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7화 소울 메이트(6) >
가장 먼저 시야에 비친 것은 김현성의 당황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도대체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 눈에 보인다. 내가 김현성이었어도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타락? 친우? 이해자? 악마와의 계약?’
무슨 개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김현성은 1회 차에 악마와 계약한 적이 없었다.
루시퍼와 계약한 것은 이번 회차가 처음이었고 그마저도 라파엘 사태가 아니었더라면 계약하지 않았을 것이다. 녀석은 올곧은 영혼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1회 차에는 특히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해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자세한 사정을 알 방법은 없었지만 녀석이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물론 김현성의 입장에서는 굳이 귀 기울여 들어볼 필요가 없는 소리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잔뜩 흥분한 채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놈에게 어떻게 귀를 기울일 수가 있을까.
애초에 적이기도 했고 정상적으로 보이지도 않았으니 미친놈이 미친 소리를 지껄이는구나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한 가지 확실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쓰로누스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싶다. 김현성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가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외신세력이 1회 차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게 분명하리라. 김현성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많은 대화를 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1회 차 자신의 반대편에 있던 녀석을 바라보니 생각이 많아진 모양이다.
-기억하고 있는 건가. 쓰로누스.
뭐 대화를 시도한다고 하더라도 딱 이 정도겠지.
‘일단 카리스마 먹어주고요.’
-그렇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 이 더러운 기만자여.
-해야 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너는 죽을 것이다.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 현성이 싸늘하네. 1회 차에는 그랬어?’
-나는 모든 걸 기억하고 있다. 죽지도 않고 이렇게 살아 있지. 더러운 기만자. 내 질문에 대답해라. 김현성. 그는 어디에 있지?
-…….
-그는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라파엘을 바라보는 표정과 유사하기는 했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정말로 오래된 적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그런 식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실제로도 정적이었을 것이다.
1회 차에 있었던 전쟁은 무척이나 길었다. 매번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각 진영의 중심이었던 그들은 서로를 향해 검을 들이밀었을 거라는 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그려진다.
결국 최후의 승자는 김현성으로 결정됐지만 그 과정에는 무척이나 많은 일이 있었을 거라 장담할 수 있다.
‘지독한 인연이라고 봐도 되는 건가?’
-…….
-모르는 척하지 마라! 역겨운 악마의 하수인아. 네 검은 날개가 말해주고 있다. 네놈이었어. 모든 원흉이 바로 네놈이었단 말이다.
-못 본 사이에 머저리가 됐군.
김현성의 말대로 정말로 머저리처럼 행동하고 있다.
-닥쳐. 세라핌.
-뭐?
-입 다물어라. 세라핌.
-…….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세라핌. 네 눈에도 이 더러운 기만자의 모습이… 아니, 아니야. 네 생각이 틀려. 세라핌. 그는 우리를 믿어줬어. 우리도 그를 믿어줘야만 해. 그가 고통받고 있을지도 몰라. 끔찍한 꼴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아직도 그가 배신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저 기만자의 모습을 보고도 그런 생각을….
-…….
‘갑자기 웬 또라이 새끼가 나와서….’
이제는 혼잣말을 하는 모습이 가관이다. 눈을 보니 제대로 알겠다. 이 새끼는 제정신이 아니다. 무슨 알콜 중독자 같은 눈을 하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네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냐, 세라핌! 그와 함께하고 싶다고 말한 것은 너였다. 그를 그렇게나 따르던 네가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을….
정황상 세라핌이라는 비둘기와 대화를 나누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지만….
‘1인 전술은 세라핌을 통해서 하는 건가?’
점점 더 험악해지는 분위기 때문에 제대로 집중을 할 수가 없다.
-제정신이 아닌 것은 내가 아니라 너다, 세라핌. 너야말로 직시해야 할 것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어! 다시 한번만 그 입을 놀린다면….
‘뭐야. 이 새끼 왜 이래. 무서워. 현성아 형 지켜 줄 거지?’
-네가 하지 않겠다면… 혼자서라도 되찾을 것이다. 혼자서라도!
미친 비둘기가 쇄도하며 김현성을 향해 검을 내뻗는 것은 순식간이다.
약 먹을 때가 된 녀석의 갑작스러운 발작에 김현성도 조금 긴장했는지 검을 꺼내 들었다.
은색과 검은색이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누는 것이 눈에 보인다.
-김현성!!
-쓰로누스!!
소년 만화처럼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검을 부딪치는 장면은 사진으로 한 장 찍어놓고 싶기는 했지만 갑작스레 전환되는 장면에 머리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콰아아아아아앙!
굉음이 들려오고 빛이 퍼져 나간 직후에 정신이 뒤흔들린다.
‘또?’
또야?
이지혜의 마지막 기억을 봤을 때처럼 다른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각이 온몸에 스며든다. 눈 깜빡할 사이에 시야가 전환된다.
찰나였지만 긴 시간처럼 느껴지는 감각이 사라진 이후, 시야에 비치는 것은 이미 한 차례 전쟁이 끝난 것만 같이 느껴지는 장소였다.
폐허가 되어 쓰러진 건물에 앉아 있었던 인형은 가면을 쓴 남자와 방금까지 보고 있었던 쓰로누스.
이건 1회 차의 기억이다.
‘아니 뭐 볼 게 있다고 또 보여주고 난리야.’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지만 중간에 끊을 수가 없는 것이 문제, 이미 뇌 속에서 상영을 시작한 파노라마는 계속해서 내 눈과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어째서… 나를 선택한 거지.”
“선택이랄 게 있겠습니까. 그저….”
