다 있네. 이게 뚫릴 수도 있는 상황을 가정하기는 했지만 진짜였을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어떻게 들어왔는지 너무 궁금한데 그건 차근차근히 들어보면 될 것 같고….

-언니… 지금… 지금 뭐예요?

-뭐긴, 언니가 연수를 지켜준 거지.

-언니가 어떻게….

-원래 언니 같은 사람은 비밀이 많은 법이야. 그게 더 매력 있잖니. 잠깐 떨어질래? 아니, 너무 떨어지지는 말고 연수도 전투 준비해야지.

-어? 어? 언니….

-사람이라는 게 참 재미있지. 계획이라는 게 꼬이게 마련이야. 세상사 자기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요.

이지혜는 웃었다.

-저기 아줌마. 왜 여기에 찾아온 줄은 모르겠는데. 당신 실수한 거야.

-역시 그랬군.

의자에 거만하게 앉은 모양새는 어딘가의 높은 양반처럼 보인다. 도미니온스를 내려다보는 모습에 나도 입꼬리를 올리게 된다.

-원래 이런 성격은 아니었는데 험한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런 일이 있을 것 같더라고. 원래 나 같은 여자가 그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미끄러질 걸 생각하면 계속 계속 대비할 수밖에 없잖아. 힘이라는 거 가질 수도 없을 것 같았고 현장에서 뛰는 체질도 아니라 그다지 신경 쓰고 있지는 않았지만 보험을 들어두기를 잘했네. 오빠처럼 주사위를 던져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언니….

틀림없이 위에 선 자의 표정이었다. 대충 눈으로 보기에도 자기 자신에게 취한 것이 보일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약간이지만 이지혜의 심정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끊임없이 위에 올라가고 싶어 하는 그녀의 욕망이 분출되는 순간, 나도 그녀와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

그녀는 저 순간을 즐기고 있다. 틀림없이 저런 순간을 위해 위에 서는 것에 집착하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다.

신이라고 불려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의 존재를 본인의 밑에서 발이나 핥고 있는 쓰레기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적어도 눈빛만 보면 그런 것 같다.

넌 그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수 없다는 듯, 곧 너는 땅바닥을 기게 될 것이라는 듯, 네가 몇 분 뒤에도 그런 표정을 나에게 보낼 수 있겠냐는 듯한 얼굴로 위대한 존재에게 비웃음을 보내고 있었다.

‘패가 좋긴 좋은가 봐.’

그렇게.

1회 차의 가면 빌런은 입을 열었다.

-나와도 돼. 로노베.

내 입으로 말하기에는 뭣 하지만,

-나의 작고 귀여운 주인님의 뜻대로.

정말로 쓰레기 같은 얼굴이었다.

-구두라도 핥아볼래? 그럼 용서해 줄지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