“그런 걸 묻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 않느냐. 내가 궁금한 것은 어째서 나를 쓰기로 마음 먹었는지에 대해서다. 나는 세라핌이나 케루빔처럼 압도적인 무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운이 좋아 권좌에 올라왔지만 도미니온스쳐럼 똑똑하지도 않지. 빠른 날개가 있다고 한들, 그것뿐이야.”
“…….”
“심성은 유약하기 짝이 없지. 나는 아직도 인간을 죽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전쟁 역시 마찬가지다. 커다란 뜻을 품고 있다고 한들, 파괴와 폭력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 물론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
“반드시 이뤄야 할 일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어. 우리는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지는 것은… 도저히.”
“쓰로누스 님은 약하지 않습니다.”
“아니… 나는….”
“쓰로누스 님은 결코 약하지 않아요. 케루빔 님, 아니, 어쩌면 세라핌 님보다 더욱더 강해지실 수 있으실 겁니다.”
“하지만.”
“쓰로누스 님은 어째서 인간을 사랑하십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사랑하도록….”
“어째서 인간을 그리 아끼시는 건지 묻고 싶습니다.”
“…….”
“…….”
“생각…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네.”
“별.”
“네?”
“인간은 저 밤하늘에 별과 같으니까.”
잠깐 동안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알콜 중독 비둘기의 표정은 진지했다.
‘도대체 이건 뭐야?’
거짓 하나 없는 진심으로 저런 대사를 내뱉을 수 있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괜스레 시야를 돌리고 싶어졌을 때 다시 한번 입을 여는 놈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
“그래. 그런 표현이 어울릴 것 같다. 인간은 밤하늘의 별 같아. 그들은 빛나고 있다. 내가 말주변이 없어 설명을 못 하겠지만 그들은 항상 빛나고 있어. 인간의 가능성은 무한대로 열려 있다. 그 가능성이 바로 그들이 자리한 우주야. 그들은 그렇게 각기 다른 방식으로 도화지를 빛내고 있지. 하핫. 물론 그 빛이 꺼지기도 하고 너무 커다란 빛이 주변의 다른 별들의 빛을 바라게 만들기는 하지만 그것 또한 아름답다.”
“…….”
“그 모든 것이 아름답다.”
“네.”
“나는 같은 크기로 빛나는 별들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의 개성 역시 아름다워. 어떤 별은 크게 빛나고 또 어떤 별들은 작게 빛난다. 각기 다른 빛을 비추며 밤하늘을 밝게 비추고 있다. 그래. 나는 그들의 개성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빛날 수 있는 그 능력이 아름답다고 생각해. 커다란 가능성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그들의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한다. 그들 자체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
“내 대답이 이상했나?”
“아닙니다. 딱 쓰로누스 님에게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해서 말입니다. 잠깐 웃음이 나왔습니다.”
“나를 비웃은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쓰로누스 님을 비웃을 수 있겠습니까. 아까 어째서 자신을 선택했는지 물어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
“그건….”
“그건?”
“쓰로누스 님이 인간과 닮았기 때문입니다.”
“…….”
“기분 나쁘라고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쓰로누스 님이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제게는 쓰로누스 님이 저 하늘에 빛나는 별 중에 하나로 보입니다. 인간은 유약합니다. 제가 인간이기 때문에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
“때문에 고민합니다. 문제에 대해 괴로워하고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이게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생각에 빠집니다. 덕분에 그들은 옳은 선택을 하기도 하고 그른 선택을 하기도 하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
“그렇기 때문에 빛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기 때문에, 후회하고 괴로워하며, 매일 같이 고뇌에 빠지기 때문에, 누구는 이전의 일을 되돌리고 싶어서, 누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 끊임없이 다음을 준비합니다. 그게 바로 그들이 빛날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런가.”
“그런 면에서…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쓰로누스 님은 인간들처럼 고민하고 후회합니다. 걱정하고, 별것 아닌 것들 때문에 깊은 생각에 빠집니다. 이런 질문을 제게 던진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쓰로누스 님을 볼 때마다 항상 생각했었습니다. 쓰로누스 님은 빛날 수 있다고, 더 강해질 수 있고, 더 성장할 수 있다고, 다른 천사님들보다 더욱더 높게 떠 있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게 제가 쓰로누스 님을 선택한 이유입니다. 쓰로누스 님은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본 모든 이들을 통틀어 제일 강하신 분입니다.”
“과… 과찬이로군. 그대의 말은… 나를 부끄럽게.”
“거짓 하나 없는 진심입니다. 쓰로누스 님.”
“부끄럽게 만들어.”
“…….”
“인간, 그 가면은 벗지 않는 건가?”
“추한 얼굴입니다. 누군가에게 보이기에는 부끄러운 얼굴입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가면을 벗는 일은 없을 거라고요.”
“하지만….”
천천히 녀석이 가면으로 손을 뻗는 것이 보인다. 가면쓰레기는 굳이 그 손을 피하지 않는다. 절대로 자신의 가면을 벗기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예상했던 것처럼 중간에 주저하는 은발 비둘기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결국에는 완전히 뻗지 못한 손을 내려놓는 모습.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녀석은 괜스레 앉아 있는 가면 남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에 응답하듯 가면쓰레기의 가면 사이로 쓰레기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밤하늘의 별. 쓰로누스 님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로 멋진 풍경이로군요.”
‘이 쓰레기 새끼… 이빨 터는 거 봐.’
“다음에도 함께 바라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어디에선가 많이 본 것만 같은 레파토리였다.
“그래, 그랬으면 좋겠군. 진심으로 말이다.”
“…….”
“밤하늘의 별… 그래. 다시 함께.”
잘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말이다.